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새로운 파트너
수십 대의 전투기와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미 7함대 전력을 동원하여 웹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이상의 화려함을 선보인 ‘1차 뉴욕 방어전’.
1차 방어전 이후로 그 이상의 화려한 전투는 존재할 수 없다는 팬들의 확신을 무참하게 깨부수며 수중에서 펼쳐지는 몽환적인 화력 대결을 선보이고, 거기에 더해 KOH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파일럿과 머신 스피릿의 유대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던 ‘2차 독도 방어전’.
두 번의 월드 이벤트를 치른 웹 드라마 ‘퍼스티스트’의 시청률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에 걸맞게, 일체의 시나리오 없이 진행되는 퍼스티스트의 내용도 점차 재미를 더해가는 중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내용은 2차 방어전 이후로 완전히 세팅을 갈아엎은 RebirthDP의 강력함이었다.
이전의 장거리 화력 세팅과는 다르게 새로운 폼으로 세팅이 변경된 RebirthDP는 머신 스피릿의 사망 이후 그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파일럿 마성준의 강렬한 의지 아래 다시 태어났다.
그것도 전체 코어 중에 가장 조작이 어렵다는 만능형으로.
그것은 발매되자마자 조작이 어려운 게임 1위 자리를 당당하게 꿰찬 KOHA의 수많은 코어 가운데서도, 그 괴이한 조작난이도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속칭 ‘무능형’이라 불리는 코어였다.
[분명 만능형 코어는 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만능형이란 이름이 붙은 코어이긴 하지.
하지만 마도/반응/데이터의 3 계통 나이츠의 조작에 모두 숙달한 유저만 다룰 수 있는 데다, 각 분야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대 포텐셜도 전용 코어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면이 있어.
현재의 RebirthDP가 사용하고 있는 만능형 코어는, 마도 전용 코어인 사일러스처럼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시전 속도나 화력,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마도 전용 코어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고, 즈라드가 사용하는 반응형 코어처럼 근접 무기 계통을 함께 다룰 수 있지만, 반응 전용 코어에 비해 구동부 출력이나 운동속도가 많이 떨어지지.
게다가 이전의 RebirthDP가 쓰던 데이터형 코어처럼 다량의 화기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지만, 데이터 전용 코어보다 동시에 쓸 수 있는 무장의 수나 사거리, 자동 조준 시스템에 제약을 받고.
그래서 난 이번에 마성준이 RebirthDP를 만능형 코어로 바꾼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해.
그건 이미 KOHA 상위권 유저들 사이에서도 버림받은 코어라고 혹평이 자자한 코어니까.]
↳ 나도 그렇게 생각함.
솔직히 나도 3계통 장비가 모두 사용 가능하다는 말에 혹해서 만능형 코어를 써보려고 했는데, 콕핏 내부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원래 쓰던 반응형으로 바꿔놨지.
↳ 그 정도야? 얼마나 복잡하길래?
↳ 기본적으로 많은 무장을 장비하고 화기 통제 시스템의 지원을 바아 전투하는 데이터형 코어는 외워야 할 버튼은 많지만, 기체 조작 자체는 간단하게 할 수 있어.
반면에 마도형 코어는 버튼이나 컨트롤러 같은 조작부의 숫자 자체는 적지만 각 조작부의 사용 방법 자체가 복잡한 마도 술식을 모두 외워서 펼쳐야 하는 방식이고.
마지막으로 즈라드의 반응형 코어는 무장 사용에 필요한 버튼 자체가 콕핏에 달리지 않은 대신 나이츠의 거대한 신체를 인간과 유사한 움직임으로 통제하기 위해 구동부 조작에 집중한 형태로 되어있고.
그래서 반응형 코어의 조작에 숙달되면 즈라드 파일럿인 최현민이 하는 것처럼 마치 무공 고수가 움직이는 것 같은 화려한 움직임을 나이츠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거야.
만능형은 그 3계통의 코어가 가진 단점만 모아서 만든 것 같은 코어이고.
간단히 말하면 외우고 조작해야 하는 컨트롤러와 스위치의 수가 통상 기체의 3배가 되었다는 거지.
그 콕핏 안에 있는 버튼만 대충 세봐도 3천 개는 될 걸?
↳ X친···. 인간이 조작 가능한 건가?
↳ 인간이 아니니까 거기에 도전하는 거지.
요즘 퍼스티스트에서 잠깐잠깐 등장하는 성준의 모습은 거의 인간이 아니라 귀신같은 모습에 가까웠어.
독도 방어전이 펼쳐지기 전의 마성준과 같은 인물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방송에서도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거든.
요즘 방송에 나오는 그 눈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라니까?
↳ 어? 원래 나이츠 파일럿의 스케쥴 관리는 서브 파일럿인 머신 스피릿이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무리하고 있으면 옆에서 쉬라고 말렸을 텐데?
↳ 그게 최근의 퍼스티스트를 감상하는 최고 포인트 중 하나지.
↳ 무슨 말이야?
↳ 그 ‘파일럿’이, ‘머신 스피릿’의 말을 아예 듣지 않고 있거든.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의 내용대로, 새로 배정된 서브 파일럿에 대한 성준의 태도는 무관심 그 자체였다.
다양한 배경과 국적을 가진 나이츠 파일럿의 성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된 PTW의 서포트 전문가 ‘머신 스피릿’이 서포트를 포기할 정도로.
유가연과 헤어진 이후의 성준은 프로젝트에 참가한 그 어떤 파일럿보다 격정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지만, 나이츠 운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서프 파일럿과의 유대감 형성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애써 밝은 모습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서브 파일럿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성준은 필연적으로 서브 파일럿과 함께 탑승해야 하는 나이츠 조종훈련 시간 외에는, 철저하게 머신 스피릿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배제하고 있었고, 그런 성준의 태도는 그의 서브 파일럿 역할을 맡은 담당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저, 못하겠어요.”
결국 유가연 이후 3번째로 교체되었던 담당자마저 포기하자, 상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기 중인 머신 스피릿 전원을 호출했다.
그리고는 그동안 성준이 그만둔 담당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담당자들에게 물었다.
“보시다시피 유가연 씨의 프로젝트 이탈 이후로 파일럿 마성준 씨의 심리 상태가 극히 좋지 못합니다.
트레이닝 자체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고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지만, 서브 파일럿과의 유대감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이미 3명의 담당자가 포기한 상황에서, 새로 머신 스피릿 역할을 맡은 담당자를 할당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의 교체가 없었으면 합니다.
전체 프로젝트의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최고의 파일럿이 되기 위해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훈련에 임하고 있는 성준 씨를 위해서라도, 저희 쪽에서 제대로 된 서포트를 할 수 있는 인원을 붙여주는 게 좋겠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는 성준 씨의 의향이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멘탈 관리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 서브 파일럿을 선정했지만, 이번엔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려 합니다.
혹시 자원하실 분?”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웹 드라마를 보며 나이츠 파일럿이 되기를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PTW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훈련시킨 서브 파일럿들도 당연하게 머신 스피릿이 되어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머신 스피릿’이라는 포지션이 메인 파일럿과 서브 파일럿 간의 관계라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유대감을 경험할 기회이면서, 그녀들이 수개월 이상을 노력하여 습득한 나이츠 운용 기술을 실전에서 펼칠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녀들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을 정도로 성준의 태도는 심각 그 자체였기에, 그녀들은 그토록 꿈꾸던 자리에 TO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상혁이 묻자 유가연 이후 나성준의 두 번째 담당이 되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심리적인 부분에 있죠.
뭐랄까, 그가 저를 보는 눈빛을 보면 마치 ‘그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거든요.
그리고 그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담당자들처럼 나이츠 파일럿과 특별한 유대감을 쌓아가고 싶어하는 저희들에겐 매우 견디기 힘든 눈빛이죠.”
“하지만 실제로 성적 자체는 유가연 씨가 서포트를 맡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지 않습니까?
아직은 최현민 씨가 조종하는 즈라더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현민 씨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파일럿으로 성준 씨가 언급되고 있기도 하고요.”
“물론 성준 씨의 노력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분은 유가연 씨가 프로젝트에서 하차한 이후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죠.
하지만 그 집중력은 오로지 본인의 개인적인 조종 실력 향상에만 투자되고 있어요.
같이 나이츠를 타보면 그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있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우선 나이츠라는 물건은 기본적으로 한사람이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파일럿이 무기의 조준이나 장비의 교체 등에 집중할 때, 서브 파일럿은 파일럿의 마음을 누구보다 빠르게 읽고 파일럿이 하려는 행동에 최적화된 포지션으로 이동하거나 방어 행동을 취해야하죠.
반대로 파일럿이 회피 기동에 집중할 때는 회피 도중에도 적에게 반격할 수 있도록 장비 사용을 서포트하기도 하고요.
열 추적 미사일이 날아올 때는 플레어를, 마력탄이 날아올 때는 마력 장벽을, 강력한 물리 공격이 날아올 때는 순간적으로 장비의 출력을 조정하여 방어에 유리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서로 말하지 않아도 하나가 된 것처럼 두 명이 한 대의 나이츠를 조종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나이츠 탑승에서의 서브 파일럿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성준 씨가 조종하는 머신은 달라요.
그는 모든 걸 혼자 하려하죠.
물론 머신 스피릿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파일럿들은 그런 실수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다음에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머신 스피릿과 상담하며 해결책을 찾는 반면에, 성준 씨는 서브 파일럿의 실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요.
단지 서브 파일럿이 실수를 할 때마다 보조 조종석에서 접근 가능한 나이츠의 권한을 하나씩 잠궈서 마스터 시트에서만 조작할 수 있도록 바꿀 뿐이죠.
그건 실제로 당해보면 굉장히 불쾌한 대응입니다.”
상혁은 입을 다문 채 고민에 잠겼다.
아직은 김기열 교수가 개발 중인 인공 피부 기반 인간형 로봇의 개발이 진행 중인 상태라, 담당자들이 이렇게 거부하는 상황에서 계속 마성준을 나이츠 파일럿으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나이츠 조작을 혼자 담당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성준이 딱히 담당자들을 괴롭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지금의 상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성준에게 서브 파일럿과 강제로 유대감을 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때, 머신 스피릿 후보들이 모여 있는 좌석의 한구석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네요.”
“예?”
“죽은 전 파트너를 잊지 못해서 새 파트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파일럿이라···.
뭔가 로맨틱하지 않아요?
넘칠 정도로 향상심이 있으니 육성하는 보람도 있을 것 같고···.
데이터를 보아하니 반응 속도, 판단력, 암기력, 지휘력.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이 없네요.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상혁은 기쁜 표정으로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상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성준의 전 파트너였던 동료들이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언니. 그만두는 게 좋아요.”
“진짜로. 애교도 안 먹히고 선물도 안 먹히고, 보통 남자라면 예쁜 여자가 웃으며 다가가면 차갑게 굴지 못하는 법인데, 성준 씨는 진짜 다르다니까요?
아마 가은 언니가 살아 돌아와서 다시 머신 스피릿을 맡아주지 않는 이상, 그분의 마음속에 생긴 거대한 벽을 무너트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해.
결국 머신 스피릿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담당한 파일럿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거잖아?
성준 씨는 그럴 재능이 충분한 사람이야.
가이드만 잘 해준다면, KOH계의 페이커가 될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의 파트너가 되어서 그를 그런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보람있는 일이겠지.
상혁 씨. 그의 담당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담당자 변경은 하지 말아주세요.”
“지은 씨가 관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도?”
“아뇨. 반대입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성준 씨가 교체를 요청하더라도, 그걸 받아주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한쪽 눈을 깜빡이며 상혁에게 윙크했다.
“그 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잖아요?”
결국 상혁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성준 본인이 요청하더라도 더 이상의 서프 파일럿 교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유가연의 이탈 이후 지극히 까탈스럽게 변한 마성준의 4번째 서브 파일럿이 된 그녀는, 바로 다음 날부터 성준을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스터! 아침이에요! 일어나세요!”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처럼 국자로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성준을 깨우기도 하고.
“식사가 끝나면 영화나 보러 가죠.
머신 스피릿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도 좋은 마스터가 가져야 할 당연한 소양이랍니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기가 질릴 정도로 훈련만 하는 성준을 어거지로 끌어 데이트를 하기도 하면서.
결국 그런 그녀가 거북해진 성준은 그녀가 담당자가 된지 일주일만에 상혁에게 담당자 교체를 요청했지만, 상혁은 그런 성준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프로젝트 전체를 성준 씨 기준에 맞춰서 돌릴 순 없어요.
저희가 파일럿들에게 배정한 머신 스피릿들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게임 속 AI인 머신 스피릿의 대역을 맡은 일종의 배우 같은 존재들이지만, 그런 그녀들도 평소에는 PTW 내부에서 성우 더빙 작업이나 모션 캡쳐, AI 패턴 개발같은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는 PTW의 직원들입니다.
그리고 현재 당신의 담당자인 아나트라는, 저희가 판단하기에 당신의 진정한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머신 스피릿이기도 하고요.”
성준은 상혁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프로젝트에서 하차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건 세계 최고의 나이츠 파일럿이 되어달라는 가연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성준은 상혁과의 면담 이후로 전략을 바꿔 자신의 머신 스피릿인 아나트라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거북할 정도로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전의 담당자들에게 절대로 하지 않던 나이츠의 조종 실력에 대한 지적까지 서슴없이 해 가면서, 아나트라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성준의 태도를 보며 아나트라는 한번 지적받은 조종 문제를 다음 훈련까지 완벽하게 수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고.
게다가 그녀는 그런 성준의 지시를 넘어 시키지 않은 부분까지 완벽하게 보완함으로써 성준이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면 됐죠? 혹시 더 지적하실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마.스.터?”
그런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마치 한편의 청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기에, 시청자들의 반응은 격렬히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매 회차가 끝나고 나오는 예고편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다음 회차의 실시간 시청율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시청자들은 연일 방송이 끝날 때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격렬히 토론하고 있었다.
[성준도 이제 슬슬 아나트라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듀오로서 각성해야 하는 거 아님?]
[터질 것 같으면서 미묘하게 안 터지는 게 언제 터질지 궁금해서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보게 되네.
계속 저런 상태면 언제 한번 크게 붙을 것 같은데.]
[성준이랑 가연의 캐미가 말 그대로 영혼의 그루밍 듀오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캐미는 마치 서로 으르렁대면서 성장하는 느낌?
뭔가 계기만 있으면 극적으로 터질 것 같은데, 빨리 터져서 둘 관계가 파탄나던가 잘 풀리던가 둘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 파탄 나면 안 좋은 거 아님?
↳ 지금 관계는 서로 자존심 때문에 이 악물고 싸우는 관계 같은 거니까.
차라리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고 굽히는 관계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임.
하지만 알 수 없지.
애당초 시나리오 자체가 없는 리얼 다큐같은 드라마인데.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말 그대로 비현실의 극치를 달리는데, 그게 그 장면에서는 당연히 필요한 느낌으로 전달되는 게 대단한 것 같음.
진짜 존재하는 SF 세계관 속 이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함.
이상하게 지금 파일럿들은 몇 달 전만 해도 나랑 똑같은 일반인이었을 텐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처럼 느껴져.
그 모든 게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는 데서 더 드라마틱한 감성도 느껴지고.
↳ 아 빨리 두 사람이 한판 크게 붙었으면 좋겠다.
그럼 진짜 청춘 애니메이션에서나 대사들이 쏟아질 텐데.
그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에서.
난 현실의 인간들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만화적인 대사들을 쏟아내는 게 너무 보고 싶다고!
시청자들과 같은 일반인들이 우연한 기회에 특수한 공간에 격리되며 펼쳐지는 SF 스타일의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성장과 관계의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매일 같이 방송 시간을 기다리게 만드는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감정선을 품고 있는 성준과 아나트라의 파트너 쉽은, 말 그대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폭탄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3달 넘게 지속되면서 결국 시청자들이 원하던 형태로 폭발하게 되었다.
블러디 크림슨과 레비아탄, 두 부유 요새 파일럿들이 파리를 배경으로 대규모 연합 방어전을 치르는 컨셉으로 진행된 5차 방어전에서, 지나치게 현민을 의식한 성준이 미리 약속된 포지션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 성준의 돌발 행동은 머리만 7개 달린 히드라 형태의 마수의 좋은 표적이 되었고, 결국 성준이 조종하는 RebirthDP는 내구성이 가장 좋은 코어만을 남겨둔 채 마수의 공격을 맞아 반파 당했다.
마침 RebirthDP의 모티브가 된 DP-045가 자신을 희생했던 그 날처럼 비까지 내리는 상황.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아나트라는 성준을 향해 절규했다.
“지금! 마스터 앞에 있는 건 가연 씨가 아니라 저라고요!”
지금 마스터의 파트너는 가연이 아닌 자신이라고 소리치는 아나트라의 절규.
그것은 제발 다른 존재에 집착하는 대신 함께 달려가야 할 자신을 보아달라는 머신 스피릿의 절규였다.
그리고 그 절규를 들은 성준은,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곧은 눈빛으로 소리치는 아나트라의 눈은, 성진이 좋아하던 가연의 눈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단순한 배역이나 연기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의 눈빛.
배우가 상대 배역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머신 스피릿이 파일럿을 바라볼 때 할 법한 그 눈빛.
성준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아나트라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어왔는지, 그리고 그녀가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표가, 가연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최고의 파일럿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자신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머신 스피릿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는 성준의 모습.
일체의 시나리오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그 장면은, 가연이 자신을 희생하며 성준의 목숨을 구했던 독도 방어전의 에피소드 평가를 넘어 최고의 에피소드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청자들의 최애 에피소드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고구마처럼 갑갑하게 막혀있던 두 사람의 관계도 급히 진전되기 시작했다.
***
“트레이닝 프로그램 리부트.
스테이지 세팅은 이전 세팅에서 나이츠 한 대를 더한 세팅으로.”
완파 판정 이후로 완전히 새 세팅으로 바뀌어버린 RebirthDP의 콕핏 내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질리게 하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버튼과 스틱을 앞에 두고, 성준은 덤덤한 목소리로 트레이닝 프로그램의 리셋을 지시했다.
그러자 콕핏 전면을 차지하는 모니터에 비친 산산이 부서진 3대의 나이츠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그리고는 한 대가 추가된 4대의 나이츠가 그 자리에 소환되었다.
-시스템. 트레이닝 프로그램 정지.
마스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브 파일럿 ‘아나트라’의 요청에 의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일시 정지합니다.]
“시스템. 트레이닝 프로그램 재개.”
[파일럿 ‘마성준’의 요청에 의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재개합니다.]
-시스템. 트레이닝 프로그램 정지.
마스터. 잠시 이야기를···.-
[서브 파일럿 ‘아나트라’의 요청에 의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일시 정지합니다.]
“난 너와 할 이야기가 없어.
지금은 훈련시간이고 난 훈련을 해야 하니까.
시스템. 트레이닝 프로그램 재개.”
[파일럿 ‘마성준’의 요청에 의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재개합니다.]
-시스템. 서프 파일럿이 가진 마스터 권한에 의한 트레이닝 프로그램 강제 종료.
이후의 프로그램 기동은 서브 파일럿의 승인을 받고 진행하도록.-
[서브 파일럿 ‘아나트라’의 마스터 권한 요청에 의해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종료합니다.
이후 재기동을 위해서는 서브 파일럿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오는 순간 마성준이 보고 있던 스크린의 시야가 아레나에서 격납고 내부를 보여주는 화면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마성준이 탑승하고 있는 훈련용 나이츠가 보관되어 있는 격납고의 모습이었다.
사고 방지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피곤한 기색의 엔지니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그 황량한 공간을 보며, 마성준이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훈련 프로그램을 강제로 종료시켰습니다.
마스터. 새로 세팅한 기체에 빠르게 적응하고 싶어 하는 마스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더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적절한 휴식과 훈련에서 얻은 데이터를 활용한 복기가 필수적입니다.
지금처럼 무작정 싸움을 반복한다고 해서 실력이 극적으로 향상되지는 않으니까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 이론으로는 플레이 시간만 10만 시간이 넘는데도 브론즈 랭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해 거주민들의 실력을 설명하지 못하죠.
무작정 시간과 체력을 소모해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처사입니다.
지금의 마스터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휴식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제발 부탁하건대 제가 마스터의 손에 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성준은 조종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물집이 터져 얼룩이 맺힌 나이츠의 조종간과, 지나친 마찰과 압력으로 터져버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콕핏 해치 및 서브 콕핏의 해치 개방.
오늘의 훈련은 이걸로 종료하겠습니다.-
그녀는 서브 파일럿 콕핏의 해치가 열리자마자 옆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메인 파일럿 시트를 향해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아직도 멍한 눈빛으로 메인 파일럿 시트에 앉아있는 성준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마스터.”
그렇게 성준을 방으로 데려온 아나트라는, 방에 비치된 구급상자를 꺼내 성준의 손에 난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방송으로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방송 프로그램 옆에 준비되어있는 채팅창을 미친 듯이 도배하기 시작했다.
-헐···. X발 개 부러워. 나도 저렇게 예쁜 애가 치료해줬으면 좋겠다.-
-정작 성준은 별 감정이 없어 보이는데?-
-그럴 거면 나랑 바꿔주지….-
-전 머신 스피릿이 그렇게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는데 그럴 만도 하지.
예전 파트너와 성준은 정말 사이가 좋았었으니까.-
-난 새 파트너의 성격도 마음에 듬.
예전 파트너가 한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인 성격이었다면, 현재 파트너인 아나트라는 한없이 다정하고 포용력 있는 스타일이니까.
아마도 성준이 지금 느끼고 있는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아나트라 같은 성격의 파트너겠지.-
상혁이 아나트라를 성준에게 매칭한 것도 바로 그런 의도에서였다.
성준의 전 파트너인 유가연을 통해 파악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책임감이 강한 그가 과도하게 무리한 훈련을 강행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상혁은 수많은 머신 스피릿 후보 중에 가장 배려심 깊고 정이 넘치는 아나트라를 새 파트너로 권했고, 당시 ‘누구라도 딱히 상관없다.’라는 스탠스를 가지고 있던 성준은 그런 상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어색함이었고.
자신의 앞에서 훈련 복기를 위한 영상을 준비하는 아나트라의 뒷모습을 보며, 성준은 차라리 대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전 파트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 파트너 역할을 맡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나트라 역시 그런 성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저울 위에 놓인 무게추처럼 미묘한 균형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중이었다.
“영상이 준비되었습니다.”
“재생해.”
성준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하자 아나트라는 조금 전까지 성준이 플레이했던 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영상 데이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긴 훈련 기간 동안 각 나이츠의 특성과 파일럿 교육에 대한 모든 지식을 습득한 그녀의 깊이 있는 노하우가 담겨 있는 분석이었다.
“저 상황에서는 보조 화기로 화망을 펼쳐서 대응하는 것보다는 마력 장벽으로 대응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데이터형 코어를 사용하던 마스터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한 방식이라 자연스럽게 나간 거라는 건 알지만, 좀 더 효율을 위해서는 상대 공격의 속성에 맞는 방어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마력 장벽 계열 스킬은 시전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지 않나?
마력계 코어라면 몰라도, 현재의 만능형 코어에서 순간 대응을 위해 마력 장벽을 사용하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그건 코어가 다른데도 같은 주문을 같은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마력계 코어에는 여러 기초 주문을 빠르게 캐스팅하기 위한 퀵 캐스트 기능이 탑재되어 있죠.
반면에 만능형 코어에는 그 기능이 없으므로, 같은 방식으로 주문을 호출하면 해당 주문의 퀵 캐스트에 시스템 어시스트 용량을 할당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연이 발생하는 거고요.”
“그럼 매뉴얼 방식으로 시전하면 지금보다 빠르게 시전이 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몸이 자연스럽게 필요한 스킬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훈련을 통해 습득하는 방법밖에는 없고요.”
“외워야 하는 게 또 늘었군.
만약 이걸 전부 외운다고 해도, 그 복잡한 전투 상황에서 최적의 스킬을 바로바로 생각해서 쓸 수 있을까?”
“거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발상의 전환입니다.”
“발상의 전환?”
“상대가 스킬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 스킬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전투로 이끌어가는 거죠.
예를 들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상대에게 물리 방어 관통 능력이 있는 파일 드라이버 계열 장비를 사용한다면, 상대는 마력계 코어를 사용하는 나이츠이니 필연적으로 마력 계열 방어 기술을 사용하게 될 겁니다.
그때 미리 해당 주문을 파훼할 수 있는 수단을 준비해놓고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상대가 시전할 스킬을 예측해서 전투에 임할 수 있겠죠.”
“그···. 그게 가능 한 건가?”
단순히 나이츠가 ‘쓸 수 있는’ 기술을 전부 사용하게 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파트너를 본 성준이 당황하며 묻자, 아나트라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계열은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전투를 하는 분이 한분 계시죠.”
“누구?”
“즈라드의 파일럿 최현민 씨요.”
“아···.”
성준은 예전에 즈라드에게 도전하여 1:1 배틀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때의 현민은 마치 성준이 다음에 사용할 무기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고, 성준이 피할 방향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공격을 해 왔었다.
“즈라드가 사용하는 대형 도끼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주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공격 이후의 빈틈이 너무 커서 운용이 지극히 어려운 장비죠.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공격력에 올인한 것 같은 세팅이, 상대의 선택지를 제한하게 됩니다.
즈라드의 앞에 선 상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 ‘막고 공격한다’라는 선택지 자체를 뇌리에서 지워버리니까요.”
“스쳐도 뒈질 것 같으니 절대 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
“바로 그런 생각을 강제하게 만드는 운영법이 즈라드의 운영법입니다.
이쪽으로 도끼를 휘두르면 상대가 반드시 저쪽으로 피할 것이란 확신이 있기에, 처음 도끼를 휘두를 때부터 상대의 회피 위치까지 고려한 힘 조절을 하여 무기의 궤적을 조정하죠.
하지만 그건 즈라드의 파일럿 최현민 씨의 능력이 뛰어나서 가능한 운영법만은 아닙니다.”
“그럼?”
“애당초 상대가 이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형태의 공격 방식을 처음부터 수련한 상태로 연속 공격을 펼치는 것이니까요.
쉽게 표현하면 일종의 형이 갖춰진 무공 같은 형태로 상대를 제압하는 겁니다.
모든 움직임과 궤적이 미리 연습해둔 대로 굴러가지만, 상대가 그 궤적의 안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그 공격이 먹히는 거죠.
마스터가 현재의 RebirthDP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습득해야 하는 기술이 바로 그 기술입니다.
마도와 물리력, 화력이라는 3대 요소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만능형 나이츠의 능력을 100% 활용하여, 상대가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필살의 연속 공격 패턴을 완성하는 거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전투 영상이 재생되고 있던 화면을 다른 화면으로 전환 시켰다.
그러자 엄청나게 복잡해 보이는 숫자와 기호가 빼곡히 채워져 있는 화면이 등장했다.
마치 복잡한 수학 공식의 증명 논문을 보는 듯한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던 성준은, 화면에 적혀있는 문자와 번호들이 나이츠 콕핏에 있는 수천 개의 버튼에 할당된 ‘컨트롤러 넘버’임을 가까스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RebirthDP에 탑재된 만능형 코어의 책임 설계자와 PTW의 조작계 전문 엔지니어들, 그리고 PTW 최고의 무술 전문가인 구스타프 씨와 KOH의 밸런스 팀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RebirthDP 전용의 연속 공격 커맨드입니다.
해당 기술의 시전에 필요한 버튼의 수는 124개이며, 연계기 도중의 마도 스킬 발동에 필요한 입력 모션이 32종, 그리고 200g 이내의 오차 범위 내에서 조종간을 통해 조작에 필요한 모션을 입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전부 외우라고?”
“단순히 외우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죠. 첫 번째 커맨드를 입력하는 순간부터 눈 감고도 이후 커맨드가 입력될 정도로 몸 자체에 기술을 새겨 넣어야 합니다.”
아나트라의 말을 들은 성준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손엔 무리한 훈련 과정에서 터져나간 그의 손바닥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가 감싸준 붕대가 정성스럽게 감겨 있었다.
“물집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터지게 생겼네.”
“이제는 굳은살이 생길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직은 아닌가 봐. 좀 더 수련이 필요한가 보지.
어쩌면 몇 번이고 더 터져야 생길지도 모르고.”
“아프겠네요.”
“그렇겠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성준은 그렇게 말하며 아나트라의 손바닥을 보았다.
거기엔 그 가녀린 손가락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밴드가, 마치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 성준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부끄러운 듯 손을 뒤로 감추며 성준을 향해 말했다.
“제 손이라면 괜찮아요.
머신 스피릿에게 있어서 손바닥의 상처는 노력이 주는 훈장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머신 스피릿이 가지고 있는 실력의 척도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즈라드의 서브 파일럿도 저와 비슷한 상처를 손에 가지고 있겠죠.
어쩌면 손바닥이 굳은살 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굳은살이라. 적어도 아프지는 않겠네.”
아나트라는 손바닥이 욱신거린 듯 눈가를 찌푸리는 성준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매번 무리한 주문을 부탁드려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나트라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진짜로. 아무리 내 목표가 최고의 나이츠 파일럿이 되는 거라지만, 네가 요구하는 훈련 프로그램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빡센 수준이라고.
가연과 했던 약속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서브 파일럿을 교체해달라고 했을 정도로.”
“하지만 마스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렇지. 익히는 과정은 힘들지만, 확실하게 한 걸음씩 강해져 가고 있으니까.
오늘은 마침내 AI가 조종하는 나이츠와 3:1로 싸워서 이기기도 했고.”
“이 기술을 익히면 5:1까지는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리스트에 있는 조작 전체를 손발처럼 다룰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요.”
“5:1이라···. 즈라드의 파일럿이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숫자는 몇이지?”
“두 마리만 더 잡을 수 있으면 내가 우위라는 소리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이 말도 안 되는 두께의 스킬 조작법을 익혀야 하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바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준을 보며, 아나트라는 조바심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의 조급함 때문에 파일럿에게 너무 무리한 과제를 떠넘기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녀는 조금 느리게 강해지더라도 천천히 걸어나갈 방법을 찾아볼까 하는 마음을 담아 성준에게 말했다.
“무리처럼 느껴지신다면 좀 더 쉬운 다른 방법을 찾아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스킬 구성을 바꿀 필요는 있을 것 같아.”
“역시···.”
“내가 이걸 마스터할 때쯤, 현민은 5:1을 이미 성공한 상태일 테니까.
우리가 노력하는 동안 현민 씨도 놀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 그가 5대를 상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우린 6대를 목표로 달려가야지.”
성준은 그렇게 말하며 아나트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가연 외에는 절대 보여주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할 수 있지?”
“넵! 맡겨주세요!”
밝게 대답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성준이 말했다.
“자, 그럼 다시 굳은살 만들러 가볼까?”
그리고는 방문을 나서 다시 트레이닝용 나이츠가 있는 격납고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건네준 스킬 셋의 사용법을 완벽히 익히기 전까지는, 아예 나이츠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그렇게 새로운 관계로 다시 태어난 두 사람은 격납고로 향하는 복도를 나란히 걸어가며 같은 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최강의 나이츠 듀오’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유일하게 떠오르는 단 두 명의 페어가 되고 싶다는 원대한 각오가 담긴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