422. 저주받은 해역
PRD가 발매된 이후로, PTW에서는 자신들이 발매한 게임 플랫폼의 유저들을 위해 여러 가지 게임들을 지속적으로 발매해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수많은 게임 중에서 가장 평가가 좋은 게임은 발매된 지 2년 가까이 지난 HC 101이었다.
출시된 시점부터 PRD의 터무니없는 스펙을 한계까지 끌어내 만든 시대를 타지 않는 그래픽.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투입해 추가한 마벌과 DC 히어로들의 등장.
마법과 수련, 과학 등의 다양한 특성을 골라 자신만의 히어로 체계를 구축한다는 게임 컨셉 등 그 게임의 모든 것이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 부분이 바로 어트렉션 파트였다.
게임 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물이, 실제로 동작하는 사물이었기 때문에.
TV를 틀면 자신이 활약한 히어로 활동에 대한 기사가 뉴스로 흘러나오고, 게임 안에 있는 잡지나 서적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게임 안에 서적나 잡지가 구현된 게임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많은 게임들에서 서적이나 쪽지를 통해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개발자가 미리 넣어놓은 단편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기능이 전부인 반면, HC 101에는 게임 속에서 변화하는 히어로들의 주요 활동 내역을 기사 형태로 구현하는 별도의 AI가 있어 매번 내용이 변화하도록 구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유저들은 전투나 구조 미션이 없을 때 아지트의 쇼파에 앉아 편하게 자신이 등장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것은 기존 게임과 비교했을 때 기술적인 면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태의 인 게임 미디어 체계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HC 101에서는 본인이 PS나 X-BOX를 가지고 있으면 장비 연결을 통해 게임 안에서 자신이 가진 콘솔 게임기로 콘솔 게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게임이 발매된 이후 한동안 SNS에서는 HC 101의 게임 세계 속에서 PS나 X-BOX를 사용하여 ‘PTW의 게임 속 세계에서 PTW의 콘솔 게임을 즐기는’ 독특한 인증사진들이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그 외에도 HC 101에는 멋지게 시민을 구해낸 뒤에 동료들과 바에서 술을 한잔 걸치거나, 호감도를 쌓은 히로인과 동물원에 놀러 가기도 하고, 게임 내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가 다양한 놀이기구를 체험하기도 하는 등, 실제 도시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다양한 놀이 장소가 곳곳에 있었다.
굳이 히어로 활동을 하지 않고 도시에서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만큼.
그런 HC 101의 인게임 컨텐츠는 비슷한 방향을 추구하는 다른 게임들과 흔히 비견되곤 했는데, 가장 자주 비교되는 게임이 ‘평범한 자동차 도둑 5’나 ‘라스트 데드 리뎀션 2’같은 록스타 게임즈의 게임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저들은 그런 명작과의 비교에서도 HC 101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것은 HC101의 모든 컨텐츠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PRD용 콘텐츠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똑같이 게임 속 세계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더라도, TV 앞에서 패드를 잡고 타는 것과 PRD를 이용해 그 격렬한 움직임을 그대로 전달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험을 전달해준다.
PRD를 개발한 PTW에서는 그 사실을 전 세계 어느 게임회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게임을 만들 때 게임 안의 모든 컨텐츠를 ‘만질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거의 집착에 가까운 집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만드는 게임의 배경이, 설사 중세 판타지 시대의 해적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음에도.
그리고 그 ‘디테일’에 대한 집착은, 본격적으로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해밀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었다.
‘마치 르네상스 페어에 온 것 같은 느낌이군.’
매년 8월 초부터 10월 첫 주말까지, 뉴욕에서는 중세 시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제인 르네상스 페어가 열린다.
그곳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은 각자가 테마에 맞는 코스튬을 준비해와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거슬러간 듯한 체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20개가 넘는 무대, 125개가 넘는 공연.
방패와 검, 플레일과 모닝스타 같은 실제 중세 시대 스타일의 장비를 입고 겨루는 검투사 대결.
긴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축제이니만큼, 뉴욕 르네상스 페어에서는 매주 축제의 컨셉이 바뀌곤 하는데, 켈트족을 테마로 한 축제에서는 모든 남성 참가자들이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시간 여행자를 테마로 한 축제에서는 현대 복장이나 ‘우주 전쟁’의 복장을 입은 관람객들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해밀턴이 떠올린 테마는, 르네상스 페어에서 보았던 ‘해적 주간’의 테마였다.
어깨 위에 가짜 앵무새를 얹고 다니거나, 멀쩡한 눈을 안대로 가리기도 하고, 갈고리 장식을 손에 달고 다니기도 하는 등.
해적 주간 동안 르네상스 페어 행사장은 사람들이 해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 생각하는 다양한 컨셉의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그리고 PTW에서 구현한 항구의 모습도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거기엔, 르네상스 페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
선원이나 주점 아가씨를 연기하는 행사 진행자들의 모습이 아닌, 진짜로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에서 잡아 온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의 NPC들.
그들의 모습은 PTW의 직원들이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어낸 건물디자인과 합쳐져,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현실감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었다.
‘일부러 새는 잔을 만드는 미친놈들은 PTW가 아니면 찾아보기 어렵겠지.’
나무와 쇳조각을 얼기설기 붙여 조잡하게 만들어진 맥주잔을 들고 있던 해밀턴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의 틈새에서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에일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러자 진짜 액체를 만진듯한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
심지어 마셨을 때의 느낌까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면, 정말로 이 가상의 세계를 현실과 구분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해밀턴은 정면의 남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앉은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호탕한 목넘김을 보여주며 가상의 맥주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하아아아!! 역시 맥주는 여기 맥주가 최고야!
어떻게 하는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원함의 차원이 다르다니까?”
시원한 타격음을 내며 잔을 내려놓은 호든은 갑자기 해밀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가 손에 쥔 맥주잔을 보며 물었다.
“어라? 선장 양반. 술은 못 마시는 타입이었나?”
아마도 마시는 모션을 취하지 않으면 나오는 대사인 듯했기에, 해밀턴은 맛이 느껴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입을 벌리고 마시는 흉내를 내며 잔을 기울였다.
‘역시 맛은 안 느껴지네. 소리는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지만.’
반쯤 비어버린 잔을 바라보며, 해밀턴은 진짜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 했다.
이런 분위기의 술집에서, 이렇게 생긴 나무잔에 담긴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정말 해적이 된 기분이었을 테니까.
그때, 해밀턴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던 호든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선장 양반.
그럼 술도 한잔했으니,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문제는 그거요.
아까 나는 그 자식들에게 그놈들이 달고 있는 문양이 어떤 가문의 문양인지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거든.”
“어떤 가문의 문양입니까?”
“오른쪽 위를 바라본 채 발톱으로 이를 쑤시는 사자의 모습을 한 문양을 쓰는 가문은 스테인 제국의 에르베스 가문이 유일하지.
내가 배에서도 힘만 센 무식쟁이로 통하는 건 알지만, 그런 나도 알 정도로 그 가문의 위세는 엄청나거든.”
“그 정도입니까?”
“지도 가지고 있어?”
“예.”
해밀턴은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거기엔 이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섬과 대륙들, 그리고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공백의 지역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해밀턴은 한 지역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대충 이 근방의 모든 섬은 에르베스 가문의 탐험가들이 발견한 섬이라고 보면 돼.
원래부터 탐험으로 유명한 가문이었고, 지금도 세계 최대 규모의 탐험단을 운용하고 있는 가문이지.
그리고 그 ‘발굴’ 작업으로 인해, 그 어떤 가문보다 막대한 수입을 얻고 있는 가문이기도 하고.”
“수익이요? 탐험이 돈이 됩니까?”
“지도에 그려진 섬과 대륙들은 실제 그것들의 절반도 안 돼.
각 유력 가문들은 자신들만 가지고 있는 별개의 지도를 하고 있고, 그걸로 전용의 무역로를 개척해서 수익을 올리지.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위치에 있는 섬에서 뭔가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건 전부 그 가문의 독점 상품이 되는거야.
이곳 맥주를 차갑게 유지하게 만드는 ‘해빙석’도, 에르베스 가문의 유명한 독점 상품이지.
그 누구도 이걸 캘 수 있는 섬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이걸 가져와야 하는지 알지 못해.
그렇기에 각 가문에서는 탐험가들을 후원해서 자신들만의 섬과 대륙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존재는, 우리에게 배와 항해 비용을 지원해줄 바로 그 후원자들이고.”
“그럼 그 후원자들은 아마도 귀족들이겠군요?”
“당연하지.”
“혹시 아는 귀족이라도 있습니까?”
“선장 양반. 날 봐. 내가 아는 귀족이 있을 사람으로 보여?”
해밀턴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하지만 방법은 찾아야겠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그 비싼 ‘범선’을 후원해줄 귀족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해밀턴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뭐, 너무 그렇게 풀죽은 모습은 하지 말라고.
내가 본 선장의 강점은 모험 이야기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 열정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아예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방법이 있습니까?”
“밑바닥 인생에는 밑바닥 인생의 방식이 있는 법이지.”
호든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이 주점으로 내가 선장을 데려온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해밀턴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주점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리는, 가슴 부위의 노출도가 상당히 높은 복장의 한 여성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이 아가씨의 이름은 이사벨라야. 이 주점의 간판 아가씨이기도 하지.”
“이사벨라에요.
이사벨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학자분 같은데, 왜 이런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아저씨랑 왜 같이 계세요?”
“누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찼다는 거야?”
“팔씨름 대회를 한답시고 상대방 팔을 통째로 부러트리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만하죠.”
“뭐 가끔은 나도 내 머릿속에 뇌 대신 다른 게 들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니까, 부정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오늘 너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말끔하게 생긴 분이시니 나에 관한 이야기는 그쯤 하도록 하지.”
“흠···. 학자 분이 주점의 꽃에 무슨 용건이실까?
사랑 고백이라도 하시려는 건가?”
이어지는 선택지를 보며, 해밀턴은 호든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호든은 이 주점의 아가씨들을 통해, 주점에 방문하는 귀족들 중 후원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작은 한 걸음.
그 한걸음이 자신의 설득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해밀턴은 마음속에 한줄기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선택지를 읽어나갔다.
연기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에른네스트 로테즈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세계 최고의 탐험가가 될 사람이기도 하죠.”
배도 없고, 자금도 없는 두 사람의 모험은, 그렇게 항구 구석의 작은 주점에서 그 작은 발걸음을 딛으려 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로테즈 씨의 말은, 경험도 선원도 배도 없는 로테즈 씨를 후원할 정신 나간 귀족 후원자를 찾고 싶다는 거죠?
돈이 썩어놔서 바닥에 버리고 싶으면 모를까,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그 부분을 어떻게든 해 달라고 하는 거잖아.”
호든이 중간에 끼어들며 이사벨에게 말하자, 이사벨이 호든을 타박했다.
“호든 씨. 저희 주점 아가씨들이야 취객이랑 시비가 붙을 때마다 저희를 도와주신 호든 씨를 돕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탐험의 후원자를 찾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배라도 있으면 모를까, 범선까지 지원하면서 초짜 선장에게 일을 맡기려는 후원자를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줘.
선장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생각이 바뀔 테니까.”
“배도 없는데 선장이에요?”
“나한텐 선장이다!”
“아, 알았으니까 소리는 지르지 말아요.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가끔은 본인 목소리가 남들보다 크다는 걸 자각하시라고요.”
“헤헤. 미안···.”
2m가 넘는 거구의 남자를 말 한마디로 물러나게 만든 이사벨라는 눈앞에 있는 해밀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뭔가를 판단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좋아요. 이야기를 들어보죠.
배 없는 선장분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탐험하려고 하시죠?”
“미혹의 해역입니다.”
그러자 이사벨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야기 잘 들었어요. 술 맛있게 드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
“아이고 왜 그러는데?”
호든이 그런 그녀의 옷깃을 붙잡자, 그녀가 말했다.
“호든 씨. 제정신이에요?
거긴 아무도 못가요.
내놓으라 하는 베테랑 탐험가들도 전부 불귀의 객이 된 저주받은 해역이라고요.
그리고 학자 씨.
로테즈라고 했나요?
미혹의 해역엔 근처에만 가도 보이는 거대한 섬이 있어요.
하지만 누구도 그곳을 ‘미혹의 섬’이라고 부르지 않죠.
왜 그런지 알아요?”
“어째서입니까?”
“사람이 밟을 수 없는 섬은, 그 존재가 없는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녀의 말대로, 미혹의 섬은 현재 해밀턴이 있는 항구에서 꽤나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그 근방은 지도에서도 그려지지 않은 ‘미탐사 지대’로, 지금까지 어느 탐험가도 탐험에 성공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섬이 있음에도 섬의 위치 자체가 지도에서 지워질 만큼.
그 섬은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밀턴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이 호든에게 읽어 준 수많은 동화책들.
그 안에 대놓고 적혀있는 힌트들이, 자신에게 그 섬을 탐험할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해밀턴은 그녀에게 그 섬을 탐사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그녀는 180도 바뀐 태도를 보이며 해밀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화책에 그려진 그림을 토대로, 이 계획을 짠 거라는 말이죠?”
“동화책이긴 하지만, 그 안에 그려진 삽화는 원작자의 그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 안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있는 바위가 있었죠.
그 그림을 그린 탐험가도, 그 그림으로 동화책을 만든 작가도 그것이 의미 없는 낙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전 그것이야말로 섬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힌트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한 탐험가가 섬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했고, 그는 미리 준비한 망원경으로 섬의 모습을 관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망원경을 통해, 그는 섬 안에 있는 특이한 바위를 발견했고, 그것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림으로 그렸다.
이후에 그 항해일지에 적힌 그림을 본 동화 작가가 동화책에 그 삽화를 사용했고, 그것이 동화가 되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라는 것.
그러나 그 바위에 적힌 이상한 그림은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기에, 꽤 많이 팔린 동화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의 의미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책을 읽었기에 모르는 언어라도 보는 순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론만 최강인 모험학자’특성을 가진 해밀턴을 제외하면.
해밀턴은 게임이 제공한 자신의 능력에 도박을 걸어볼 생각이었다.
“원거리가 아니니까 큰 범선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 해류가 너무 복잡해 배가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니 오히려 해류를 잘 탈 수 있는 작은 배가 유리하죠.
그 섬의 각 해류가 있는 지점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지역마다 이런 바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엔, 섬에 들어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해류를 타야하는 지가 적혀있죠.
빤히 보이는 가이드를 두고도 아무도 그 섬에 접근할 수 없었던 건, 아무도 동화책에 있는 이 문자를 해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류를 타는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런 복잡한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실력 있는 항해사가 필요해요.
그리고 빠르면서도 단단한 좋은 배가 필요하겠죠.
배라는 존재는, 크든 작든 언제나 비싼 법이고요.
게다가 그 계획은 너무 위험해요.
만약 후원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 계획을 설명한다면, 후원자가 그 계획을 가로채서 다른 탐험가를 고용할 가능성이 더 크죠.”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호든이 말했다.
“애당초 그 동화책에 적힌 바위의 문장은 3개밖에 없거든.
나머지는 그 3개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가야 보이는 위치에 있어.
그리고 그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내가 알기론 우리 선장 뿐이고.”
“오! 멋지다! 동화책에서 찾은 이야기로 모험을 시작한다니!
언니! 이거 진짜 멋진 것 같아요!”
그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주점 아가씨가 소리쳤다.
그때야 해밀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점의 모든 아가씨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해밀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지만 해밀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처럼 많은 미인의 주목을 한번에 받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사벨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뭐해. 장사 안 해?”
“영업시간은 진즉에 끝났다고요.
손님은 다 돌아갔어요.
다들 집에 가야 하는데, 언니 일행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참고 있었죠.
게다가 이런 이야기라면, 도울 사람이 많은 쪽이 더 유리할 거고요.”
“맞아. 나도 단골인 귀족들이 꽤 있단 말이지.”
“네가 말하는 귀족이 에릭을 말하는 거라면 그 아저씨는 귀족이 아니야. 그냥 돈 많은 상인이지.”
“옷은 잘 입잖아?
그리고 지금 같은 경우는, 출신보다는 돈이 더 중요할 거고.”
그러자 이사벨라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좋아요. 제가 졌어요. 분명 당신의 꿈엔 분명한 ‘계획’이 담겨있네요.
어쩌면 후원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저희는 주점 손님 중에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단, 그동안 해주실 일이 하나 있지만요.”
“그게 뭡니까?”
“호든 씨의 괴력이 탐험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로테즈 씨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호든씨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해요.
탐험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두 사람의 선원을 더 모집해올 것.
그것이 제 조건입니다.”
“두 사람이라면 어떤?”
“그런 식으로 엄중히 봉인된 섬이라면 분명 안에 유적이 있겠죠.
그리고 대부분 유적엔, 함정이 설치되어 있고요.
그래서 탐험가분들은 선원 중에 몸놀림이 좋은 선원을 편성하곤 해요.
함정 해체의 전문가이자, 일반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함정도 척척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로테즈 씨가 읽어준 방법을 토대로 복잡한 해류의 소용돌이를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
‘도굴꾼’과 ‘항해사’.
이 두 사람을 모으는 게, 협력의 조건입니다.”
해밀턴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사벨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덧붙이듯 그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유적 발굴 수익의 10%는 저희에게 주셔야 해요.
어찌 되었건 후원자를 찾아서 연결해주는 건 저희니까.”
그러자 호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10%라니?! 그런 도적 같은?! 1%만 받아!”
“어머, 그럼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저희가 그 정도까지 해 드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으니까요.”
“젠장, 3%!!!”
“7%.”
그때 해밀턴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5%로 합시다. 대신 후원자의 지원 수준에 따라, 추후에 조정하는 거로 하고요.”
“그럼 저희도 더 좋은 조건을 걸 수 있는 후원자를 찾아야겠네요.
동의하겠어요.”
주점에서의 미팅은, 그렇게 끝났다.
주점 아가씨들의 도움을 받아, 술집에 방문하는 귀족들 중 후원자를 찾는 방식으로.
해밀턴은 과연 자신을 후원해줄 귀족이 누구일까를 상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게임 속에서, ‘모험’이란 개념을 너무나도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분명 나머지 선원들을 모집하는 과정도 끝내주겠지.
후원자도 분명 엄청나게 매력 있는 사람일 테고.
젠장, 빨리 만나고 싶다.’
해밀턴이 생각하기에, 이 게임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현실의 느낌을 완벽하게 구현한 멋진 범선이나, 중세 항구 분위기를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는 그래픽이 아니었다.
해밀턴은 이 게임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가장 매력적인 컨텐츠라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첫 번째 선원이자 마지막 선언이 될 호든도 그렇지만, 오늘 만난 이자벨라라는 여성도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밀턴은 빠르게 다음 선원을 모집하기 위한 스탭을 밟고자 했다.
“그래서, 항해사와 도굴꾼은 어디서 구하는 게 좋을까요?”
“항해사는 나도 몰라.
특히나 이사벨이 말한 것처럼 해류를 손발처럼 잘 타는 항해사라면, 대부분 지금 바다에 나가 있을 거라고.
뭐, 딱 한 사람 알고 있긴 한데, 그녀는 절대 따라오지 않을 테니 잊는 게 좋아.
하지만 도굴꾼은 짐작 가는 데가 있지.”
“누구죠?”
“누구라기보다는 어디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거야.
그러니 날 따라오라고. 캡틴.”
그렇게 말한 호든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따라간 해밀턴은, 잠시 후 도착한 장소에서 호든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호든이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누구를 데려가려 하는지.
그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뻔한’ 상황이었다.
호든이 해밀턴을 데려간 장소.
그곳은 ‘곡예’의 진정한 프로들이 하늘을 가르고 불 사이를 뛰어넘는 곳.
바로 ‘서커스’가 펼쳐지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