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이사 (1)
강남역의 한 카페.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직장인들로 붐볐다. 난 안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앉아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입고 있는 옷은 슬랙스에 스프라이트 오버핏 셔츠. 여전히 작고 귀여운 얼굴이다. 평소 단정하게 묶고 다니던 머리는 풀어헤쳤고, 평소에는 하지 않던 목걸이와 귀걸이를 했다.
워낙 미인이다 보니 주위에 있는 남자들은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중 한 남자가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허리를 쫙 펴고 자신 있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아까 들어오실 때부터 봤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그 순간, 그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예요, 미루 씨.”
난 자리로 다가갔다.
그러자 말을 건넸던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드는군.
“오랜만이에요, 윤아 씨.”
성윤아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몇 달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은데. 혹시 화장을 다르게 해서 그런가?
“미국은 잘 다녀왔어요?”
“예.”
“잠깐 갈 것처럼 말해놓고 왜 그렇게 오래 있었어요?”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관광비자로 갔는데 관광은커녕 일만 실컷 하고 돌아왔다.
“잠시만요. 주문부터 할게요. 뭐 드실래요?”
“전 아메리카노요.”
“따뜻한 거요?”
“예.”
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요즘 회사는 어때요?”
“똑같죠, 뭐.”
“이번에 유성증권 컨소시엄에 참여한다는 기사 봤어요.”
“유재호 회장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이에요.”
“잘됐네요.”
해외 인프라 사업 인수 금액으로는 최대 규모다 보니 여기저기서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왔다.
DA증권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홍보 효과를 누렸다.
총 인수금은 약 7천억 원인데 그중 DA증권이 1천억 원을 부담한다. 이를 위해 새로 펀드를 출시했다.
사실상 유성증권이 보증을 서는 거나 다름없는 만큼, 펀드는 출시와 동시에 완판됐다. 그 덕분인지 주가도 다시 프리머스 사태 이전으로 회복했다.
이번에는 성윤아가 물었다.
“정말로 컨티뉴 캐피탈이 쿨라우드를 인수한 거예요?”
“알고 있네요.”
“저도 기사 봤으니까요.”
금융계에서는 나름 큰 이슈였지만 아무래도 B2B 기업이다 보니 일반인들과 관심은 좀 덜했다.
롤프 부치의 사기 행각에 좀 묻히기도 했고.
참고로 란진 쿠마르는 월스트리트타임즈뿐 아니라 여러 언론사들과 인터뷰하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최선을 다해 롤프를 비난했다.
어지간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쿨라우드에 투자하려던 투자사들이 한둘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인수했어요?”
세계 최대 사모펀드인 레드스톤, 에런 베이커 회장의 화이트로드, 테마섹 같은 국부펀드들도 여러 차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름도 잘 모를 신생 사모펀드가 인수에 성공한 것이다.
“록허트 대표가 잘한 덕분이죠.”
“기업가치가 1천억 달러라던데.”
“에이, 그거야 사람들이 멋대로 부르는 거죠.”
비상장회사는 가치평가가 쉽지 않다.
쿨라우드 역시 적게는 300억 달러에서 많게는 1000억 달러까지 평가액이 천차만별이었다. 블루펄에서 기업가치를 1천억 달러로 잡고 투자하려 했다지만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고.
“그리고 창업자들도 떠났잖아요.”
창업자인 롤프 부치와 알렉스 프레스턴이 회사를 떠난 만큼 시장에서는 쿨라우드 가치를 이전의 절반 이하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성장성이 사라지며 조만간 망할 거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아직은 시드의 천재성이 알려지기 전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런데 인수에 필요한 돈은 어디서 난 거예요? 컨티뉴 캐피탈 뒤에 다른 자본이 있다는 게 사실이에요?”
인수는 발표했지만 정확히 몇 퍼센트의 지분을 얼마에 사들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적어도 수백억 달러의 거래로 추정되는 만큼 금융가에서는 컨티뉴 캐피탈 뒤에 다른 자본이 있고, 그 자본이 인수 주체일 거라고 판단했다.
“계약만 했지 아직 절차가 다 끝난 건 아니에요. 현재 진행형이죠.”
당장 6개월 안에 80억 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면 계약은 무산된다. 계약금 40억 달러를 날리고 지분 31.16퍼센트를 확보한 걸로 만족해야겠지. 그나마 그중 10퍼센트는 이미 시드에게 넘겨서 실제로는 21.16퍼센트다.
“그래도 컨티뉴 캐피탈이 DA금융그룹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거 아니에요?”
“흠, 그런가요?”
“쿨라우드 하나만 해도 한국 재계 순위 10위 안에 가볍게 들어갈 텐데.”
하기야 재계 6위인 화안그룹 시총이 대략 70조 원이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 재계 5위는 MKK파트너스잖아요.”
MKK파트너스는 강명국 회장이 칼나인 그룹을 나와서 만든 한국계 사모펀드.
그동안 매각한 기업들을 제외하고 현재 인수한 기업들 시총만 다 합쳐도 가뿐하게 재계 5위에 랭크된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모펀드다. 그야말로 한국 금융계에 살아있는 신화랄까?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요. 회사 그만두고 나간 게 엊그제 같은데 몇 달 만에 그렇게 엄청난 성과를 이루다니. 그 정도로 돈을 벌면 기분이 어때요?”
“글쎄요. 딱히 실감은 안 나요.”
그래도 다루는 돈 액수가 달라지는 걸 보면 재밌긴 하다.
성윤아는 나를 보며 물었다.
“그동안 연락은 왜 잘 안 했어요?”
난 웃음을 지었다.
“정신이 좀 없었어요.”
실제로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제 선물은 어디 있어요?”
“아!”
성윤아는 눈을 치켜떴다.
“뭐예요? 아무것도 안 사온 거예요?”
“그럴 리가요.”
난 화구통을 건네줬다.
“선물이에요.”
“이게 뭐예요?”
“한번 보세요.”
그녀는 화구통을 열어 그림을 꺼내보았다.
“그림이네요.”
“예. 마음에 들어요?”
별로 안 좋아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매우 기뻐했다.
“그럼요. 저 그림 좋아해요. 어디서 산 건데요?”
“센트럴파크 노점에서요.”
“헤에, 왠지 랭크시 그림 같은 느낌이네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예? 무슨 말이에요?”
“그거 랭크시 그림 맞아요.”
내 말에 성윤아는 웃음을 지었다.
“농담하지 마요.”
“진짜예요.”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성윤아는 잠시 그림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랭크시 그림이라구요?”
“예.”
“이걸 어디서 났어요?”
“센트럴파크 노점에서 샀어요.”
“그런······.”
말을 하던 그녀는 뭔가를 눈치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설마 센트럴파크에서 랭크시 그림을 몽땅 샀다는 미스터 한이 미루 씨였어요?”
“투윗 봤어요?”
“그럼요. 뉴스에까지 나왔는데.”
성윤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난 대충 둘러댔다.
“그냥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저도 투윗 보고 알았어요.”
“그래도 좋은 그림이라는 걸 알아봤다는 거잖아요. 정작 화상이라는 사람은 선도 제대로 못 그었다며 비평했다던데.”
“운이 좋았죠.”
그림을 산 건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덕분에 다른 그림도 살 수 있었고.
잠시 멍하니 그림을 보던 그녀는 이내 놀란 듯 말했다.
“자, 잠깐. 그럼 이거 한 장에 50만 달러도 넘는 거 아니에요?”
“아마 그렇겠죠?”
“이렇게 비싼 걸 선물로 줘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
그동안 도움받은 게 많으니 별로 아깝지는 않다. 내가 산 가격은 고작 60달러기도 하고.
선우와 성윤아에게 한 장씩 나눠줬는데도 아직 10장이나 남았다. 이것만 해도 500만 달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얘기를 하는 사이 커피를 다 마셨다.
“오늘 집 알아볼 거라고 했죠?
“예. 지금 사는 집이 좀 작아서 이사를 하려구요.”
“어디로 가게요?”
“친구가 당분간 판교로 출퇴근해야 하니 이 주변으로요. 넓고 깨끗하면 좋겠네요.”
“집을 사려는 거예요?”
“당연히 월세죠.”
“월세는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회사 명의로 빌릴 거라서. 좋은 데 살아보려구요.”
그 회사가 내 회사이긴 하지만.
성윤아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의외네요. 미루 씨는 투자에만 관심 있지, 그런 건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거야······.”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었기 때문이지.
투자자는 현재의 돈을 미래가치로 환산하는 경향이 있다.
수중에 1억이 있으면 이 돈으로 나중에 10억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 돈을 최대한 아끼며 검소하게 살기도 한다.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투자자라 할 수 있는 화이트로드의 에런 베이커 회장의 경우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지만, 정작 본인은 신혼 때 산 소박한 2층 집(현재 50만 달러)에서 살며 10년도 넘은 일본산 소형차를 몰고 다니고, 아침으로 맥모닝을 먹는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기왕 회귀했으니 그동안 못 해본 것들 다 해보며 살 생각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사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어야지.
돈이야 어차피 벌면 그만 아니겠나?
성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부동산 소개해 줄까요?”
“혹시 아는데 있어요?”
“고가의 매물만 취급하는 곳이 있어요. 친구가 얼마 전 거기서 집을 구했다고 하니 한번 물어볼게요.”
일일이 부동산중개소 돌아다니기 귀찮았는데 마침 잘 됐다.
“그럼 부탁할게요.”
* * *
점심을 먹은 후.
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4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은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GN부동산 컨설팅의 김희준 매니저입니다.”
그동안 높은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봤는지,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복장과 태도가 정중하다.
내가 조건을 말해주자 그는 태블릿으로 그에 맞는 매물을 몇 개 보여주었다.
“이중 바로 입주 가능한 곳이 어디인가요?”
“여기는 어떠신가요? 오늘 바로 입주가 가능합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제법 마음에 든다.
“지금 한번 보러 가죠.”
우리는 중개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청담동 한강변에 위치한 고급빌라.
현관문을 중심으로 구역이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복층구조라 층고가 높고 2층에도 방이 있다.
사람 키 두 배 높이의 창밖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월세는 어떻게 되나요?”
“보증금 2억에 월세는 부가세 포함해서 1650만 원입니다.”
“적당하네요.”
지금 사는 집에 비해 열 배 이상 비싸다. 하지만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궁궐이나 다름없다.
위치도 좋고, 전망도 좋다. 어차피 월세니 일단 살아보고 마음에 안 들면 옮기면 그만이다.
부동산은 자산이다. 좋은 집을 사놓고 있으면 가격이 오른다. 거주와 투자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월세는 쓰면 사라지는 돈이다.
때문에 부자들은 집이 필요하면 구매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좀 다르다. 집값이 오르는 것 이상으로 훨씬 크게 벌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에 거액을 넣어놓는 게 손해다.
“계약하죠. 바로 이사차 불러주실 수 있나요?”
중개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