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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게임 이론 (5) (87/529)

 88화. 게임 이론 (5)

 시장에는 수많은 돈이 돈다.

 돈에 꼬리표가 달려있는 건 아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알렉스는 컨티뉴 캐피탈의 자금력에 대해 분석했다.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린 것은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당시 투자로 번 돈이라고 해봐야 100억 달러를 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면 원금은 얼마였을까?

 ‘가진 돈이 많았다면 그 이상 투자를 했겠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원금은 얼마 안 됐다는 건가?’

 아마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당시에는 5억 달러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했다.

 컨티뉴 캐피탈의 진짜 목적은 뭘까?

 정말로 쿨라우드를 인수하는 게 목적일까, 아니면 합의금을 뜯어내는 게 목적일까? 알렉스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적정선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만약 합의금을 돈이 아닌 지분으로 원한다면 일정 부분 내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오를 회사다. 때문에 일부러 투자도 받지 않고 상장도 늦추고 있었다.

 이걸 지금 헐값에 파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상대는 사흘의 시간을 제시했다.

 이는 사흘 안에 매각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공격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협상 기한을 정해 압박하는 건 사모펀드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기한 안에 협상에 나선다는 것부터 이미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알렉스는 상대에게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고소와 폭로는 상대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다. 그걸 쓰는 순간 인수협상은 물 건너간다.

 ‘진짜 인수를 원한다면 기한을 넘겨도 어차피 폭로하지 못할 거야.’

 설사 폭로한다고 해도 롤프가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면 그만이다. 어느 쪽이든 그다음부터는 협상의 주도권이 쿨라우드로 넘어오게 된다.

 대응 방안을 생각하던 도중 그는 여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오빠.]

 “오랜만이네.”

 에리카 프레스턴은 다정하게 말했다.

 [바쁜 건 알지만 가끔은 집에도 좀 들러요. 어머니가 걱정하세요.]

 “알았어. 한번 시간 내서 가도록 하지.”

 [지난번에 오빠가 알아봐달라고 했던 한국인 있잖아요.]

 “한미루 말이야?”

 첫 만남에서 위화감을 느낀 알렉스는 가문에 한미루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그가 컨티뉴 캐피탈에 자금을 댄 투자자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평범한 직장인 출신이었다.

 [왜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갖나 궁금했는데,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린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런 걸 보면 오빠는 감이 좋은 모양이에요.]

 그 말에 알렉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감이 좋았다면 롤프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없었겠지.

 “토머스 모터스 사태는 데이비드 록허트가 주도한 것 아니었나? 그가 처음 조사를 시작하고, 리포트를 작성했잖아.”

 [주가 폭락의 결정적 이유는 화안에너지가 협약을 파기하고 지분을 전부 매각한 거였죠. 혹시 화안에너지를 설득한 사람이 한미루가 아닐까요?]

 “한미루가 화안에너지와 무슨 접점이 있다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데이비드 록허트보다는 한미루가 설득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무엇보다 같은 한국인이니 설득하기 좀 더 편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조사하던 과정에서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됐어요.]

 “뭔데?”

 [얼마 전 애틀랜타 공항에서 일어났던 항공기 사고 기억해요? 마크 필립스 상원의원이 비행기에 타고 있었는데.]

 “기억해.”

 미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테러로 인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한 것처럼 오보가 나는 바람에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히며 금융시장까지 출렁거렸으니.

 “그게 지금 얘기와 무슨 상관이야?”

 [들어보면 상관있을 텐데요. 아니면 그만할까요?]

 “아니, 계속해.”

 [알다시피 한 한국인이 이륙 직전 엔진 이상을 발견해 비행기를 회항시켰어요. 덕분에 필립스 상원의원 가족을 포함해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모두가 살았구요. 그게 누구일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맞아요. 한미루예요.]

 알렉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혹시 그가 폭발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은?”

 그녀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농담하는 거예요?]

 상원의원이 타고 있던 비행기다.

 당연히 철저히 조사했을 테고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밝혀내지 못했을 리 없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신기하지 않아요? 운이라고 한다면 엄청난 거겠죠. 대체 어떤 사람인지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전화를 끊은 알렉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상원의원이 탄 비행기를 위기에서 구해냈다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든 일들이 마찬가지다. 상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너무 쉽게 해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떨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롤프를 잘라내는 게 좋겠어.’

 창업자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실리콘밸리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동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신호음이 울린 뒤 롤프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가 신중하고 진지한 성격이라면 롤프는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소리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알렉스는 달래듯 말했다.

 “상황을 해결할 때까지만 나에게 지분을 위임해.”

 지금 롤프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수 없어.]

 “어째서야? 설마 날 못 믿어?”

 [아니.]

 “그럼 나한테 위임해. 설마 그놈들을 직접 상대하고 싶은 건 아니지?”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어.]

 “무슨 말이야?”

 [이미 내 지분을 전부 컨티뉴 캐피탈에 매각했으니까.]

 그 말에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야?”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벌써 지분을 다 매각했다니!

 “대체 얼마에?”

 설마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기로 했나?

 [10억 달러.]

 “······뭐?”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아니면, 그가 잘못 말했거나.

 “얼마라고?”

 [10억 달러에 전부 넘겼어.]

 3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지분이다. 아니, 심지어는 그가 쏟아부은 돈만 9억 달러다. 그런데 그걸 고작 10억 달러에 넘겼다고?

 “어째서?”

 [그렇게 하면 고소와 소송을 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

 사실이 알려져서 망신을 당하느니 헐값에 매각을 택했다는 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명성에 집착하는 거지?

 “그 말을 믿어?”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쿨라우드의 인수.

 이미 권리를 사들인 이상, 미네르바의 개발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니 비밀이 지켜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지분을 전부 넘기다니!

 알렉스는 소리치듯 말했다.

 “젠장! 니가 지금 뭔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차라리 자기 몫이라도 제대로 챙겼다면 이렇게 어이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10억 달러라니!

 [내 지분 내가 처분한 건데 뭐가 잘못이야?]

 본인의 지분을 어떻게 하든 그건 당사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 전에 동업자와 상의를 하는 게 상식이고 예의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는 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솔직하게 말해봐. 날 회사에서 쫓아낼 생각 아니었어?]

 알렉스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설마 저쪽이 한 말에 넘어간 거야?”

 [그럼 아니라고?]

 “······.”

 지금 상황에서 아니라고 해봐야 어차피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분을 팔아넘긴 시점에서 믿든 안 믿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제 와서 계약을 무를 수도 없을 테니.

 알렉스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롤프의 지분은 31.16퍼센트. 전체의 3분의 1도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계약으로 인해 컨티뉴 캐피탈은 가장 중요한 카드를 잃었다.

 ‘고소와 소송을 포기하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알렉스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폭로와 소송으로 인해 미네르바의 사용이 중단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롤프와의 계약으로 인해 고소를 하거나 여론전을 펼치지 못하게 됐다.

 어쨌거나 권리는 저쪽이 있는 만큼 지금처럼 편하게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로열티를 지급하는 정도로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처음부터 돈이 목적이었나?’

 컨티뉴 캐피탈 입장에서도 쿨라우드 지분 31.16퍼센트를 헐값에 사들이고 매출의 일부분을 로열티로 받아간다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롤프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쩔 수 없었어. 시드도 저쪽으로 넘어갔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컨티뉴 캐피탈과 시드가 손을 잡았어. 아니, 생각해보니 어쩌면 애초부터 한편이었을 수도 있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렉스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원래 그의 지분은 38퍼센트, 프레스티지A PE의 지분은 20퍼센트였다. 둘을 합치면 58퍼센트로 확고부동한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시드 루카스의 지분을 늘려주며 그의 지분은 32퍼센트, 프레스티지A PE의 지분은 16.84퍼센트로 낮아졌다.

 둘을 합치면 48.84퍼센트.

 반면 롤프와 시드의 지분을 합치면 51.16퍼센트가 된다.

 애초에 시드와 한편이었다면 롤프의 지분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과반의 지분을 확보해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시드를 빼가려 했던 게 아니었어.’

 그들은 시드를 스카우트할 생각이 없었다.

 진짜 목적은 시드의 지분을 늘리고 자신의 지분을 낮추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회사에서 쫓겨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48.84퍼센트의 지분은 여전히 그의 소유다.

 ‘경영권을 차지하면 내 지분은 인수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미르의 무단 사용에 대해 고소와 소송은 피하더라도 로열티 협상은 해야 한다.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이 쿨라우드 경영권을 장악하면?

 그땐 로열티를 멋대로 책정하는 게 가능하다.

 쿨라우드의 기업 가치가 높은 건 자산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벌어들일 엄청난 수익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수익을 전부 컨티뉴 캐피탈이 빼간다면?

 당연히 기업 가치는 곤두박질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결국 지분을 매각하는 수밖에 없다.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감이 들었다.

 ‘이럴 수가! 처음부터 이걸 계획하고 있었던 건가?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수를 둔 거지?’

 손 쓸 틈도 없이 완전히 당했다.

 진실을 깨달은 알렉스는 실소를 흘렸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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