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30만 명의 정점
아침 일찍 비행기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오다는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대전으로 향했다.
전날 저녁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비행기 안에서는 오로지 물만 먹었기 때문에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지만, 오다는 NE 컨벤션에 가서 식사하기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기내식조차 거부한 것이었다.
오다가 그렇게 배고픔을 감내한 이유는 역대 PTW 팬들의 NE 컨벤션에 대한 음식 평가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NE 컨벤션을 즐기는데 필요한 기본 상식에 대해 알려줄게.
NE 컨벤션에서는 기본적으로 각 지역의 테마에 따라서 게임과 어울리는 오리지널 메뉴와 음료가 제공되는데, 상당히 싸고 맛있는 게 특징이야.
재료를 엄청 좋은 걸 쓰는데도 불구하고, 양도 많고 값도 싸거든.
PTW에서는 매번 NE 컨벤션에서 제공될 메뉴를 위해 일류 쉐프를 초청하여 오리지널 음식을 만들지.
그리고 NE 컨벤션이 끝나면 레시피를 인터넷에 공개하는데, 직접 만들어 먹는 게 거기서 사서 먹는 것보다 훨씬 비싸.
제대로 맛도 안 나고.
‘좋은 재료의 대량 구매가 가능한 대기업에서 마진을 포기하고 음식을 만들면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꼭 빈 속으로 행사장에 도착하는 걸 권장한다.
게임 속 세상처럼 꾸며진 컨벤션 행사장을 걸으며 게임 안에 등장하는 간식을 먹고 있으면, 진짜로 내가 게임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이번 5차 컨벤션은 역대 NE 컨벤션의 세트가 모두 구현된 테마파크 형태의 컨벤션이라고 하던데, 그럼 아마도 역대 컨벤션에서 팔렸던 모든 메뉴가 동시에 제공되겠지.]
오다가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것은, ‘NE 컨벤션 완벽 정복을 원하는 PTW 팬들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커뮤니티 인기 글이었다.
본인을 1, 2, 3, 4차 NE 컨벤션에 모두 참가한 사람이라고 밝히며 티켓 사진까지 인증한 작성자는, NE 컨벤션을 100% 즐기기 위해 관람객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적어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오픈 일주일 전에 PTW에서 공개한 조감도에 따르면 이번 컨벤션 행사장은 기존 컨벤션 행사장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어.
특히 5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된 3차 NE 컨벤션의 세트 구역은 그야말로 PTW 스케일이 뭔지 그대로 보여주는 압도적인 넓이를 자랑하지.
그러니까 하루 만에 완벽하게 모든 걸 다 보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게다가 공개된 조감도에서도 5차 NE 컨벤션 에리어는 ‘?’로 가려놨기 때문에 뭐가 있는지는 행사 당일이 되기 전에는 알기 어려워.
그러니 지금부터는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5차 NE 컨벤션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는 예상 투어 루트를 설명해줄게.
가장 먼저 준비할 건, PTW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딥 다이버를 준비하는 거야.
이번 행사장은 딥 다이버를 활용한 기믹이 엄청나게 많다고 했으니까, 그걸 쓰고 행사에 참여해야 볼 수 있는 게 더 늘어나겠지?
그러니 집에 딥 다이버가 있다면 꼭 가져가도록 하고, 만약 없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PTW라면 분명히 딥 다이버를 대여하는 서비스도 진행할 테니까.]
오다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오픈 한 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긴 대기 행렬은 이번 행사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고, 그 관광객의 대부분이 머리에 딥 다이버를 쓰고 있다는 점은 PTW가 전 세계 게이머의 삶에 끼친 파급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로 있네.’
입구 근처를 보니 게시글 작성자의 말대로 딥 다이버를 빌려주기 위해 설치된 커다란 안내소가 보였다.
거기엔 수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상태로 들어가 딥 다이버를 쓴 상태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다는 등에 멘 가방을 꺼내 자신도 딥 다이버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전원을 키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PTW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 회선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네트워크에 연결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
[상태가 온라인 상태로 변환되었습니다.
특정 지역 진입으로 인한 로컬 업데이트 정보가 검색되었습니다.
해당 업데이트 제공자에 대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딥 다이버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반투명한 형태의 홀로그램 UI.
거기에 떠 있는 내용은, 테마파크의 원활한 이용을 위해 PTW가 제공하는 신규 업데이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종의 AI 가이드 북 같은 거네.’
오다가 허공에 손가락을 대어 [업데이트]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업데이트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가동을 누르자, 허공에서 펑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작은 요정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페르!]
[저는 페로!]
[이 행사장의 가이드를 맡은 가이드 AI 입니다!]
마치 판타지 게임 속 요정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오다가 말했다.
“나는 오다 츠요시. 도쿄에서 왔어.”
[오다 츠요시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 먼저 저희 둘 중에 안내받고 싶은 AI를 선택해주세요!]
“두 사람이 서로 다른가?”
[달라요! 여기 있는 페르는 에리어 투어 전문, 저 페로는 쇼케이스 투어 전문 가이드니까요!
저희 두 사람의 특징에 대해 자기 소개를 해드릴까요?]
오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왼쪽에 있던 여자아이 모양의 요정이 가슴을 내밀며 외쳤다.
[흐흠! 제 이름은 페르.
저는 에리어 투어 전문 가이드로 이 넓은 NE 컨벤션 행사장을 둘러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가이드 AI입니다!
저는 각 에리어에 진입할 때 주목할만한 포인트를 추천하거나,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게임이 있다면 해당 게임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함께 최적의 투어 루트를 제안해 드릴 수 있어요!
그 외에는 굳이 놀이기구에 방문해서 줄을 서지 않아도 관심 있는 어트렉션의 탑승 예약을 원격으로 신청한다거나, 각 놀이기구의 거리와 동선을 파악해서 적절한 시기에 해당 어트랙션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맞아요! 테마파크 형태로 제작된 PTW 파크의 동시 최대 입장 인원은 30만 명 정도이지만, 어트렉션의 최대 수용 인원은 그보다 많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물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리는 인기 어트렉션을 보려면 대기 시간이 좀 있을지는 몰라도, 굳이 줄을 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추천해 드리는 한적한 곳을 찾아 놀다가 예약된 시간에 방문하여 어트렉션을 즐기면 되니까요!]
“오, 그건 엄청 좋네. 줄을 안서도 되는 테마파크라니···.”
그러자 옆에서 날아다니던 작은 소년처럼 보이는 AI가 끼어들며 외쳤다.
[다음은 저, 페로입니다!
저는 이번 5차 NE 컨벤션의 쇼케이스 투어를 돕기 위해 제작된 가이드 AI입니다!
제가 가진 기본 기능은 페르가 가진 기능과 같지만, 전 주로 쇼케이스에 집중한 투어 가이드를 제공해요!]
“쇼 케이스?”
[PTW 파크는 기존 NE 컨벤션의 내용을 관람객들이 다시 즐길 수 있게 하는 목적도 있지만, 새로 발매될 PTW의 신작을 공개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대 NE 컨벤션의 세트를 돌아보며 그때의 즐거운 추억을 즐기는 것도 물론 행복한 일이겠지만, PTW가 만든 새 게임을 보고 즐기며 새로운 시대의 게임이 뭔지 보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이니까요!
혹시 주인님이 기존에 열렸던 NE 컨벤션보다 새 게임에 관심이 더 많다면, 저를 가이드로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PTW의 5차 NE 컨벤션 쇼케이스를 100% 즐기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가이드 해 드릴 테니까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오늘 진행될 신작 게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페로를, 기존 NE 컨벤션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페르를 가이드 AI로 고르라는 거네.
어쩌지···. 둘 다 매력적인 선택지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오다는 페로를 가이드로 선택했다.
기존의 NE 컨벤션 세트야 다음에 또 방문해도 똑같이 즐길 수 있는 거지만, 오늘 공개되는 PTW의 신작 쇼케이스를 세계 최초로 볼 기회는, 오늘이 아니면 오지 않는 기회였으니까.
오다는 눈 앞의 두 요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페로로 하겠어.
페르는 다음에 또 방문하면 선택하도록 할게.”
그러자 소년처럼 보이는 작은 요정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만세를 불렀다.
[야호! 또 이겼다! 이걸로 167444전 124277승이다!]
[으···. 오늘은 쇼케이스 첫날이라 그런 거라고! 내일부터는 내가 이길거니까!
주인님! 오늘 가이드를 맡지 못한 건 매우 아쉽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럼 페로와 함께 행복한 하루 되세요!
오늘 하루 주인님의 여정에 요정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그렇게 말한 페르가 팔을 휘두르자, 빛나는 가루가 오다의 머리 위에 뿌려졌다.
그것은 단순한 그래픽 연출이었지만,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멋진 연출이었다.
“고마워. 다음에 보자.”
오다가 말하자, 페르는 90도로 고개를 숙여 오다에게 인사하고는, 아직도 자신을 놀리고 있는 페로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는 메롱 하고 혀를 내밀며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직 입장도 하기 전인데 벌써 재밌네.’
오다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 남겨진 페로는 씩씩대며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오다를 향해 날아와 말했다.
[오픈 전까지는 앞으로 15분 23초가 남았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투어 계획에 관해 설명해 드릴까요?]
“응.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그럼 먼저 조감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페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다의 앞에 거대한 홀로그램 지도가 등장했다.
페로는 그 위를 날아다니며, 오다에게 자신이 설계한 동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여드리는 것은 오픈 직후 전체 관객들의 예상 이동 루트입니다.
전체 관람객 중에 저 페로를 가이드로 선택한 12만 4천 명 정도의 관람객은 5차 NE 컨벤션 에리어로 바로 이동하여 신작 게임의 체험을 위해 준비된 어트랙션을 즐기게 될 겁니다.
저는 그 관람객들이 한곳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각 관람객의 투어 루트를 개별적으로 컨트롤 해서, 전체 관객이 좀 더 쾌적하게 최대한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가이드 루트를 잡는 역할을 맡고 있죠.
말하자면 AI가 통제하는 신호등 통제 시스템 같은 거예요!
그리고 제가 주인님을 위해 설계한 투어 루트는 바로 이겁니다!]
오다는 페로가 보여준 투어 루트를 꼼꼼히 살폈다.
거기엔 각 어트렉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한번 이용하는데 걸리는 시간, 각 어트렉션 사이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입장을 위해 대기해야 하는 시간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 이용 20년차 단골이 만든 것 같은 투어 루트를 보며 감탄하던 오다는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페로에게 물었다.
“페로?”
[예! 주인님!]
“이 투어루트는 변경이 가능해?”
“변경이요?”
“여기 따르면 식사가 12시 반쯤으로 잡혀 있는데, 사실 내가 지금 배가 아주 고프거든.
일단 뭘 좀 먹고 시작하고 싶은데?”
[그 정도야 쉽죠!! 그럼 입장하자마자 예약 가능한 식당 리스트와 메뉴를 보여드릴게요!]
페로가 보여준 메뉴를 살펴보던 오다는 메뉴의 구성이 매우 특이함을 느꼈다.
한쪽은 무슨 중세시대 판타지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보존식 같은 형태의 메뉴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다는 그중 한 가지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키리며 페로에게 물었다.
“이 ‘영원한 스튜’라는 건 뭐야?”
[아, 그거요? 판타지 영화나 게임에서 여관에 가면 언제나 모닥불 위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가 있는데, 바로 그겁니다.
24시간 365일 끓이면서 물이 줄어들면 물을 넣고 재료가 줄어들면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넣어서 푹 끓인 스튜죠.
물론 PTW파크에서 제공하는 스튜는 비쥬얼과 재료만 구현했을 뿐, 맛은 그보다 훨씬 뛰어나지만요.]
“이 ‘B랭크 조종사용 지정 보존식’이라는 건?”
[사각형 모양의 에너지 블록같이 생긴 음식인데 PTW에서 자체 개발한 음식 전용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간편 식사입니다.
맛은 굉장히 좋은 편이라고 하네요.]
“그럼 아마도 이게 로봇이랑 관련된 신작의 테마 요리인가 보네.
이걸로 할까?”
[그것도 좋지만, 배가 아주 고프시다면 입구에 가까운 1차 NE 컨벤션 에리어의 식당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거리도 가깝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니까요.
우선 5차 NE 컨벤션 에리어로 가는 길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5차 에리어에서 점심을 드시는 건 어떨까요?]
“그거 좋다. 그렇게 하자.”
[그럼 예상 소요시간에 맞춰 투어 루트를 재구성하겠습니다.]
오다는 마치 놀이공원 가이드를 앞에 두고 친한 친구와 관람 계획을 세우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페로가 제안한 투어 루트를 재조정했다.
대기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오늘 공개될 신작 게임을 최대한 더 플레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리고 마침내 투어 계획의 재조정이 어느정도 마무리 될 즈음, 커다란 음악 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PTW 파크의 입장이 개시됩니다.
단체 관람객 여러분은 일행과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 하루 PTW가 팬 여러분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세계 유일의 게임 컨셉 테마파크를, 즐거운 기분으로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정문이 열리며 테마파크 내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정문 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의 입장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를 숨 막히게 하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이런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입장 순서에 맞춰 입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다는 PTW가 안내 직원도 얼마 없는 상태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하는 것인지 궁금해했지만, 곧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자신의 곁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페로가, 오다에게 입장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 입장 속도대로라면 게이트 통과까지 12분 정도 걸리겠네요.
혹시 예약한 티켓 가지고 계세요?]
“모바일 티켓인데 괜찮아?”
[화면을 띄워서 딥 다이버의 카메라 앞에 세워주세요.
예. 그 자리면 돼요.
예약 티켓 스캔 완료.
중복 티켓 데이터 확인···.완료.
워크 패스트 계정과 티켓 데이터 교차 검증 실시···. 완료.
딥 다이버와 PTW파크의 입장 티켓 데이터가 연동 완료되었습니다.
주인님. 이제 입장하실 때는 별도 절차 없이 딥 다이버를 쓴 상태에서 게이트를 통과하시면 됩니다.]
‘일종의 ETC(일본의 하이패스)같은 거네. 어쩐지 이 많은 인원이 순식간에 입장하더라.’
절로 감탄이 나오는 운영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테마파크라 하면, 5분짜리 놀이기구를 한번 타기 위해 2~3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음식을 살 때도 줄, 음료수를 살 때도 줄.
거기에 멀리 떨어진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놀이공원은 의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자신이 만든 놀이공원의 추억이 퉁퉁 불어터진 종아리와 끝없는 줄서기의 기억으로 물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PTW 파크는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을 사용해 입장객의 분포를 조정하고 있었다.
바로 AI 가이드 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그를 통해, 놀이공원에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발생하는 시간을 극도로 줄이고, 줄을 서는데 들어가는 대기 시간을 제거하며, 관객들 사이에 발생하는 병목현상을 제거하는 것.
그것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PTW가 만든 ‘세계 유일의 놀이공원’에 걸맞은, 최신 기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
“후, 배 터지겠네.”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는 오다를 향해, 페로가 말했다.
[주인님. 점심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간단하게 드시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그 시간에 식당에 사람들이 몰릴 게 뻔하잖아.
아무리 분배를 잘 한다고 해도, 대기 시간이 없을 수는 없으니 점심은 좀 늦게 먹도록 하자고.
게다가 식사가 너무 맛있기도 했고.
‘NE 상사병’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뭐 그런 미친 단어가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음식을 먹는 순간 느낄 수 있었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NE 상사병’은 NE 컨벤션에 참가한 PTW 팬들 사이에서 발병한다고 알려진 미지의 증상이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먹어도 맛이 없게 느껴지고, 뭘 보아도 시시하게 느껴지는 증상.
그것은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이야기였지만, 컨벤션 행사장에 와 있는 오다는 그렇게 주장하는 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차 컨벤션 행사장인 MYOM의 마탑에서 먹었던 식사는, 정말 환상적으로 맛있었기 때문에.
‘겨우 5백 엔 정도의 가격에 그 양과 그 가격이라니.
그런 걸 먹고 나면 당연히 다른 음식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게다가 놀이공원 특유의 바가지 상술도 전혀 없고.’
마법사의 탑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하는 모습을 그대로 구현한 세트를 바라보며, 훔쳐서 가져가고 싶은 디자인을 가진 기기묘묘한 디자인의 그릇에 담긴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오다로 하여금 원래의 목적을 그만두고 1차 NE 컨벤션 세트장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다는 굳은 각오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1차 NE 컨벤션 에리어를 나섰다.
오늘의 목적은 PTW가 공개하기로 약속한 ‘히든 카드’의 쇼케이스를 보는 것이었기에.
배를 채운 오다는 AR이미지로 구현된 화살표를 따라가며 미리 지정해둔 투어 루트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마치 그의 팔을 붙잡고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듯한, 다른 컨벤션 에리어의 행사 세트를 묵묵히 무시하면서.
그리고 잠시 후, 오다는 겨우 원래의 목적인 5차 NE 컨벤션 에리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오다를 보며, 페로가 말을 걸었다.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엄청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꽤 지치신 것 같은데요?]
“내 몸 상태도 볼 수 있어?”
[딥 다이버에는 사용자의 신체를 스캔하기 위한 여러 센서가 들어있으니까요.
AI 가이드의 역할 중에는 관람객의 체온이나 몸동작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을 경우 가장 가까이 있는 휴식 에리어의 위치를 안내하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이테크네.
하지만 내가 지친 건 딱히 먼 거리를 이동해서 그런 게 아니야.
여기까지 오는 길에 통과했던 에리어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는 게 힘들었던 거지.
PTW의 팬이라면 당연한 거야.
예전의 NE 컨벤션은 입장 제한 수가 너무 적어서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너무 적었으니까.
그걸 다시 체험할 수 있다는 유혹은 엄청나게 강력하지.
특히 VR로만 봤던 4차 NE 컨벤션 에리어를 현실에서 볼 수 있다는 유혹은 엄청나게 강력했어.
마지막엔 거의 숨을 참고 걸어와야 했을 정도라고.”
[아마 페르였다면 주인님을 그곳으로 이끌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페르가 아닌 페로죠.
그리고 주인님은 투어보다는 신작의 쇼케이스를 100% 즐기기 위해 저를 가이드로 선택하셨고요.
그러니 저는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오늘 있을 신작 게임의 쇼케이스를 보고, ‘페로를 선택하길 잘했다.’라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우는 AI의 말을 들으며, 오다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페로를 향해 말했다.
“그래. 너만 믿을게.”
[맡겨주세요!]
그때, 가슴을 내밀며 자신 있게 외친 페로가, 갑자기 손바닥을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오다의 귓가에 날아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주인님.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로봇’ 좋아하세요?]
“어?”
[로봇이요.
엄청나게 커다란 덩치로 뭐든지 때려 부수는 로봇.
좋아하세요?]
오다는 생각했다.
이 질문은, 페로를 가이드로 고른 모든 관람객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질문일까?
아니면 자신에게만 특별히 하는 질문일까?
이런식의 질문에 대해 ‘올바른 답’이 뭔지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게이머의 본능과도 같았기에, 오다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페로가 원하는 정답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뭐가 달라지고, 싫어한다고 이야기하면 뭐가 달라지지?
애당초 이번 5차 NE 컨벤션 행사장에서 공개될 게임은 2가지라고 했었지.
하나는 슈퍼볼 광고에서 나온 해적 게임이고, 나머지 하나는 로봇과 관련된 게임이고.
그럼 로봇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해적 게임에 대한 체험은 건너뛰자고 말하게 되는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오다는 그것이 딱히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라고 결론 내리고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기로 했다.
“좋아하지.”
[해적과 비교하면 어때요?]
“해적도 멋지지만, 로봇이 더 멋지다고 생각해.”
[좋습니다. 그럼 로봇을 사랑하시는 주인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투어 루트를 제시해드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미리 정해둔 투어 루트를 수정한다고?”
[예.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아요.]
“어째서?”
[제 예상보다 5차 컨벤션 행사장으로 몰린 인원이 너무 많아서요.
현재 시각을 기준으로 PTW 파크에 입장해 있는 관람객의 수는 총 수용 인원의 99% 수준이에요.
숫자로 따지면 29만 명이 넘는 인원인데, 입장 인원 전원이 AI 가이드를 통해 저녁 5시에 진행될 신작 쇼케이스 참여를 신청했죠.
쇼케이스에 직접 참가할 수 있원은 20만명 수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10만 명 정도는 딥 다이버를 통해 원격으로 쇼 케이스를 관람해야 할 겁니다.]
“그럼 그건 추첨으로 뽑는 거야?”
[아뇨. PTW에서는 이런 사태를 예측해서, 쇼케이스 행사장에 입장할 수 있는 관람객을 선정하는 예비 기준을 마련해놨죠.
그리고 그 예비 기준의 조건은, ‘5차 NE 컨벤션 행사장에서 PTW의 신작 게임을 미리 플레이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오다는 페로의 설명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페로에게 질문했다.
“잠깐만. 5시에 진행되는 게 신작 게임의 쇼 케이스라고 했지?”
[옙.]
“근데 쇼 케이스 전에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다고?”
[옙.]
“그럼 쇼케이스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이미 게임은 다 까발려진 상태잖아.”
[그건 괜찮아요. 5시에 진행될 ‘히든 카드’의 쇼 케이스는, PTW의 신작 게임을 플레이 해 본 적이 있어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쇼케이스니까요.]
‘게임 공개를 위한 쇼케이스인데 게임을 먼저 시켜준다고? 이게 말이야 당나귀야?’
오다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페로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PTW 팬들에게는 익숙한 격언.
‘PTW가 하는 짓에는, 언제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를 믿고서.
“좋아. 제안하려는 게 뭐야?”
오다가 말하자 페로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오오! 좋아요! 주인님!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말씀드리죠!
이번 5차 NE 컨벤션 행사장에는 PTW의 신작 게임의 체험을 위해 10만대의 PS5와 10만대의 X-BOX ONE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단 거기서 PTW의 신작 콘솔 게임을 플레이하시면 됩니다.]
“신작 게임은 콘솔 게임기로 하는 게임이야?
PRD 전용 게임이 아니라?”
[예.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체험플레이를 통해 상위 10%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면, PRD 세션에서 신작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입장권을 줘요.
거기서 신작 게임의 PRD 버전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최상위 랭크를 찍을 수 있다면···.]
“찍을 수 있다면?”
[그 뒤는 최상위 랭크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만 안내해 드릴 수 있는 내용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주인님이 진정으로 로봇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 최상위 랭크에 도달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마치 퀘스트처럼 자신의 앞에 주어진 과제.
그것을 마주한 오다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오늘 모인 관객들은 대부분이 게임에 미친 인간들일 테고, 그 안에서 최상위 랭크를 찍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오다는 페로를 향해 물었다.
“잠깐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게임을 하면서, 30만 명의 정점에 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거기서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뿐이고.
만약 최상위 랭크에 도전한다면 오늘 종일 신작 게임만 플레이해야 할 텐데, 그럼 나머지 투어는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야?”
[완전한 포기는 아닙니다.
어차피 쇼케이스가 끝나면 자유롭게 다시 투어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지금부터 저녁 6시까지의 시간 동안 랭킹을 올리는데 전력을 쏟아야겠죠.
나머지 투어는 쇼케이스가 끝난 이후 폐장 시간까지 진행하고요.]
“게임은 발매되고 나면 집에서도 할 수 있어.
게다가 예약이 꽉 차서 여기 다시 오려면 1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테고, 그 ‘최상위 랭크’라는 것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오다의 질문을 들은 페로는 잠시 고민하듯 오다의 앞에서 공중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리고는 오다를 향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적어도 저는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관객분이 있다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상혁 씨가 말해주었으니까요.]
“상혁이라면 PTW의 CCO 이상혁? 그분이 뭐라고 했는데?”
[만약 자신이 참가 권한이 있다면 시작하자마자 뛰어가서 무조건 최상위 랭크에 도전할 거라고요.
심지어 그것이 오늘 하루 허락된 투어 시간의 대부분을 필요로 하는 ‘도박’이라 하더라도.]
상혁의 말에 대한 PTW 팬들의 신뢰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지금까지 상혁이 멋지다고 한 것 중에 단 하나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놀랍다고 한 것 중에 단 하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그런 상혁이 그렇게 말했을 정도니, 최상위 랭크 달성의 보상은 말 그대로 엄청난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오다는 페로를 향해 말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단 한 명의 게임 제작자.
이상혁이 말한 ‘도박’에 걸어보겠다고.
“결심했어.
최상위 랭크에 도전할 거야.”
[말씀드렸지만 랭킹은 절대적인 스코어가 아닌 상대적 스코어를 기준으로 합니다.
주인님이 순위 안에 들었다 하더라도 누군가 그 기록을 깨면, 다시 도전해서 더 높은 기록을 세우셔야 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그럼 지금부터 해당 게임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한 페로는 오다의 눈 앞에 화살표를 띄우며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고, 오다는 그런 페로의 뒤를 열심히 쫓기 시작했다.
그의 욕망을 사정없이 유혹하는, 수많은 어트랙션들을 지나치면서.
오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젠장. 오늘 투어 시간 다 포기하고 도전하는 건데, 만약 보상이 별로라면 PTW에 소송을 걸 거야!’
단 12명만을 뽑는다는 최상위 랭커.
30만 명의 참가자 중에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오다는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컨벤션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극 초반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관객은 도전보다 투어를 선택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체험 에리어에서, 오다의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부서지고 말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부지에 놓인 체험공간에서, 딥 다이버를 머리에 쓴 수많은 게이머가 미친 듯이 PTW의 신작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이글거리는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못해도 5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 이 인원이 전부 최상위 랭킹에 도전한다고?
보상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짓던 오다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빈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그리고 쇼파 근처에 놓인 패드를 집어 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게이머라면 당연한 건가.
기껏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진 테마파크에 와서, 쇼파에 앉아 게임을 한다는 게.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게임에 미친 인간들인지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는 패드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 미친놈 중의 한 사람이지.”
순간, 오다의 주변 풍경이 오다가 딥 다이버에 세팅해놓은 게임 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거대한 TV가,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신작 게임의 타이틀을 보여주고 있었다.
“명예의 기사들(knights of honor)이라···.”
오다는 화면 아래쪽에서 천천히 점멸하고 있는 라는 메시지를 보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쥐고 있는 패드의 버튼을 누르며 힘차게 외쳤다.
“다 덤벼! 상대가 몇만 명이든, 난 무조건 순위 안에 들 거니까!”
그렇게 오다는 PTW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신작 게임의 플레이에 들어갔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똑같은 목적을 가진 5만 명의 플레이어와 함께.
그것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테마파크의 관람조차 포기하고 게임에 목숨을 바친, 게임에 미친 게이머들이 벌이는 치열한 사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