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 퍼즐같은 조건들 >
그렇게 자신의 근황에 대해 설명한 상혁은 이번엔 민준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프로그래머와 기획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지만, 서로가 일하는 영역의 깊은 이야기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나 평소에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민준은 무언가를 진행하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상혁은 이번 기회를 빌려 민준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근황은 대충 설명이 된 것 같고, 너는 어떻게 지내는데?
중간에 내가 강제로 끌어들여서 웹 드라마에 출연해야 했던 것 말고.”
“아, 그 욕나오는 이벤트.”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고 깜짝 이벤트를 진행한 상혁에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야, 넌 장난으로 진행했을지 몰라도 난 그때 진짜로 식겁했었다고.
회귀 전과 후를 포함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괴물 같은 바이러스가 메인 서버를 공격해오는데, 절대 뚫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방화벽은 미친 듯이 뚫려 나가지, 심지어 그중에 일부는 내부 정보를 모르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백 도어까지 찾아서 공격하더라?
진짜 그때는 ‘스컹크 웍스 멤버중에 배신자가 있구나!’라고 속으로 탄식했었지.”
“그래도 막긴 했잖아. 난 믿고 있었다고. 너라면 할 수 있다고.”
“맞아, 뒤지는 줄 알았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이벤트였어.
지금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서버의 보안을 지켜냈기 때문에, 다들 PTW 서버는 절대 뚫리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거로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걸 공격자의 시점에서 재해석해서 보니까, 생각보다 공격할 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고, 반대로 나 같은 경우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로로의 공격을 보고 그 부분을 보완할 좋은 기회가 되었지.
그래서 이벤트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현재 PTW의 메인 서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해커 수백 명이 무더기로 몰려 들어와도 절대 뚫을 수 없다고.”
“그래? 그럼 조만간에 해킹 대회 한번 해도 괜찮겠네.
한 100억 걸고 PTW 서버의 취약점을 찾아낸 해커에게 주겠다고 하는 거지.”
“재밌겠네. 어차피 받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던 민준은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혁이 가로막았다.
“넌 안 돼.”
“젠장. 어떻게 알았냐.”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분명 이렇게 생각했겠지.
‘지난번 이벤트 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이번엔 내가 복수할 차례다.’라고.
그리고 이번엔 스컹크 웍스 멤버들에게 방어를 맡긴 다음, 니가 공격자 역할을 하려고 한 거지?”
“내가 느낀 공포를 그 녀석들도 느껴봐야 공평한 게 아닐까?”
“아서라. 네가 공격자 역할을 맡으면 그건 공포 수준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아까 이야기의 연장인데, 퍼스티스트의 방어전 이벤트 말고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 같은 건 없어?
아니면 진행 중이었다가 완료된 프로젝트라던가.”
“최근이라. 그러고 보니 STC의 메이저 버전 업이 한 번 있었지.”
“지금 몇 번이지?”
“최근 게 4.0.
종전 대비 최적화 효율이 더 높아지고, 전용 칩셋의 설계도도 한 번 더 갱신되었어.
물론 STC로 최적화가 완료된 프로그램에 한해서지만, 전용 프로그램의 경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효율로 돌아가지.”
“대충 어느정도인데?”
“우리가 게임회사 사무실에서 나란히 과로사했던 게 2023년이었지?”
“응.”
“그럼 네가 기억하는 가장 성능 좋은 그래픽 칩셋은 RTX 40시리즈겠네.
CPU 기준으로는 라이젠 7천 시리즈 정도 되고.
STC 최적화를 마쳤다는 가정하에서, 전용 칩셋으로 돌리면 정확하게 그거보다 2.3배는 성능이 더 나올 거야.
물론 해당 설계대로 파운드리 업체에서 얼마나 잘 만들어주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삼정도 회귀 전하고는 다르게 계속 우리 쪽 부품의 하청을 맡고 있었으니까, 아마 잘 하겠지.
지금은 TSMC보다 점유율이 높을 정도고.”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기술은 우리가 기억하는 회귀 전의 세상을 앞질러 가고 있지 않아?”
“애당초 딥 다이버나 PRD 같은 치트급 머신이 보급형 사양이 된 시점에서 이전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지.
회귀 전의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는, VR이라고 해봐야 옵큘러스 퀘스트 들고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던 게 전부였던 세상이니까.
촉각 슈트 같은 기술이 있긴 했지만, PRD에 사용되는 기술에 비하면 플래쉬 라이트와 횃불 수준의 차이라고 볼 수 있지.
리얼 엔진의 출시 이후로 전 세계 게이밍의 중심 트랜드는 이미 풀 다이브 체계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고.
SANY도 PS5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거치형 콘솔 개발이 무의미할 것 같다고 발표했잖아.
게다가 전 세계 게임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모바일 시장보다 콘솔 시장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진 세상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길의 가장 앞에는, 우리가 만든 PTW라는 회사가 길을 개척하고 있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회귀하고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 두 번 다시 너랑 게임 안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 않아.
물론 회귀 전보다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만드느라 엄청나게 고생하긴 했어도, 너와 함께 한 시간은 꽤 즐거웠으니까.”
민준의 솔직한 칭찬을 들었지만, 상혁은 기뻐하지 않았다.
대신 상혁은 잔뜩 의심하는 표정으로 민준을 향해 따지듯 외쳤다.
“뭐, 뭔데? 바라는 게 뭐냐!
돈이냐? 권력이냐?
대체 내게서 뭘 바라고 있길래 그런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는 거지?”
“솔직하게 칭찬하는 거니까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도 될 텐데.”
“미안하지만 네가 날 잘 아는 것만큼 나도 널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
내가 아는 민준이란 녀석은 원하는 게 있지 않으면 절대 이런 곳까지 끌고 와서 부담스러운 칭찬을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딱 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게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자 민준은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를 풀고 진지한 눈빛으로 상혁을 향해 말했다.
“젠장,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농담하듯 말하는 민준을 보며, 상혁은 조금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민준에게 말했다.
“사실 네가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어.
그냥 부탁하면 되지.
넌 지금의 PTW를 만드는 과정에서 네가 회사에 이바지한 수준이 어느정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애당초 이 회사의 모든 기술은 전부 네 손에서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고.
그러니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로 해.
‘상혁아, 이것 좀 해줘.’라고.”
“그럼 조건 없이 무조건 해주는 거야?”
“지금 와서 회사를 산산조각내자거나 아니면 회사가 보유한 핵심 기술을 오픈 소스로 공개하자는 괴랄한 부탁만 아니면.”
“좋아. 그런 부탁은 아니야.”
“그럼 그게 무엇이든 들어줄게.
어차피 게임과 관련된 거지?”
“어? 어떻게 알았어?”
“난 네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예전의 넌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
네가 만들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아직은 시대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나 언젠가는 그 게임을 만들 거고, 내게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 했었어.”
“기억하고 있었구나.”
“사실 계속 의식은 하고 있었지.
‘X친, 시대가 따라잡지 못해서 못 만드는 게임이라니, 이 자식이 대체 뭘 시키려는 거야?
스타 시티즌보다 더 큰 프로젝트라도 할 생각인 건가?’
속으로 계속 그렇게 공포에 떨면서,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언젠가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후. 맞아. 사실 이제 슬슬 퍼즐 조각이 다 모였다는 생각이 든 참이었거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형태의 이상적인 게임을 완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퍼즐 조각이.”
“사실 하드웨어 성능의 제한이라면 PRD때 이미 풀린 거 아냐?
애당초 PRD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고 사양 콘솔이기도 하고, 가격이 비싼 만큼 그 이상의 스펙을 내주는 장비이긴 하잖아.
그런데도 지금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건, 단순히 하드웨어 성능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건데, 대체 어떤 퍼즐 조각이 모이기를 기다린 거야?”
상혁의 질문을 들은 민준은 주먹을 쥐어 상혁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검지부터 순서대로 손가락을 피며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퍼즐 조각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혁이 네가 말한 대로 PRD는 최적화가 되지 않은 울트라 옵션 스타 시티즌을 렉없이 풀 프레임으로 즐길 수 있을 만한 하드웨어 사양을 가지고 있지.
거기에 STC의 힘을 빌리면 그 이상의 성능을 내는 것도 가능한 머신이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부터 따져도 향후 20년 안에는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가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야.
애당초 그래픽이라는 게 무한정 좋아진다고 해서 마냥 좋은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사실 그래서 리얼 엔진의 업그레이드나 최적화도 얼마 전부터는 비쥬얼 적인 그래픽의 향상보다는 물리 엔진이나 환경 효과의 현실적 재현에 집중하고 있어.
하지만 성능과는 별개로, PRD의 보급량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애당초 자동차처럼 출퇴근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닌 게임밖에 할 수 없는 3천만 원짜리 머신을, 그것도 거실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 머신을 쉽사리 살 수 있는 게이머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사실 그 이유로 HC 101이 그 명성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판매량을 기록하는 게임이 되기도 했고.
물론 지금은 보급량이 늘어나면서 계속 판매가 늘어나 천만 판매 타이틀 자리를 획득했지만.
처음엔 진짜 암울했었어.
그렇게 힘들게 만든 게임인데, 딥 다이버 버전은 불티난 듯 팔려나가면서도 PRD 전용 버전은 10만 카피를 뚫는 데만도 1년 가까이 걸렸으니까.”
“그렇지. 사실 그 당시만 해도 PRD라는 머신은 그 성능이나 가능성에 비해 유저에게 엄청난 메리트를 주는 머신은 아니었어.
HC 101은 정말 멋진 게임이었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 3천 만 원을 낼 수 있는 게임이냐고 하면 조금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후로 우리는 계속 PTW LAB을 통한 여러 게임들을 발매하고 YAS 같은 게임들도 히트시켰지만, 여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 할 수 있었지.
그 상황이 반전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고.”
“KOH를 말하는 건가?”
“그렇지. 솔직히 놀랐어.
전 세계 수억 명이 시청하는 웹 드라마를 만들어서, 그들이 PRD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게.
실제로 그 전략을 잘 먹혔고, PRD의 보급속도엔 탄력이 붙었지.
최소 1000만대 이상의 RPD가 시장에 보급되는 것.
그것이 내가 기다리던 첫 번째 퍼즐이야.”
“첫 번째가 있다면 두 번째도 있겠군.”
민준이 중지를 펴 V자를 만들어 상혁에게 보이며 말했다.
“두 번째는 데이터야.”
“데이터?”
“리얼 엔진이 무료로 공개된 이후, 정말 수많은 개발자들이 리얼 엔진을 통한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지.
그리고 우리의 라이선스 정책에 따라, PTW에 지급할 로얄티를 줄이기 위해 수많은 오리지널 데이터들의 저작권을 PTW에 넘겼고.
혹시 예전에 이슈가 되었던 그 기사 기억해?
‘PTW는 아무 의미 없는 데이터 쪼가리의 저작권을 얻기 위해 막대한 이윤을 포기하고 있다.’라는 기사.”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사실 그것도 그런 게, 특정 게임의 캐릭터 모델링 데이터의 활용권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 데이터를 활용해 그 게임의 후속작을 만들 권한을 받는 건 아니니까.”
“그것도 맞는 지적이긴 해.
결국 우리가 받는 건 그들이 리얼 엔진 안에서 창조한 ‘부속품’의 저작권에 관한 저작권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저작권은 아니거든.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메이저 업체들도 속속들이 라이선스 정책을 비용 지불에서 저작권을 넘기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지.
지금은 아예 대부분의 업체가 PTW엔 로얄티 한 푼 내지 않은 채 리얼 엔진으로 개발한 게임들을 발매하고 있고.
하지만 그들이 그 과정에서 간과한 게 하나 있어.
우리가 가져가는 건, 작업물 자체의 디자인이나 시스템에 대한 저작권이기도 하지만, 그 작업물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전체 라이선스를 받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하자면 그들이 생각하기엔 자신들이 넘기는 것은 모든 작업 과정을 끝내고 결과물로 뽑아낸 JPEG파일 같은 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받는 건 작업 히스토리를 포함한 개발 과정의 모든 데이터가 들어있는 PSD파일 같은 거거든.”
“그 말은···.”
“전 세계의 수많은 개발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작업물을 손보고 어떤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리얼 엔진의 AI가 전부 학습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민준이 말했다.
“난 현시대에 가장 가치 있는 게 돈이 아니라 이 데이터라고 생각해.
물론 지금의 빅데이터는 대기업들이 맞춤형 광고를 사용하는 데 주로 활용되고 있지만, 제대로 축적된 데이터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방대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거든.”
그 말을 들은 상혁은 최근에 리얼 엔진에서 진행했던 작업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민준에게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물었다.
“근데 그렇게 학습한 것 치고는 오픈했을 때와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은데?
최근에 작업했을 때 AI가 보조하는 시스템 어시스트도 이전하고 비슷한 느낌이었고.”
“그건 일정 시점 이후부터 기존의 시스템 어시스트 AI와 학습된 AI를 분리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리얼 엔진에서 필요한 수준의 서포트 AI는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도와주는’ AI이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결과물을 대신 만들어주는 AI가 아니거든.”
“그 말은, 지금 학습이 완료된 신형 AI는 능력 있는 인간 작업자가 작업한 것 이상의 퀄리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특정 영역에서라면.
물론 AI에게 인간 특유의 창의력이나 감수성을 요구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A와 B라는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작업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라면 좀 더 확실한 판단을 제시할 수 있어.
예를 들어 갑옷에 조금 낡은 듯한 칼자국을 추가하고 싶은데, 그게 어느정도의 크기로 어느 위치에 어느 각도로 들어가야 가장 멋지게 보일까에 대한 문제 같은 거 말이지.
원래라면 숙련된 전문가가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서 몇 번의 시도를 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수정을 해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개선된 리얼 엔진의 AI는 그 작업을 곧바로 가장 최적의 위치에 가장 멋진 형태로 자리 잡게 하지.
수정을 요청한 요청자가 결과물을 보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러자 상혁은 민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아. 네 말대로 네가 학습시킨 AI가 웬만한 개발자보다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쳐.
그래도 그건 부분적인 결과물에서의 우수함일 뿐이지, 전체적인 결과물의 재미가 보장되는 건 아니잖아?
민준이 너는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AI가 인간보다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선택지를 향해 나아가는 건 인간이라고.
AI가 뭘 얼마나 좋은 퀄리티로 만들든 간에, 결국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러니 난 AI가 인간의 영역을 대체할 것처럼 말하는 네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어.
단지 수많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게임이란 종합 엔터테인먼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다른 숙련된 개발자의 서포트를 받을 수 없는 수많은 아마추어 개발자들에겐 도움이 될 것 같긴 하지만.
예를 들어 만들고 싶은 게임은 있는데 숙련된 3D 모델러를 구할 수 없는 기획자라던가, 아니면 비쥬얼에 대한 확신한 비전을 품고 있지만 게임 시스템이나 레벨 디자인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디자이너라던가, 프로그래밍적 지식은 풍부하지만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프로그래머들은 그런 AI의 서포트로 굉장히 훌륭한 게임을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게임 개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게이머들도 AI의 서포트를 받아 그럴싸한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불가능해.
기존에 있는 게임과 비슷한 버전의 어레인지 게임을 만드는 건 가능하겠지만, 아무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창조적인 게임을 바닥부터 만들어나가는 것은 AI의 서포트 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상혁의 지적을 들은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상혁의 의견에 긍정했다.
그가 말한 AI의 단점은, 민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민준이 목표하는 것은 ‘완전한 창작이 가능한 AI’가 아니었다.
상혁이 말하는 ‘게이머의 취향에 맞춘 기존 게임의 어레인지 버전’.
그것이 민준이 바라는 ‘이상적인 게임’이 추구하는 궁극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민준은 상혁을 보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상혁아. 뭐 하나만 물어볼게.
너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뭐야?”
“좀 뜬금없는 질문이네.
사전적 정의로서의 게임의 정의를 묻는 거야?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의 정의를 묻는 거야?”
“둘 다라면?”
“사전적인 정의를 내리자면 ‘규칙이 있는 무언가.’를 게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
심지어 주어진 선택지 중에 맞는 답을 고르는 시험조차도 퀴즈 게임이란 형태로 만들 수 있으니까.
교실에서 펜을 돌리는 행위도 ‘펜을 떨어트리지 않는다.’라는 규칙이 있는 거고, 판치기 역시 ‘동전을 뒤집는다.’라는 규칙이 있지.
그러니까 사실 세상에 규칙을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요소는 게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심지어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단순 노동조차도, ‘상대보다 더 많은 벽돌을 빠르게 나른다.’라는 규칙을 붙이면 일종의 스포츠 게임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의 정의는 뭔데?”
“한 사람의 삶으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경험을 대리 체험하게 해주는 것.
현실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낯부끄러운 대사를 진심을 담아 내뱉을 수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과거에 경험했던 그 수많은 경험을 추억하며, 예전의 나는 그 게임을 할 때 마왕에게 멸망할 뻔한 세계를 구하고, 수십 미터짜리 로봇을 직접 운전한 로봇 파일럿이 되기도 했었으며, 빌런들에게 위협받는 거대한 도시의 시민들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가 되기도 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의 형태야.”
“말 그대로 PTW의 CCO다운 답변이네.
우리 게임이 전부 그런 형태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뭐 그렇지. 사실 텍스트만 가지고 야구 선수가 되는 경험을 하든, 아니면 PRD에 탄 상태로 전세계 일류 농구 선수들과 NBA 결승전 코트를 누비든, 매체가 다를 뿐이지 받는 경험은 언제나 같다고 생각해.
윈도도 없었던 시절 DOS 운영 체제로 돌아가는 열악한 그래픽을 보고 있어도, 게임을 하는 동안은 언제나 바다를 누비는 대함대의 제독이 되거나, 소중한 동료들과 마왕 성을 향해 떠나는 용사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리고 우리의 게임 개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수록 우리가 게이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의 범위와 몰입감도 커지는 거지.
펜티엄 컴퓨터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실제 콧핏에 앉아 15미터 크기의 거대 로봇을 타고 싸우는 경험이라던가, 빌런을 상대로 시민을 구하며 내 두 팔로 그 시민의 몸무게를 느끼는 경험이라던가, 아니면 키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파도를 느끼며 저 멀리 보이는 섬에서 풍겨오는 모험의 냄새를 맡는다던가.
사실 나 역시 향후 20년간은 PRD보다 더 향상된 게임 디바이스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장비의 성능이 아닌 전달되는 경험을 기준으로, 현재의 PRD가 게이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몰입감의 수준은 거의 완벽에 가까우니까.
다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PRD 안에서는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뿐이지.
그것만 가능하다면, 정말 완벽 그 자체일 텐데.”
“그래도 투자는 계속하고 있잖아?
DARPA와 나사에서도 협력하고 있고.”
“그건 그렇지.”
민준의 말대로, 상혁은 가상현실 세계에서 음식을 씹고 맛보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연구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엔 무려 미국의 NASA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신 기술이 장기간 우주식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우주 비행사들의 스트레스를 획기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은 비록 우주에 가 있어도 우주 정거장에 설치된 PRD 안에서 가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지상에서와 별다를 바 없는 경험을 우주 비행사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DARPA에서는 DARPA 나름대로 전장에 배치된 미군 병사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공동 연구에 임하고 있었고.
그렇게 PTW와 DARPA, NASA라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연구 기관 셋이 공동으로 참여한 ‘가상 현실 미각 구현 프로젝트.’는, PTW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 아래 오늘도 현실과 가상의 벽을 넘기 위한 끝없는 연구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지금 실험하고 있는 구현 방식은 어떤 방식이지?”
민준이 묻자 상혁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도하고 있는 방식은 인공 지지대가 삽입된 마우스피스 같은 형태의 물체를 입에 물고 맛을 구현하는 방식이야.
대상을 씹을 때 이빨과 혀에 느껴지는 음식의 반발력을 마우스피스 안에 있는 지지대들이 대신 구현하는 거지.
만약 씹고 있는 것이 고기라면 정확히 잘 익은 고기가 이빨과 혀를 밀어내는 수준의 압력으로 밀어내고, 뼈를 씹었다면 뼈를 씹을 때 느껴지는 단단함을 내부 지지대들이 구현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씹는 맛’을 구현하는 동안, 마우스 피스 안에 설치된 수많은 공극에서 향을 내는 성분과 수분, 기름기를 내는 성분들이 정확한 온도와 배합으로 혀 위에 분사되는 거지.”
“듣는 거로는 꽤 그럴싸한데, 잘 되어 가?”
“아니. 문제는 목 넘김이야.
우리가 개발한 마우스피스가 아무리 비슷한 압력과 온도, 향과 수분을 공급한다 해도, 그건 결국 입안에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거잖아?
씹기만 하고 삼킬 수는 없으니까, 결국 삼키는 감각 자체는 구현할 수 없는 거지.
최근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성이 있는 유동식 같은 형태의 물질을 튜브에 공급하는 식의 실험을 하고 있는데, 다 씹고 나서 삼키려고 할 때 타이밍에 맞춰 마우스피스에 난 구멍으로 유동식을 주입하는 거지.
음식의 종류와 사용자가 씹은 수준에 맞춰서 삼키는 느낌을 구현할 수 있도록.
그와 동시에 딥 다이버에 추가한 디뷰져에서도 향기를 내주니까, 완벽하지는 않아도 비슷한 수준까지는 접근했다고 평가하고 있어.
마지막 허들 하나만 넘으면 될 텐데 말이지.”
“어떤 허들?”
“음식을 다 씹은 다음 삼키고 나면 입안엔 뭐가 남지?”
“그야 아무것도···. 아!”
민준이 외치자 상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항상 입에 마우스피스를 문 채로 있어야 해서, 어떻게든 입 안에 이물감이 남을 수밖에 없어.
게다가 말을 할 때도 입 안을 채운 마우스피스가 방해가 되고.
내부 지지대의 저항력을 아무리 낮춘다 하더라도 예민한 인간의 혀를 속이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지금 진행 중인 연구는 거기서 막혀 있었지.”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거네?”
“그 문제에 대한 해결법을 찾아달라는 요청이 왔길래, 생각나는 방법을 알려줬을 뿐이야.
나도 그게 가능할지 안 할인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쪽에서는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고 실험해보겠다고 했거든.
만약 그 방식이 성공한다면, 어쩌면 진짜로 가상현실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말해줬길래···.”
“별거 아니야. 씹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입안에 마우스피스 형태의 디바이스를 물고 있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그걸 풍선 형태로 만들어서 음식이 들어갈 때 입안에 밀어 넣는 형태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뿐.
지지대가 주는 압력을 공기가 주는 압력으로 대신하고, 인간의 치악력으로 씹어도 망가지지 않으면서 별다른 이물감을 제공하지 않는 얇은 소재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어쩌면 가상현실에서 먹은 음식과 비슷한 형태로 부풀어 오른 풍선을 입안에 집어넣을 수 있겠지.
다 먹고 나면 공기를 빼서 다시 밖으로 치우면 그만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매우 고기와 비슷한 질감과 맛이 나는 풍선을 씹게 만든다는 거네.
괜찮은데?”
“하지만 풍선을 음식 같은 질감과 형태로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것은 쉬운 게 아니야.
아마도 큰 풍선 안에 수백 개의 작은 풍선을 넣어서 각각의 풍선들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와 강도를 조절하며 최적의 수치를 찾아야겠지.
그리고 그 풍선 사이사이에 지방과 수분, 향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수많은 미세 튜브들을 집어넣어야 할 것이고.
온도도 조절해야지.
앞으로도 갈 길이 한참 멀다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방법도 다 해봤는데 문제가 있어서 폐기해야 할 수도 있고.”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길을 찾은 것만으로도 개발자들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을 거야.
아마도 전문가도 아닌 널 찾아와서 막힌 부분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도, 네가 뱉어낼 그 괴상한 아이디어를 기대했기 때문일 테니까.”
“사람을 무슨 4차원처럼 말하지 말라고.
아무튼 잘 되면, 아마도 1년에서 2년 안에는 PRD에 장착해서 쓸 수 있는 미각 전용 디바이스의 시운전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출시에 대해서는 좀 고민해 봐야 하겠지만.”
“어? 어째서? 사람들은 정말로 좋아할 텐데?”
“안 그래도 그 많은 PRD 유저들이 게임을 하느라 시간 아깝다고 우리가 발매한 단백질 블록만 먹고 외식을 안 하고 있어.
거기에 가상현실에서 아예 맛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하면, 전 세계의 외식 사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거라고.
그때부터는 진짜 매트릭스같이 되는 거지.
먹고 싶은 건 가상현실 세계 속에서 마음껏 맛보고, 현실에서는 오직 영양 공급만을 위해 만들어진 콧물 같은 멀건 죽을 마시면서 다시 가상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그런 세계 말이야.”
“그건 옆에서 보면 완전히 디스토피아네.”
“뭐, 환경적으로는 좋을지도 모르지.
소 한 마리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자동차보다 많다고 하잖아?
원래라면 현실에서 충족되어야 할 인간의 욕구를 가상의 세계에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쁜 현상이 아니라고 봐.
그만큼 지구의 자원이 덜 낭비되고, 환경이 덜 파괴되고, 탄소가 덜 배출되게 되는 거니까.
모두가 원한다고 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페라리를 타고 다닌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환경오염이 발생하겠지만,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50억 명이 페라리를 타고 동시에 달려도 매연 하나 발생하지 않잖아?
게다가 해변에 방문해서 서핑을 즐기던 사람들이 PRD로 레져를 대신한다면 그만큼 해변에서 일어나는 환경 파괴가 줄어들게 되는 거고.”
“물론 그런 변화를 기존의 사업자들이 좋아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기술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이니까.
전보가 생기면서 우편 사업이 쇠퇴하고, 전화가 생기면서 전보가 쇠퇴하고,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전화가 쇠퇴하듯이.
배의 엔진이 석탄 대신 기름을 태우게 되면서 현대의 배에는 더 이상 석탄 공을 태울 필요가 없게 되었지.
대신 배의 엔진을 만드는 선박 엔진 기술자라는 직업이 새로 생겨났고.
한 직업이 쇠퇴하면 자연스레 다른 직업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어 있어.
그리고 우리는, 그 직업의 흐름 안에 ‘전업 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을 추가하고 싶은 것뿐이고.
물론 우리가 하려는 일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의 직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우리 때문에 새로 생기는 직업도 있잖아?
얼마 전에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에서 YAS전용 가죽 갑옷을 발매했던 거 기억나?”
“아, YAS의 직업 시스템 중에 가죽 장인 직업을 마스터까지 올린 에르메스 장인이, 게임 내에서 존재하는 최상급 재료로 직접 만들어 판매한 경전사용 갑옷 말이지?”
“실제로 그 갑옷은 에르메스의 명품 디자이너들이 직접 디자인한 뒤 YAS의 생산 시스템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장비였어.
물론 현실에서의 명품이란 그냥 양산품보다 디자인이 월등하고 내구성이 튼튼한 것 외에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YAS는 다르지.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와 기술에 따라서 부여되는 능력치가 달라지니까.
말 그대로 게임 내부에서 최상급 능력치를 가진 갑옷이었으니,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렸지.
지금은 웃돈 줘도 못 구하는 물건이 되었고.
그렇게 현실에서의 직업이 가상 세계에서의 직업이 되는 예도 있는 거야.
그리고 그 가상 세계의 직업은, 가죽 가방을 만들기 위해 희생되는 가축의 존재 없이 오로지 가상의 괴물이 만들어내는 재화로 유지되는 직업이지.
결과적으로 같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면, 난 가상현실에서의 생산 활동이 훨씬 비 소모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야.”
“그 의견엔 나도 동의해.”
“PRD 전용 미각 시스템에 대한 설명 때문에 이야기가 새긴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민준이 네가 모으려던 퍼즐 조각은 그게 다야?
PRD의 보급과 리얼 엔진으로 수집한 데이터?”
그러자 민준은 고개를 저으며 약지를 펴 3개의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아니, 3번째는 지금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데, 내가 모으려던 세 번째 퍼즐은 바로 YAS를 통해 수집한 데이터야.”
“YAS의 데이터?”
“현재 YAS의 동접자 수는 평균 320만 수준이지.
PRD의 공급량을 보면 정말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이긴 하지만, 매일 그 정도 숫자의 유저들이 이 세계 안에서 교류하고 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상황에 처하며 그 상황에 맞는 대화와 행동을 하고 있지.
나는 그렇게 320만 명의 매일 쏟아내는 방대한 시츄에이션 데이터를, 커뮤니케이션 엔진의 개선에 사용했고.
그 덕에 지금 비공개 상태인 커뮤니케이션 엔진의 버전은 5.0이 되었어.”
“5.0?! 지금 공개된 버전은 3.7인데?”
“말했지만 그것도 모종의 이유로 본 서버와 격리된 상태에서 개발되고 있었거든.
아무튼 그렇게 만들어진 5.0 버전의 커뮤니케이션 엔진은, 인간과 흡사한 대화를 구현하는 게 목적이었던 이전 버전과는 다르게, 이제 사람 같이 움직이고 표정도 지을 수 있지.
그리고 행동 자체도 정말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AI는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면 사람처럼 반박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누군가와 호감을 쌓게 되면 그리워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애교를 부리기도 해.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음식을 서빙할 때, 몰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접시보다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올리기도 하지.”
“와, 그건 진짜 보고 싶네.”
“딱히 보고 싶어할 필요는 없어.
넌 이미 그녀를 만났으니까.”
“그녀?”
민준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상혁이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뛰며 민준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여기 왔을 때 만났던 알바생이?!”
그러자 민준은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YAS 캐릭터 이름은 로제타.
현실에서의 이름은 한수미.
커뮤니케이션 엔진 5.0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간형 AI이며 무려 반년째 이곳에서 현실 인간들과 섞여 아르바이트하면서 단 한 번도 AI라는 것을 들키지 않는 ‘초 인간형’ AI이지.”
그녀와 했던 대화를 전부 떠올려도 전혀 어색한 점을 떠올릴 수 없었던 상혁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민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민준은 그런 상혁의 턱을 손으로 살짝 올려 입을 다물게 만들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여기 내가 모은 3개의 퍼즐이 있어.
수천만 명이 플레이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성능의 풀 다이브 VR 게임 전용 플랫폼.
그리고 그 어떤 전문가보다 빠른 속도와 뛰어난 퀄리티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개발 전문 AI’.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진짜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반응을 보여주는 완벽한 ‘인간형 AI’.
그럼 여기서 문제.
과연 나 김민준은, 이 3개의 오파츠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려는 걸까?
그리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마지막 퍼즐이 뭘까?
그걸 네가 맞출 수 있다면, 상혁이 넌 내가 너에게 만들어달라고 하려는 게임이 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민준의 얼굴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굉장히 익숙하지만, 상혁이 직접 본 적은 없는 것 같은 그런 미소가.
그것은 상혁이 뭔가 사악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마다 짓는, 상혁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악한 미소’.
바로 그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