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게이머의 행동양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위대한 나이츠 파일럿들의 전장.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한 오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조금 전까지 오다와 합을 맞춰 나이츠를 조정해주었던 오다의 파트너, ‘머신 스피릿’ 엘레니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시키는 거대한 홀의 중앙에서, 마치 중세의 기사를 연상하게 하는 자세로 무릎 꿇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순간 오다의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분명 PRD로 보면 장난 아닐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상보다 더 현실감 있다.’
오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팔과 다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PRD에 들어가기 전에 오다가 입은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파일럿 슈트를 입은 아바타의 신체가, 오다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 움직임을 100% 피드백하고 있어서 그런가? 카툰 렌더링 기반 그래픽인데도 내 팔다리같이 느껴지네?’
패드의 버튼을 눌러 캐릭터를 조작하는 것과 직접 몸으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다는 그 기분 좋은 현실감을 만끽하며, 주먹을 쥐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점프하기도 하며 PRD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감촉을 맛보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며 묵묵히 대기 중이던 오다의 머신 스피릿, 엘레니아가 오다를 향해 말했다.
[마스터. 투영체와의 감각 조정이 끝나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오다가 엘레니아를 향해 말했다.
“투영체?”
[이곳에 있는 마스터와 저의 육체는 별도의 가상 차원에 복제되어 투영된 일종의 아바타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본인이 원한다 해도 죽음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 공간에서의 죽음은, 리스폰 포인트로의 복귀를 의미하지요.]
“아, 그건 KOH와는 다른 점이네.”
오다가 플레이했었던 KOH의 콘솔 버전엔, 죽음이란 개념이 있다.
플레이어의 죽음과 동료의 죽음.
플레이어가 죽으면 당연히 게임 오버이니 마지막 세이브에서 다시 게임이 시작되지만, 동료가 죽을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게임은 계속 진행되고, 사망한 동료와 친한 NPC들은 슬픔에 빠지며, 어떤 동료들은 자책하고, 어떤 동료들은 각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망의 대부분은 나이츠끼리의 싸움이 아닌 마수를 토벌하는 레이드에서 발생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스포츠 게임인 나이츠 배틀과는 다르게 레이드의 경우 지켜야 할 마을이나 도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KOH속 세계관에서, 거대한 나이츠의 크기를 가볍게 상회하는 괴수들은 언제나 인간을 노리고 마을을 공격한다.
그리고 나이츠는 그런 괴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류의 유일한 무기이고.
그렇기에 실력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나이츠끼리의 대련에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반대로 레이드는 방어를 담당한 나이츠가 물러서면 마을이 괴멸되는 결과를 불러오기에 항상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움에 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방어전에 참가하는 동료 파일럿 역시 주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전투에 참여하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위기 상황에서 때때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힘들게 키운 동료가 사망하면 그 즉시 세이브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게이머의 습성이지만, 오다는 일부러 동료가 사망해도 게임을 계속 이어나갔다.
동료의 사망에 자극받아 더욱더 강해지겠다며 수련에 정진하는 동료들의 모습이나, 혹은 복수를 위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동료 파일럿들의 변화가, 그가 보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쇼케이스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뽕 차는 연출로 유명한 PTW에서는 절대로 AI 동료의 죽음을 밋밋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오직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경우.
혹은 AI가 평소에 수없이 말하고 다니던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야 할 상황인 경우.
혹은 자신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플레이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도저히 보지 못하는 경우.
짧은 플레이 시간이었지만, 오다는 일부러 높은 난이도의 미션 만을 주로 플레이했고, 그 덕에 자신이 영입한 동료 중 총 3명을 잃게 되었다.
한번 토벌 작전에 참여할 때마다 3일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겁쟁이였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적 전부를 도발하던 니르테.
‘이건 내 거야.’란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으며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처럼 보이는 태도를 고집했으면서도, 파티가 전멸할 상황에서 적 보스를 앞에 두고 ‘이건 내 거야.’라는 결정 대사를 멋지게 내뱉고 떠난 라우라.
그리고 오다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렬히 남아있는, 제대로 구동되지 않는 녹슨 나이츠의 파일럿이었지만, 플레이어의 수리 능력으로 최고의 나이츠 파일럿으로 다시 태어난 디엘렌.
오다는 지금도 디엘렌이 죽으며 했던 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다가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것처럼, 모든 마수를 물리쳐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던 그녀의 말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미소지으며 부탁하는 그녀를 보며 오다는 그녀가 살아있는 시점의 세이브를 다시 불러오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세이브를 불러와서 그녀를 살려내는 순간,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그녀의 희생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것 같아서.
오다는 동료들의 희생을 묵묵히 감내하며 계속 고난이도 미션에 도전했고, 그 결과 플레이 상위 랭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게임 시스템 자체가 일부러 그렇게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는 난이도의 레이드를 반복하도록 강요하고 있기도 했고.
오다는 지금도 그 시스템의 전모를 처음 파악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오픈 월드 게임치고는 굉장히 특이한 시스템이었지.’
일반적으로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오픈 월드 게임에서, 각 지역의 레벨디자인을 조정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플레이어의 레벨에 맞춰 몬스터의 레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방식.
이 시스템은 어느 곳에 가든 적절한 난이도가 항상 보장되기에 게임의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플레이어가 육성한 캐릭터의 강함을 체감하기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둘째, 방문할 수 있는 지역엔 제한이 없지만, 미리 정해진 레벨에 따라 활동 구역이 정해지는 방식.
이 경우 기본적으로는 오픈 월드라는 이름을 빌리고는 있지만, 플레이어의 레벨에 따라 활동 지역이 제한되므로, 플레이어가 거쳐 가는 플레이 루트를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반대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오픈 월드의 강점이 사라지는 것이 단점도 있었고.
그러나 KOH가 가진 오픈 월드의 레벨 디자인 방식은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것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특정 난이도의 전장을 찾아 이동하게 만드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열매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KOH에서 전투 경험을 획득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바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짠 작전에 따라 전장에 투입되어 몬스터의 습격을 방어하거나 토벌 임무를 마치면, 작전에 참여한 각 파일럿은 전투 성과에 따른 경험치를 받는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전투를 진행하는 시간과 다음 전투 지역을 향해 이동하는 시간 동안, 플레이어의 동료 NPC는 각자의 AI 패턴에 따라 휴식 시기 동안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위기감’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전투가 매번 너무 쉽게 풀리면 동료 NPC들이 수련을 그만두고 여유를 부리기 때문에.
반대로 작전에 참여한 동료가 적절한 위기감을 느꼈을 경우, 그 동료는 한동안 자신이 탑승하는 나이츠의 성능 개선이나 자신의 조종실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드넓은 세계에서 지금 정확히 필요한 난이도의 토벌 미션을 찾는 방법?
그냥 기다리면 된다.
부유 요새에 있는 상황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월드맵을 보면 각 지역에서 올라온 수많은 ‘정찰 보고’가 표시되는데, 플레이어 수준보다 난이도가 극히 낮은 토벌 미션의 경우는 흰색으로, 쉽게 깰 수 있는 수준의 미션은 녹색으로, 그럭저럭 깰 수 있는 수준은 푸른색으로, ‘적절히 어려운’ 난이도의 미션은 주황색으로, 매우 어렵지만 깰 수 있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미션은 붉은색으로, 마지막으로 도저히 깰 수 없는 수준의 미션은 검정색으로 표시되게 되어있었다.
만약 어느 정도의 위험도를 품은 수준의 난이도를 극복하며 최고의 자극과 보상을 얻고 싶다면, 주황색 미션만 골라서 깨면 된다.
그럼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나머지 미션들의 색이 변하고, 몇몇 미션들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토벌대가 해결하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무슨 토벌 미션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도 플레이어가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KOH만의 매력적인 요소였다.
때로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클랜의 성장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때로는 해당 영지의 나이츠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압도적인 적을 막기 위해 구원자로 나서기도 해야 했으니까.
1회차를 플레이하면서, 엔딩을 보기도 전에 2회차 플레이를 기대하게 만드는 게임.
그것이 KOH가 가진 레벨 디자인 시스템의 매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지 않는다는 거지.
그럼 오직 훈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건가?’
궁금해진 오다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자, 엘레니아가 주인의 질문에 답했다.
[마스터께서 하신 질문의 해석을 기반으로 판단하건대, 아마도 생각하시고 계신 형태가 맞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파일럿이 나이츠에 탑승하게 되면, 나이츠는 해당 파일럿의 정신구조를 스캔합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이 아레나로 전송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복제 영혼’이라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는 그렇게 복제된 영혼들을 ‘싸우는 영혼’이라는 뜻의 ‘투영(鬪靈)’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잠깐만, 나이츠에 탑승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영혼이 전송된다고?
그럼 나이츠에 탄 상태로 사망한 파일럿의 영혼도 이곳에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나이츠에 탑승한 파일럿의 영혼은, 이 아레나란 공간에 귀속되게 되어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나이츠 파일럿들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영웅들의 수련 상대를 맡으며 그들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마스터가 현실 세계에서 싸우는 동안, 그녀들도 마스터의 싸움을 지켜보며 자신을 단련하죠.
자신이 사망했을 때의 안타까움을 곱씹으면서, 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목숨이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아레나란 공간은 과거의 영웅이 현세의 영웅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전사들의 성전입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오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엘레니아를 향해 말했다.
“엘레니아. 니르테, 라우라, 디엘렌을 불러줘.”
[명을 받들겠습니다.]
엘레니아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3개의 환한 빛 덩어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빛은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더니, 오다가 기억하는 3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성격과는 상관없이, 하나같이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상태로.
그런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오다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보고 싶었어.”
자신을 향해 와락 안기는 세 사람의 강한 포옹을 느끼며, 오다는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아마도 자신 역시, 지금 그녀들이 짓고 있던 표정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고.
***
잠시 후, 엘레니아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이동한 오다는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듀얼, 아르마, 레이드 3개 중의 하나를 골라서 참전하는 거라는 거지?
여기 있는 세 사람 외에 부유 요새에 있는 나머지 멤버들까지 엔트리로 활용해서?”
[맞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참전 이전에 나이츠의 조작법에 대해서 먼저 익히시는 게 우선이겠습니다만···.]
“나이츠의 조작법?
그건 이미 잘 알고 있잖아?”
[부유 요새에서의 나이츠 조작법과, 아레나에서의 나이츠 조작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부유 요새에서의 마스터가 팀원 전체의 움직임을 위에서 지켜보며 상황을 통제했다면, 아레나에서의 마스터는 나이츠의 조종석에 앉아 조종석 모니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물론 파티원끼리의 음성 통화나 위치 정보 같은 기본적인 데이터가 제공되겠지만, 이전처럼 시야 밖에 있는 아군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파악하시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점이 쿼터뷰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변경된다는 거네.
이해했어. 그것보다는 빨리 내 나이츠가 보고 싶네.
안에 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럼 지금 바로 이동하시죠.
그 전에···.]
엘레니아가 질린다는 눈빛으로 오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세 사람은 이제 슬슬 마스터에게서 떨어지시는 게 어떨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다의 지시를 받아 소환된 세 사람이 양쪽 팔과 목을 감싸 안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엘레니아는 마치 나무에 붙은 코알라처럼 들러붙어 있는 세 사람을 향해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말 안 들립니까?
그렇게 붙어있으니 마스터가 일어나시질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오다의 등 뒤에서 목을 감싸 안고 있던 라우라가 소리쳤다.
[지금까지 계속 오다 씨와 같이 있을 수 있었던 넌 모르겠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고.
아레나에서 부유 함선을 바라보며 여우 같은 년들이 우리 오다 씨한테 꼬리 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음을 네가 알아?!]
[맞아! 오다 님의 머신 스피릿으로써 여우들이 들러붙지 않게 오다 님을 잘 지켰어야지!]
니르테까지 나서서 엘레니아를 비난하는 것을 보며, 오다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하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느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러나 지금의 오다에게 중요한 것은 양팔과 등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각이 아니었다.
그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오다는 엘레니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옆에 붙어있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니르테, 라우라, 디엘렌.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지금은 아레나에 집중해야 할 때야.
오늘 부족한 벌충은 따로 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내가 조작법을 익히도록 도와주지 않겠어?”
그러자 코알라 같이 붙어있던 세 사람이 천천히 오다의 곁에서 떨어졌고, 오다는 몸을 감싸고 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사라지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터. 그럼 지금부터 마스터의 나이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어떤 유형의 전투에 참전할 것인지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다가 엘레니아를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해줘.”
[듀얼은 말 그대로 1:1 전투입니다.
지형이나 파티 구성 등의 외부적 요인과 관계없이, 오로지 두 파일럿의 나이츠 조작 기술과 머신 스피릿과의 호흡을 겨루는 대결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르마는?”
[아르마는 5:5 팀 배틀 형태이며 랜덤으로 결정된 지형 속에서 전투를 수행하게 됩니다.
전투는 총 5연전으로 이루어지며, 부족한 능력을 파티원의 능력으로 보조받을 수 있는 만큼, 조종실력보다는 조합에 따른 상성과 전술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결 방식입니다.]
“레이드는 KOH에서 토벌 임무 수행하던 그거지?”
[그렇습니다만 통상의 토벌 임무와는 다르게 종합 점수를 기준으로 승패가 정해집니다.
10명으로 구성된 각 팀이 3마리의 소환 마수를 토벌하는 시간을 겨룹니다.
마수의 종류는 경기 시작 전에 양팀에 같이 전달되며, 마수의 종류가 파악된 이후 장비 세팅이나 아군 편성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중간에 수리나 교체가 되나?”
[가능합니다만 각 부품마다 수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따로 할당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총 주어진 20분의 수리 시간 중 다리 파츠의 완전 교환에 15분을 사용했다면, 교체에 10분이 필요한 팔 파츠의 교환은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망가진 무장을 교체하는 등의 수리는 간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르마에서 5연전을 할 때 첫 번째 경기에서 나이츠 한 대가 완파되었다면 다음 경기에는 수리 시간이 모자라서 못 나올 수도 있겠네?”
[그렇습니다. 다만 전투가 개시된 이후엔 수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5:4로 버티면서 시간을 끌다 수리가 완료되면 중간에 합류시키는 전략도 사용 가능합니다.]
“오케이. 그럼 아르마로 하겠어.
그쪽이 더 재미있어 보이니까.”
[편성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현재는 부유 요새에 있는 모든 파일럿의 호출이 가능합니다.]
그 순간, 조용히 오다의 뒤를 따르던 세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제가 갈게요!]
[내게 맡겨!]
[날 뽑아라!]
그러자 오다가 씩 웃으며 엘레니아에게 물었다.
“마지막에 이탈한 디엘렌은 몰라도, 파티에서 일찌감치 이탈한 라우라나 니르테는 부유 요새에 있는 동료들과 꽤 격차가 날 텐데,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의도적으로 ‘죽은’이라는 표현 대신 ‘이탈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오다에게, 엘레니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클랜에서 부득이하게 ‘이탈’한 투영은 아레나에서 마스터와 동료들이 벌이는 이후의 전투를 보며 자신을 단련합니다.
그리고 그 단련 중에는, 아레나에 있는 자신의 나이츠를 개조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죠.
비록 본인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 형태로 바뀌어있긴 하겠지만, 장비 상의 스펙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 순간, 오다에게 설명하던 엘레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함께 걸어가고 있던 그녀의 마스터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멈춰섰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마스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건······.”
멀리서도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강철의 기사.
한쪽 손엔 십자 무늬가 새겨진 거대한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엔 은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모닝스타를 쥐고 있는 로봇의 모습을, 오다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KOH를 플레이하며 직접 개조하고 조종하여 전투를 벌이던, 자신 전용의 나이츠였기에.
-탁탁탁탁탁-
심장의 고동 소리에 맞춰 점점 빨라지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오다는 뛰어가듯 눈부시게 새하얀 순백의 기사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기사’의 눈을 올려다보며,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꿈에도 그리던 로봇을 실제로 보면 이런 기분이구나.’
물론 오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환상적인 외형의 강철 기사가, 단지 PRD로 구현되었을 뿐인 허구의 존재라는 것을.
그러나 허구의 존재라도 그것을 ‘만질 수 있고’, ‘올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은 로봇을 사랑하는 오다의 심장을 터질 듯이 맥동시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다는 자신의 키에 육박하는 로봇의 발등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만져져···.”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야 겨우 볼 수 있는 로봇의 눈을 보며 말했다.
“X나 커···.”
그러자 뒤늦게 오다의 뒤에 도착한 라우라가 오다를 향해 말했다.
[역시 오다군. 처음 클랜에 합류했을 때도 그랬지만 나이츠 엄청 좋아하네.
맨날 타던 로봇인데도 저렇게 감격할 만큼.]
[부유 요새에서 나이츠를 보는 것과 아레나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아마도 마스터는 그만큼 나이츠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계신 거겠죠.
그리고 처음 왔을 때 라우라 씨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텐데요?]
[내···. 내가 언제?!]
[라우라 씨 전용기의 머신 스피릿에게 들었습니다.
라우라 씨가 아레나에서 나이츠를 처음 봤을 땐, 흡사 발정 난 강아지처럼 온몸을 나이츠에 비벼대셨다고요.]
[흐아아아! 아니야! 아니라고!]
[뽀뽀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흐아아앙! 안 들려! 안 들린다고!]
그때, 조용히 오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디엘렌이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 오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녀가 가리킨 방향.
거기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미친 듯이 강철로 된 나이츠의 바디에 키스를 하고 있는 오다의 모습이 있었다.
***
“진행 상황은 어때?”
PTW PARK의 지하에 있는 이벤트 상황실.
그곳을 찾아온 민준이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상혁에게 물었다.
그러자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가득 깔린 상혁이 좀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민준에게 말했다.
“···좋아···.”
“목소리는 다 죽어가는 데 좋다고?”
“진행 상황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내 몸에 쌓인 피로는 이벤트 진행과는 별 상관이 없고.”
민준은 상혁의 시선을 따라 상혁이 주시하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모니터에는 능숙한 실력으로 자신 외 4명의 파티원을 지휘하면서, 조종간을 잡은 채 잔뜩 신난 표정으로 상대방을 농락하고 있는 유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단 몇 시간 동안 게임을 진행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숙련도였다.
“X나 잘하네? PTW 직원 아냐?”
“아니야.”
“실력은 몇 백 시간 이상 플레이한 것 같은데?
아니 어떻게 처음 하는 게임을 저렇게 몇 시간 만에 마스터하지?
실제로 저 유저들이 콘솔 버전 KOH를 플레이한 시간은 3시간도 안 되잖아?”
“시스템이 워낙 잘 잡혀 있으니까.
KOH 자체가 동료와 전투를 한 번만 같이 해도 해당 동료의 개성이나 특성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나이츠의 조작은 머신 스피릿의 AI 어시스트를 최대한 받고 있으니까.
사실 지금 저 유저들은 로봇을 조종하는 기분만 내는 거지, 회피부터 공격까지 복잡한 기동은 전부 머신 스피릿이 처리하고 있어.
2시간 동안 쌓인 KOH 콘솔 버전의 나이츠 조종 데이터를 바탕으로.”
“저 모든 게 게임 속에서 예정된 설계에 의한 것이다?”
민준의 말을 들은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뮬레이션 RPG 장르에 가까운 KOH 콘솔 버전의 핵심은, 각 나이츠의 형태에 따른 ‘스타일’과 각 동료의 ‘전투 성향’을 게이머가 외우게 하는 거야.
A라는 상황에서 내 파티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B라는 상황이라면 난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C라는 보스를 잡기 위해선 어떤 파티 구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파티원들과의 ‘유대감’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현재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는 유저들은, 그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유저들이지.
이미 저들에게 있어서 동료 파일럿들은 단순한 AI가 아니야.
자신의 명령을 손발처럼 수행하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교전 수칙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전우들이지.”
“그냥 AI로 생각하는 유저도 있지 않을까?”
“애당초 그런 느낌을 받도록 스토리나 연출을 구성하지도 않았고, 전투 시스템도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KOH의 전투 시스템은, 오로지 AI인 동료 파일럿을 진짜 사람처럼 생각했을 때만 완벽한 효율이 나오는 시스템이니까.”
그러자 옆에서 함께 모니터를 지켜보던 김기열 교수가 상혁에게 질문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예를 들어 교수님이 나이츠에 탄 상태로 전투를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첫 번째 교전에서 상대의 공격을 받는 순간 이런 느낌이 들었다고 합시다.
‘아, 이거 그냥 받으면 뒤지겠구나.’
그 경우, 교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시겠어요?”
“흠···. 제 성향이면 아마 나이츠의 장비도 원거리 계열일 테니 일단은 거리를 벌리려고 하겠죠.”
“탑승자가 구스타프 씨라면요?”
“최대한 공격을 흘려내려고 하겠죠.”
“그런 것처럼, 사람마다 로봇을 다루는 스타일엔 다양한 타입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상성이 안 맞는 상대와 매칭되었을 때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하고, 누군가는 주변에 있는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하고, 누군가는 시간을 끌려고 하겠죠.
그런 ‘스타일의 차이’는 각 AI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KOH의 아르마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고요.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전장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겁이 많은 동료의 경우 적의 타겟이 되면 최우선적으로 아군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대신 막아주거나 공격을 하는 적의 어그로를 끌어야 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담당하고 있던 자리에 구멍이 날 겁니다.
제가 아군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순간, 동료 AI들은 스스로의 성향과 경험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죠.
적이 저를 추격하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자신이 맡은 적의 배제에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 모든 ‘정보’가 합쳐져, 플레이어의 지휘 능력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게임.
그게 KOH라는 게임의 본질이니까요.”
“플레이어가 점점 지휘관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딱히 플레이어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KOH에서 성장하는 것은, 플레이어만이 아니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기열은 잠시 고민하다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AI를 말하는 거군요!”
“플레이어의 나이츠에 탑승한 머신 스피릿, 플레이어의 동료 AI, 플레이어의 동료 나이츠에 탑승한 머신 스피릿.
심지어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적의 AI까지, KOH의 AI는 전투를 통해 끊임없이 상대의 정보를 파악하고 전투 전략을 수정합니다.
그리고 KOHA는, 그렇게 플레이어가 직접 육성한 AI를 가지고 다른 플레이어가 육성한 AI와 싸우는 게임이고요.”
그렇게 말한 상혁이 키보드의 버튼을 누르자, 각 모니터의 하단에 녹색과 붉은 색으로 이루어진 바 형태의 게이지가 나타났다.
상위권 플레이어일수록 녹색의 비율이 높아지는 그 게이지 옆에는, 녹색 숫자로 ‘00%’라는 형식의 백분율이 적혀 있었다.
“이건 각 플레이어가 전투를 통해 쌓아온 유대감을 표시하는 퍼센티지입니다.
말하자면 AI가 가지는 플레이어 명령에의 신뢰도를 의미하는 거죠.
해당 게이지는 매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지휘나 조작이 유효한 효과를 거둘 경우 올라가며, 반대의 경우 내려갑니다.
그러니 저 게이지의 녹색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저 플레이어의 게임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결국, KOH에서의 스코어 개념은 이런 겁니다.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육성한 AI가 얼마나 적절하게 전투 상황을 이끌어갔는가.
그건 누가 딜을 잘했냐, 못했냐의 개념도 아니고, 누가 적을 빠르게 무찔렀느냐의 개념도 아니죠.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의 성과를 뽑아냈다면, KOH의 시스템은 패배 상황에서도 SSS랭크를 부여합니다.
심지어 동료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결과였다면 SSS랭크를 부여하죠.
그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유저들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아 왜 엄청 잘 싸웠는데 스코어가 잘 안 나오지?’
그건 당연한 겁니다.
스코어의 기준이 승리가 아니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진심으로 게임에 대해 깊이 이해한 사람은, 바로 저런 플레이가 가능하게 되죠.”
상혁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수백 개의 모니터 화면 중 한 개의 화면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거기엔 진짜 ‘주인공’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한 플레이어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적들을 무참하게 압살하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전장에서 함께 해온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혁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기열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군요.”
“어떤 시간 말입니까?”
“선택받은 극소수의 용자들에게, 이번 이벤트의 숨겨진 진실을 알릴 순간이 왔다는 말입니다.”
상혁은 자신의 말을 들은 기열이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교수님?”
“아, 예?”
“뭔가 불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단지 ‘생각대로 잘 굴러가기만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번 이벤트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단순히 컨벤션을 즐기러 온 평범한 게이머들이고, 자신이 실제 크기의 거대 로봇을 조종할 기회를 얻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너, 로봇에 타라’라고 한다고 해서 ‘넵!’하고 순순히 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교수님은 만약 본인이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야 당연히 앗싸를 외치며 냅다 달려들어 로봇에 타겠죠.
전 로봇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니까요.”
“그럼 저들도 그럴 겁니다.
교수님. 전 세계에 있는 78억 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 저희는 PTW의 게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웃돈을 주고서라도 첫날 티켓을 구매한 30만 명의 ‘게이머’를 추려 내었어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슈퍼볼 광고를 통해 공개된 그 화려한 해적 게임 보다도, 자신들에게 환상적인 추억을 안겨준 역대 NE 컨벤션 세트보다도, 그냥 닫힌 공간에서 패드를 잡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게임을 굳이 여기서 플레이한 10만 명의 ‘오타쿠’를 추려 내었죠.
그리고 그 안에서 그냥 ‘체험 플레이’를 한 게 아니라 진지하게 하이스코어를 노렸던 1만 명의 ‘광인’들을 추려 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12인으로 선정된 인물들은, 바로 그런 ‘미친놈’ 중에서도 가장 미친 ‘King of crazy’들이죠.
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탄 로봇이 PRD로 만들어진 가상의 물체임을 알고 있음에도, 진짜 파일럿이 된 것처럼 게임에 목숨을 걸고 있어요.
그 확률은 말 그대로 표현하면 ‘78억 분의 12’인 겁니다.
지금 저희가 뽑은 그 12명은, 제가 확신하건대 ‘진짜’ 나이츠에 탈 기회를 준다면 목숨도 버릴 만한 그런 사람들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기열이 상혁의 말에 반박했다.
“물론 단순히 로봇에 탈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 상혁 씨의 말이 100번 옳겠지만, 거대 로봇에 타고 제자리에서 몇 걸음을 걷는 것과 현대 전차를 순식간에 반 토막 낼 수 있는 거대 로봇에 타고 전투를 벌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전자와는 다르게 후자엔 목숨이 걸려있으니까요.”
“그렇죠. 저희가 아무리 안전장치를 철저하게 준비해두었더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숨이 위험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도저히 로봇에 타지 않으면 안 될만한 상황을 만들 테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기열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대체 이 미친 인간이 뭘 하려는 것인가 싶어서.
그러나 상혁과 오랜 기간 함께하면서 그가 얻게 된 것은, 이 미친 인간의 사고방식을 읽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나 다름없다는 확신뿐이었다.
“제 머리로는 도저히 그 ‘타야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가지 않네요.
총으로 협박이라도 하실 겁니까?”
그러자 상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교수님은 그냥 그 자리에서 저희가 준비한 ‘연출’을 지켜보고 계시면 됩니다.”
“연출 말입니까?”
“예. 연출.”
상혁이 말했다.
“길을 가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칼을 들고 ‘따라와라’라고 협박하면 절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마음이죠.
하지만 반대로 미친 듯이 달려오다 코앞에서 멈춘 스포츠카의 문이 열리며 운전석을 잡은 고양이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어서 타!’ 라고 소리치면 나도 모르게 타고 싶어지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그 상황에선 ‘저 고양이가 운전면허가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형태의 ‘비일상’을 연출하는 것은 총을 들고 협박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뭐, 설명보다는 일단 보시면 알 겁니다.
원래 게이머란 존재들은, 분위기만 만들어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자신의 앞에 있는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는 커서를 움직여 모니터 오른쪽 구석에 있는 작은 버튼을 클릭했다.
[Operation Amuro]
이윽고 벌어질 환상적인 사건을 암시하는 그 버튼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봇 파일럿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