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 한국어의 힘
마수 저지를 위해 위풍당당하게 출동한 7함대 소속의 미 공군은, 그 강함에 걸맞게 현무의 등장 이전에 등장한 중형 마수를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상혁이 투입한 중형 마수의 숫자가 상당했기에, 제한된 화력으로는 현무를 상대하기 어려웠던 전투기들은 현무가 등장하자 현장을 이탈하여 자신이 출격했던 로널드 레이건 호를 향해 빠르게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사한 미사일은 비록 PTW에서 제공한 가상의 AR 미사일이었지만, 그 AR 미사일의 보급을 위해서는 항모로 돌아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뉴욕 상공을 뒤덮은 부유 요새에서 나이츠가 도착한 순간 복귀하는 전투기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미사일 보충을 위해 그들이 함대로 복귀한 그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상혁이 나이츠 편대를 배터리 바크로 강하시켰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미래의 최강 병기와 현대의 최강 병기가 사이좋게 바톤 터치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진짜 개 멋지네.”
윤식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거대한 로봇을 바라보았다.
가상의 그래픽으로 구현된 이미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해상도.
만지면 질감까지 느껴질 듯한 느낌.
단순히 그럴싸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현된 것이 아닌, 실제로 움직이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적인 관절 구조.
가까이 가면 얼굴까지 비칠 것 같은 느낌의 매끄러운 광택까지.
윤식은 눈앞의 로봇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전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옆에서 홀린 표정으로 로봇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아마 저건 대전에 있는 진짜 나이츠를 그대로 복제해서 구현한 AR 이미지겠지.
말 그대로 초현실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로봇이라고 생각해.
네가 보기엔 어때?
나야 어릴 때부터 로봇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으니 당연히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여자애들은 로봇보다는 마법소녀같은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자 그의 여자친구인 캐롤라인이 윤식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건 남녀 차별적인 발언이야.
물론 나도 어린 시절에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고 장난감 트럭보다는 소꿉놀이 세트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그런 소녀 시절의 기억들과는 별개로, 저 로봇이 얼마나 멋지게 만들어져 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그래?”
“내가 봐도 저 로봇에서는 진짜 잘 빠진 스포츠카가 풍기는 매력 같은 게 느껴져.
물론 저 로봇의 가격이 스포츠카보다 훨씬 비쌀 테니 당연한 일이긴 하겠지만.”
“다행이네. 뭐랄까, 나는 내가 볼 때 눈물 날 정도로 멋진 저 모습을 보면서, 내심 너도 멋지다고 생각하길 바랐거든.”
“눈물 날 정도로가 아니라 눈물이 났겠지.
지금 눈가가 살짝 젖어 있잖아.”
그녀의 말을 들은 윤식은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아···. 아까 로봇이 일어설 때 진짜 가슴이 벅차서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나 보네.”
“그 나이 먹고 로봇을 보면서 울다니···.”
“뭐 어때서? 세상에 저걸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그 녀석은 거시기를 떼버려야 할 거야.
저기 보이는 저 덩치 큰 아저씨도 울면서 소리치고 있잖아.”
윤식이 가리킨 방향에서는, 할리 데이비슨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가죽 자켓을 걸친 남자가 딥 다이버를 쓴 채로 로봇이 있는 방향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마치 평생의 꿈이 이루어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그 모습은, 어색하다기 보단 영화의 클라이막스 씬을 보는 것 같은 감동적인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자. 이제 주인공들도 도착했으니, 드디어 본 이벤트의 시작인가?
그러고 보니 방송에서는 수없이 가상훈련을 진행하면서 한 번도 EX급 몬스터의 토벌에 성공하지 못했지.
심지어 밥 먹고 KOH만 플레이하는 유저들도 전부 미션에 실패했고.
하지만 상혁이란 인물을 생각해보면 전 세계 최초로 진행되는 빅 이벤트의 시작을 미션 실패로 장식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거야.
분명 뭔가를 준비했겠지.
그게 뭔지, 지금부터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윤식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전 세계의 PTW 팬들도 현장에 파견된 방송국 기자들과 스트리머들의 방송을 통해 이번 이벤트를 지켜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아직 공략에 성공한 사람이 없는 EX 급 마수 침공 이벤트를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클리어한다면, 그건 본 게임을 공략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핵심적인 힌트가 될 것이었기에.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신이 흰색으로 도색된 거대한 나이츠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검은색 나이츠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통신을 시작했다.
-현민 씨. 아시겠지만 저는 특수 도발 장비의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에서, 저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는 현민 씨에게 달려있다고 보아도 되겠죠.-
통신이 개시되는 순간, 이벤트를 지켜보던 관중들의 시야 왼쪽에 작은 팝업창이 등장했다.
거기엔 통신을 전달한 홀리 프레일의 콕핏 내부를 찍은 화면과 함께, 그 안에서 홀리 프레일을 조종하고 있는 오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이 특수 도발 장비의 사용방법 자체가 워낙 특이하니까요.
하지만 맡겨두세요.
일본 출신의 오다 씨는 몰라도, 한국 출신 게이머라면 누구나 이 장비를 쉽게 다룰 수 있을 거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지금부터 작전명 ‘엿먹어라’를 개시합니다.
각 나이츠들은 미리 지정된 방어 위치로 이동을!-
-전 나이츠 각자 위치로 전개 개시!-
관객들은 이벤트 전에 PTW가 배포한 딥 다이버 전용 프로그램을 통해, 파일럿들 간의 대화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나이츠를 보며 흥분의 함성을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일제히 복창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15m 크기의 강철 거인들의 모습 속에는 그들이 한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 올린 능숙한 조종 솜씨가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투하된 12명의 블러디 크림슨 멤버들은 마치 진짜로 숙련된 로봇 조종사가 조종하는 로봇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아아!!”
배터리 파크를 가득 메울 정도로 모여있는 수백만의 관객들은 마치 흰 연기를 뿌리는 방역 차량을 쫓아다니는 초등학생들처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나이츠의 뒤를 따라 일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놀랍게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이동하는 것 치고는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이곳에 모인 수많은 팬이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나이츠 파일럿을 명확히 마음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모의 여성 파일럿인 차현희와 PTW내부에서도 인지도가 하늘을 찌르는 머신 스피릿 서지수가 조종하는 사일러스의 근처에는 거의 인기 아이돌 팬덤을 연상하게 하는 수많은 팬들이 온갖 굿즈로 무장한 채 모여들고 있었다.
“너무 접근하지 마세요! 사일러스의 이동경로를 막아서는 안됩니다!”
“제발 팬이라면 현희 양의 전투를 방해하지 맙시다!”
“현희 씨! 지수 씨! 멋진 싸움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팬 사인회 해주세요!”
서현희가 탄 사일러스도 인기가 있었지만, 블러디 크림슨 내부에서도 두 번째로 인기가 많은 최현민의 즈라드도 인기가 많은 머신이었다.
그는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 원래 검은 빛이었던 자신의 나이츠 즈라드의 퍼스널 컬러를 불꽃이 연상되는 진홍빛으로 변경하였고, 훈련 과정에도 퍼스널 컬러에 어울리는 상남자식 조종법을 선보이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파일럿이었다.
‘패배하더라도 화려하게.’
‘자신을 태워 적을 불사르는 불꽃 같은 전투 방식’
어느새 동료 파일럿들 사이에서 ‘가장 적으로 만나기 싫은 적 파일럿’ 1위로 꼽히고 있던 최현민은 자신의 주변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는 팬들을 보며 조용히 심호흡했다.
‘하긴, 내가 봐도 멋지긴 하지.’
현민은 비록 팀의 리더 역할은 지휘 능력이 가장 뛰어난 오다 츠요시가 맡고 있었지만, 블러디 크림슨의 진정한 에이스는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에 걸맞은 노력도 충분히 해 왔다고 생각했고.
그가 사용하는 즈라드는, 그 압도적인 공격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방어력을 포기한 경량화를 추구한 머신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머신이라면 외장 장갑에 가벼운 상처만 입을 정도의 공격을 받아도, 즈라드의 경우에는 팔다리가 절단되는 수준의 충격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은 즈라드라는 머신이 요구하는 반사신경의 수준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PTW 내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파일럿이자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훈련 교관 역할을 맡고 있는 구스타프가, 머신 세팅을 보고 ‘제정신을 가진 파일럿이라면 절대 타지 않는 머신’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1달의 시간을 거쳐 섬세하게 세팅의 조정이 완료된 즈라드는 처음 공개되었던 5차 NE 컨벤션 때보다 더욱 공격적이고 더욱 민첩하며 극도로 섬세한 머신이 되어 있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한 미소를 지은 현민은 지금은 즈라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거대한 배틀액스를 등에서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관객들에게 닿지 않는 높이에 맞춰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딱히 무언가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퍼포먼스를 위해서.
그것은 그와 즈라드를 보기 위해 멀리서 이곳 뉴욕까지 찾아온 팬들에 대한 그 나름의 보답이었다.
“우오오오오!!!”
“이런 미친!! 저 큰 도끼를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휘두르지?!”
“그래픽이라서 가능한 거 아냐?”
“아니야! 난 경기장에서 직접 봤었는데, 즈라드는 실제로 저 속도로 도끼를 휘두를 수 있는 스펙을 가진 나이츠라고!
그나저나 역시 엄청난 위압감이네.
방송으로 볼 때랑은 완전히 달라.
게다가 아레나에서 실물을 보았을 때도 좋았지만, AR 이벤트에서는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까 더 크게 느껴지는데?!”
“즈라드! 그 멋진 도끼로 저 몬스터의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버려요!!!”
그러나 즈라드는 팬들의 요청과는 다르게 도끼를 힘차게 바닥에 내리꽂아 옆에 고정했다.
그리고는 등에 달린 또 하나의 장비를 꺼내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것은 KOH에 익숙한 유저들도 자주 보지 못했던, 매우 생소한 형태를 가진 장비였다.
“저게 뭐지?”
“저게 그 특수 도발 장비인가?”
“이상하게 생겼는데? 확성기?”
즈라드가 꺼낸 장비는, 확실히 ‘무기’라고 보기엔 어색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유저들은 금세 그 독특한 장비가 무엇과 닮아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주변을 향해 고리 쳤다.
“아! 어디선가 본 형태다 했더니 저거 몬스터 훈타에 나오는 수렵적하고 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맞다! 수렵적이다!”
수렵적.
그것은 캡콤의 인기 게임 ‘몬스터 훈타’에 나오는 무기 중의 하나로, 거대한 북에 자루를 단 것 같은 형태를 가진 타격 무기였다.
그러나 즈라드가 들고 있는 장비는 수렵적처럼 자루가 달린 거대한 나팔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머리 부분에 달린 거대한 수정구슬은 그것이 타격을 위해 만들어진 장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는데, 어떻게 보아도 사용 용도를 알 수 없는 그 장비를 손에 쥔 즈라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대한 수정구슬 위에 달린 나팔 모양의 화구를 바다 저편에서 이곳으로 천천히 헤엄쳐 오고 있는 현무에게 겨냥했다.
그리고는 그 ‘특수 도발 장비’를 발동시키는 시동어를 외쳤다.
[광역 도발형 특수 장비 ‘어그로 머신’ 발동.]
그 순간, 나팔 모양처럼 생긴 입구에서 나이츠 본체보다 더욱 커다란 홀로그램이 튀어나와 공중에 비쳤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환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홀로그램 영사기?!”
“저게 특수 도발 장비의 정체였나!?”
“저건 콕핏 내부 모습 같은데?”
공중에 생성된 거대한 홀로그램 환영은 즈라드에 탑승하고 있는 현민의 모습을 약간 위쪽 시점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자 현민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아아아아!!!]
무려 카메라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채 욕설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허접한 지렁이 같은 벌레○끼가 뒈지려고 어딜 기어들어와?! 쓰레기 같은 ○발 새끼가!
생긴 것도 고래회충 같은 놈이 확 모가지를 뽑아다가 산채로 회 떠 버릴까?!
당장 안 꺼져!?]
이 웅장한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전개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스러운 욕설의 퍼레이드를 보며, 즈라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오다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미친 사용법을 가진 장비를 만들어낸 PTW 직원들의 생각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장비의 사용법에 대해 처음 설명을 들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욕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도발이 잘 걸린다고요?”
“뭐, 대충 그런 장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니, 마수는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인간의 언어로 된 욕설에 반응하나요?”
“정확히는 언어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반응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상대가 화를 내면서 센 발음을 반복하면 ‘아, 잘은 모르겠지만 저 X끼가 지금 나한테 욕을 하고 있구나.’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어그로 머신은 기본적으로 그런 인간의 부정적 마음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타겟에게 ‘저 새끼를 조져버려야겠다.’라는 강한 마음을 부여하죠.
그러니 이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띠껍고 재수 없게 카메라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셔야 합니다.”
농담처럼 들리는 설명이었지만, 실제로 그 장비를 훈련에서 사용해 본 오다는 기열의 설명이 절대 허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은 이 장비를 사용해서 EX급 몬스터를 도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본인인 그가 알고 있는 ‘욕설’의 범주로는, 최대한 노력해도 B등급 정도의 몬스터를 도발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데 현민 씨는···. 대체 한국어엔 욕을 표현하는 단어가 몇 개인 거야?!’
모두가 참가했던 합동 훈련에서, 현민은 지원하는 언어라면 모든 표현을 거의 완벽하게 번역한다는 딥 다이버의 번역 기능이 정지될 정도의 창의적인 욕설을 마구 쏟아냄으로써, 훈련을 위해 불러낸 가상 몬스터를 도발이 아니라 거의 광폭화 수준까지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찰진 욕설을 가지고 현민은 EX급 몬스터 ‘현무’를 향해 미친 듯이 도발을 하는 중이었다.
[어쭈? 꼬라봐? 눈 안 깔아? 버러지 같은 ○끼가 눈깔에 먹물을 쪽 빨아 벌라 이 ○미 뒤진 ○로 ○놈의 ○끼가 ○질라고 너 같은 ○끼는 내가 발로 한 번만 밟아도 아스팔트에 껌딱지처럼 으깨져서 ○진다!]
물론 그 적나라한 욕설이 전부 공개되어서는 보는 이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PTW에서는 주변에 울려퍼지는 현민의 음성에 –삐-소리를 삽입하여 욕설의 상당 부분을 감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 문장을 발언할 때마다 대부분의 단어가 –삐-소리로 점철되고 있는 현민의 대사들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 관객들마저도 현민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해주고 있었다.
[생긴 걸 보니 니 ○끼는 딱 ○미가 거북이에 ○비가 지렁이인 모양이구나!
이런 ○잡종 같은 벌레 자식아!
당장 이리 와서 모가지 안 내밀어?!
니가 안 오고 내가 가면 넌 진짜 복날에 ○패듯이 처맞는 거야!
셋 셀 때까지 내 도끼 밑으로 모가지 내밀어라.
셋··· 둘··· 하나. 어쭈!? 안 와?!
느○마가 지렁이라 그런지 말귀도 몰라 처먹냐아아!?]
그러자 정말로 현민의 욕설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현무가 고개를 들어 즈라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도발이 먹힌다고 생각한 현민은 그런 현무를 향해 쌍엿을 날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열 받으면 이리 와서 덤벼!!!
이 고래회충 같은 ○끼야아아아!!]
그 순간, 수십 미터 크기의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배터리 파크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던 현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즈라드가 있는 방향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자 즈라드는 도끼를 그 자리에 꽂아 둔 채로, 양손으로 깃발처럼 어그로 머신을 잡은 채 북쪽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대장! 내 도끼 잘 챙겨주세요오오오!!]
라는, 조금 전까지 뱉어내던 욕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말마를 토해내면서.
[오케이!]
준 경량형 세팅임에도 중량형 나이츠나 다룰 수 있는 대형 도끼를 다루기 위해 방어를 포기한 즈라드와는 다르게, 극 방어형 머신인 홀리 프레일은 육중한 방패와 두꺼운 장갑의 무게를 커버하면서도 상대의 엄청난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강한 구동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대신 장비와 메인 무장 외에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나머지 보조 장비를 모두 포기해야 했지만.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팀 내에서 유일하게 즈라드의 양날 도끼를 집어 들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즈라드의 양날도끼가 주는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장 소지 한계초과.]
[가동 속도감소 및 운행시간 감소 디버프가 적용됩니다.]
[신속하게 추가 무장을 버려주십시오.]
“나도 알아! 아는데 들어야 한다고!
이런 미친, 이 무게를 그렇게 빠르게 휘두르는 나이츠라니.
즈라드의 파일럿은 정신이 나갔나?”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조정 간을 강제로 밀어낸 오다가 투덜대자, 머신 스피릿인 엘레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츠 즈라드의 운영 방식은 머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수준의 무게를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한 관성 컨트롤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즈라드의 모든 공격은 미리 계산된 상태에서 물 흐르듯이 연결되어야 하죠.
자신의 공격 루트뿐만 아니라, 상대의 반격에 의해 발생하는 관성까지요.-
“그걸 실제로 시도한다는 게 미친 발상이라는 거야.”
-이건 제 판단이지만 방어에만 모든 것을 올인한 나머지 원거리 무장을 하나도 탑재하지 않은 홀리 프레일의 세팅도 충분히 비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을 세워서 EX급 마수를 토벌하겠다는 마스터의 계획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도시 안에서 현무를 저지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단순한 공방의 여파만으로도 주변이 초토화될테니까.
그리고···.”
홀리 프레일은 고개를 들어 즈라드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두 손으로 어그로 머신을 붙잡은 채, 거대한 홀로그램을 현무 방향으로 재생하며 계속 욕설을 퍼붓고 있는 즈라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저게 더 비정상적인 모습일 거야.”
-비정상의 강약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라면, 마스터의 판단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겠죠.
저희가 센트럴 파크에 도착하는 게 늦어진다면, 즈라드의 파일럿은 도발 성능은 최상급이지만 공격 성능은 제로에 가까운 저 황당한 무기를 들고 EX급 마수와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알아. 엘레니아. 나이츠의 상체 움직임을 고정.
다리 구동부의 출력을 50% 올려.”
-홀리 프레일의 상체 각부 관절의 잠금을 실시.
이동에 사용되는 구동 파츠에 공급되는 출력을 50% 증가시켰습니다.
속도 변화에 따른 반동에 주의를.-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뛴다.
엘레니아. 꽉 붙잡아!”
여자친구와 함께 미리 준비한 전동 킥보드를 타고 이동하던 윤식은 눈앞에 있는 거대한 로봇이 상체를 구부려 도약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의 아스팔트 도로가 크게 파이며 대지 위로 솟구치는 모습과 함께, 나이츠 중에서도 가장 느린 속도로 이동하던 홀리 프레일이 미친 듯이 전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윤식이 타고 있는 전동 킥보드의 최고 속력으로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윤식은 당황하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아스팔트 덩어리를 만져보았다.
“나이츠의 무게로 인해 도로가 부서지는 것도 전부 AR로 구현하는구나.”
그러자 간발의 차이로 살짝 늦게 도착한 그녀의 여자친구 캐롤라인이 윤식에게 물었다.
“눈으로 보기엔 진짜 같은데, 안 만져져?”
“안 만져져. 애당초 지금 전방으로 뛰쳐나간 나이츠도, 이 도로의 부서진 파편들도 전부 PTW에서 만든 가상의 이미지니까.”
윤식의 말을 들은 캐롤은 자신도 손을 뻗어 눈앞의 아스팔트 덩어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스팔트 조각을 통과하는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이네.
내가 아는 그 어떤 게임기도 이 정도 성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
대체 PTW는 이 많은 연산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지?”
“그게 바로 STC의 신비라는 거지.
그나저나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센트럴 파크까지 이동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는데?
이대로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나이츠 파일럿들이 전멸하거나 현무가 토벌되고 말 거야.”
“그렇게 빨리 끝날까?”
“방송에도 나왔지만, 즈라드는 방어조차도 그 무식하게 큰 양날 도끼로 전부 커버하는 극공형 나이츠야.
그런데 지금은 그 양날 도끼가 없으니, 아마 현무가 휘두르는 발톱에 스치기만 해도 조종석 채로 산산이 부서질걸?”
그러자 캐롤라인이 도로를 보며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동수단은 이 전동 킥보드가 전부잖아.
심지어 오늘 이벤트 때문에, 뉴욕시에서는 배터리 파크에서 타임스퀘어 가든까지 이어지는 주요 도로에 차량 진입을 통제했다고.
택시도 없는데, 여기서 무슨 수로 더 빠르게 이동하지?”
“지하철···은 무리겠지.”
잠시 서울의 편한 지하철을 떠올리던 윤식은 곧 고개를 저었다.
1904년에 최초로 개통되어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지하철의 악명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시설의 낡음은 둘째 치더라도, 수백만의 인력이 동시에 몰려든다면, 지하철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될 것이었다.
그러자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를 놓칠까 초조해진 윤식은 미간을 좁히며 마음속으로 PTW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방송에서 등장했던 계획처럼 차륜전 식의 방어전을 펼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빠르게 공터로 이동하는 작전을 펼칠 것이었다면, 관람객의 편의를 고려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그런 윤식의 불만은, 수많은 인파를 뚫고 나타난 수백 대의 차량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차량 내부에서 외부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외장이 유리로 되어있는 거대한 버스가, 이곳에 모여있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등장했기 때문에.
마치 미래 도시에서 워프를 타도 도착한 듯한 느낌의 차 안에는, 관람객 통제를 위해 멋들어진 슈트를 입고 있는 PTW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본 차량은 PTW에서 준비한 이벤트 관람의 편의를 위해, 뉴욕시와의 협의를 거쳐 준비된 대피용 차량입니다.
특수한 에너지장으로 보호되는 이 차량 안에서는 전투의 여파와 관계없이 안전하게 방어전을 관람하실 수 있으니, 탑승하고 싶으신 분들은 질서를 지켜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이곳에 모인 관람객들은 더 이상 제 3자가 아니게 되었다.
PTW에서 준비한 멋들어진 미래 스타일의 차량에 탑승하는 순간, 이제는 이벤트의 관람을 위해 뉴욕에 방문한 제삼자가 아닌, PTW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대피 작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사람의 연기자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수백만의 팬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가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짜 어디까지 진심인 거지?”
단순히 버스를 대여해서 처리해도 될 일을, 아예 직접 제작한 차량까지 투입하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PTW의 모습을 본 캐롤라인이 중얼거리자, 윤식은 섣부르게 PTW를 비난했던 자신의 믿음을 반성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마 능력이 닿는 한도 내라면 어디까지나 진심이겠지.
내가 아는 PTW라는 회사는, 적어도 이런 이벤트에서는 한없이 진심인 회사니까.
사람들을 보라고.
저 행복해하는 표정을.
아마 타인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라면, PTW 직원들은 청소부까지 전부 천국에 입장하는 VIP 티켓을 가지고 있을 거야.”
“행복해보이네.”
“당연하지. 분명 홀리 프레일이 관객을 남겨두고 혼자서 뛰쳐나갔을 때는 잠시 마음속으로 PTW를 비난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달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준비까지 해 둘 정도로, PTW는 팬들에게 진심인 회사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PTW를 욕하는 모든 인간은 내 적으로 간주하겠어.”
“그게 네 여자친구인 나라고 해도?”
“끄응···.”
즉시 대답하지 않고 고민에 빠진 자신의 남자친구를 보며, 캐롤라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윤식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PTW라는 회사가 딱히 내 남자친구가 사랑하는 회사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이처럼 자신으 팬들에게 진심인 회사를 욕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가자.
버스의 수는 충분해 보이지만,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일찍 타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좋은 자리에서 이 멋진 이벤트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면, 어쩌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늘의 이벤트를 떠올리며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
그녀의 질문을 들은 윤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금까지 그가 본 ‘전초전’만으로도,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만한 안줏거리가 되기엔 충분한 이벤트였기 때문에.
그는 킥보드를 접은 뒤 캐롤라인의 손을 잡고 차량으로 이동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드는, PTW의 ‘시민 보호 차량’을 향해서.
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차량의 앞부분은, 마치 블러디 크림슨에서 출동한 것처럼 보이는 진홍빛 도색이 번쩍거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