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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이게 말이 되나? (2) (89/529)

 90화. 이게 말이 되나? (2)

 성윤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유성전자는 기업의 전략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벌였다. 그런데 그게 한미루 때문이라니!

 [미루 씨 한국에 돌아오면 같이 식사 한번 하죠. 밥은 미루 씨가 산다고 했으니 비싼 거 얻어먹어야겠네요.]

 그 말에 성윤아는 당황했다.

 “미루 씨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아직 미국에 있겠군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연락이 왔으니까요.]

 “그, 그래요?”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꽤 재밌는 일을 하고 있던데.]

 “재밌는 일이요?”

 [혹시 못 들으셨나요?]

 “예······.”

 연락도 안 되는데 들었을 리가 있나?

 [그럼 직접 들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핸드폰이 꺼져있는 것 같던데.”

 [아! 지난번에는 미국 번호로 연락왔었네요. 그 번호 알려드릴 테니 전화해보세요. 그러면 받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성윤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유재호 회장님과는 그동안 꾸준히 연락하면서 나한테는 연락도 없었다는 거지?’

 사실 꾸준히 연락한 건 아니고 필요할 때 연락한 거였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뭐랄까?

 친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를 소개시켜줬더니 자기만 빼고 둘이서 놀러 갔다는 얘기를 들은 느낌이랄까?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유재호 회장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예요.”

 [아! 윤아 씨. 어쩐 일이에요?]

 목소리를 들으니 그동안 걱정한 게 바보짓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제가 얼마나 걱정······.”

 [예? 얼마나 뭐라구요?]

 성윤아는 재빨리 다른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핸드폰은 왜 꺼놓은 거예요?”

 [정신이 없어서 충전하는 걸 깜빡했나봐요. 딱히 연락 올 데가 없기도 했고.]

 “금발 미녀들과 노느라 꺼놓은 건 아니구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성윤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구요?”

 [농담이에요.]

 어쨌거나 별일 없었다니 안심이 좀 된다.

 “칫! 아직도 미국이에요?”

 [예.]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이거저거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유재호 회장님께서 알려주셨어요.”

 [아! 그랬군요.]

 “회장님께 들으니 미국에서 재밌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런 말도 했어요?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닌데.]

 “무슨 일인데요?”

 [다음에 말해줄게요.]

 “뭐예요? 설마 회장님께는 말해주고 저한테는 말 안 해주는 거예요? 역시 저만 빼고 둘이 친해진 모양이네요.”

 그러자 한미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실 미국에서 아는 사람이랑 회사를 하나 차렸어요.]

 “무슨 회사예요?”

 [그냥 작은 투자회사예요.]

 “이름은요?

 [컨티뉴 캐피탈이요.]

 “컨티뉴 캐피탈이면······.”

 어째 이름이 좀 익숙하다. 아니, 많이 익숙하다.

 잠시 회사명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컨티뉴 캐피탈이요? 설마 이번에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린 그 컨티뉴 캐피탈은 아니죠?”

 [맞아요.]

 “뭐라구요!?”

 성윤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 잠깐. 그럼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린 게 미루 씨였어요?”

 [그건 데이비드 록허트가 한 거죠. 전 옆에서 좀 거들었구요.]

 “아무튼 미루 씨도 관련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토머스 모터스 폭락은 증시를 뒤흔들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프리머스 사태는 비교도 안 된다. 금액만 놓고 봐도 프리머스 사태는 고작(?) 1조 원이지만, 토머스 모터스는 시총이 40조가 넘었으니.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의 리포트로 인해 그중 30조가 넘게 증발했다.

 “마, 말도 안 돼. 컨티뉴 캐피탈이 미루 씨가 만든 회사였다니.”

 [대표는 데이비드 록허트죠. 전 그냥 옆에서 돕고 있을 뿐이에요.]

 느낌상 그냥 돕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컨티뉴 캐피탈 공매도로 엄청 벌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엄청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벌었어요.]

 “······.”

 그 ‘적당히’가 과연 얼마일까?

 모르긴 몰라도 수십억 달러는 될 것 같은데.

 [아! 당분간은 비밀로 해줘요.]

 “아, 알았어요.”

 하긴, 이게 알려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언제 돌아와요?”

 [아마 다음 주쯤 돌아갈 것 같아요.]

 “아직도 일이 남았어요?”

 [이제 거의 끝났어요.]

 성윤아는 괜히 심통이 생겨서 말했다.

 “올 때 선물 사와요.”

 [예?]

 “설마 여행 갔는데 제 선물도 안 사올 건 아니죠?”

 [그, 그럴 리가요. 당연히 사갈 생각이었어요.]

 그 말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선물인지 기대할게요.”

 [예. 돌아가면 연락할게요.]

 성윤아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컨티뉴 캐피탈을 미루 씨가 만든 거라고? 그리고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렸고? 불과 얼마 전까지 신입사원이었던 사람이?’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말이 되나?”

 * * *

 데이비드가 물었다.

 “한국에서 전화가 온 모양이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데이비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한국어로 대화하셨으니까요.”

 “그렇군요.”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내일 어떻게 할지에 대한 회의는 이미 끝났다. 시간이 늦었지만 이대로 자기는 왠지 좀 아쉽다.

 술이라도 마실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데이비드가 물었다.

 “술 한잔하러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우리는 옷을 챙겨 입고 호텔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계속 같이 다녔지만 둘이서 술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펍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중앙에는 당구대가 있고, 한쪽에는 다트 기계가 있다. 그리고 테이블 미식축구도 있다. 다들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노는 분위기였다.

 여러 인종과 남녀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나이는 주로 20, 30대고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았다.

 실리콘밸리 한복판이다 보니 대부분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이들로 보였다. 개중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창업 아이디어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다들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과거 사업은 돈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이제는 누구든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렸다.

 IT 공룡들의 독과점은 심화되는 중이지만 오히려 창업하는 기업들의 숫자는 지금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는 그만큼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청년들이 창업에 도전 중이다. 내가 회귀를 했다고 해도 모든 기업들과 창업자들 얼굴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미래라고 해봐야 10년 후.

 어쩌면 정말로 여기 술집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엄청난 기업을 만들어낼지도 모르지.

 “전 저 나이 때 뭐했는지 모르겠네요.”

 “뭘 하셨습니까?”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음, 군대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한국 남자들은 군대도 좋은 경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게라도 합리화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따지면, 죄 없이 강제로 감방에 다녀와도 좋은 경험 아니겠어요?”

 군대를 안 갔으면 100배는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상 군대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좋은 경험 한 번 더 하라고 한다면, 바로 멱살을 움켜잡을 것이다.

 “아! 어제 협상할 때 보니 잘하시던데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때로는 설득보다 윽박지르는 게 효과적이죠. 그대로 가만히 놔뒀다면 계속 망설이며 선택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건가요?”

 “300억 달러가 넘는 지분을 고작 10억에 넘기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매각하지 않을 경우에 감당해야 할 고소와 대중들의 비난은 감당할 자신이 없고.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을 테니 차라리 강요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사인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좀 되네요.”

 “뭐, 좀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가 천재고 뛰어난 개발자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명예에 집착하는 사기꾼이었죠.”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그가 그렇게 명예에 집착하는 게요?”

 “아니요. 그걸 한눈에 알아챈 걸 말하는 겁니다. 처음 조사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사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롤프가 관심과 주목을 즐기고 명예욕이 강한 성격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심한지는 알렉스조차 몰랐다. 어쩌면 본인도 모르고 있었을 수 있다.

 만약 1회차 때 그가 얼마나 추하게 굴었는지를 보지 않았다면 나도 잘 몰랐겠지.

 롤프는 처음에는 자신이 개발했다고 우기다가 나중에 소송을 통해 증거가 공개되자, 제이슨 킴과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말을 바꿨다.

 그것도 거짓으로 밝혀지자 나중에는 자신이 제이슨 킴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기에 미미르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든 미미르 개발과 자신이 연관이 있다고 끝없이 우겼다. 물론 시드는 이런 주장을 일축하며 그를 얼간이 취급했지만.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는 롤프도 이들처럼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이 있었겠네요.”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창업을 했을 때만 해도 꿈 많은 청년이었을지 모르죠.”

 돈과 성공이란 사람을 바꿔놓기 마련이지.

 비록 안 좋은 쪽이긴 해도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전 세계 사람들의 미래를 바꿔놓을 기업을 창업했으니까.

 데이비드는 술을 마시며 물었다.

 “어째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그야 당연히 그가 미래에 뛰어난 투자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

 “데이비드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꼭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침 빅토리 인베스트먼트가 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잘됐다 싶었죠.”

 데이비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그렇게 유명했습니까?”

 난 웃음을 지었다.

 “저한테는요.”

 사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서 일했을 때는 이름이 알려지긴 했어도 그렇게 유명하진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건 샤크 매니지먼트에서 일하면서부터.

 1회차 때 내가 알던 그는 세계적으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투자자였다. 특히 그는 M&A의 귀재로 명성을 떨쳤다.

 보통 M&A라고 하면 인수까지만 주목받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 뒤가 더 중요하다. 인수 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업 가치가 오르냐 떨어지느냐가 결정되니까,

 데이비드는 인수 대상 기업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최대한 싼 가격에 인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조조정, 매각, 합병, 기업분할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가치를 끌어올려 재매각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가 인수한 기업들은 보통 3년 안에 기업 가치가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이러니 투자자들이 돈을 싸들고 달려들 수밖에.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좋게 말하면 행동주의 투자자, 나쁘게 말하면 기업사냥꾼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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