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경영권 분쟁 (1)
허민웅은 재빨리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형이야.”
[형이 누구예요?]
“뭐야? 형 번호 저장 안 해놨어? 자꾸 이러면 형 섭섭해.”
허민웅은 은근슬쩍 자신이 형이라는 사실을 계속 어필했다. 상대는 지적하기도 귀찮은지 그냥 넘어갔다.
[누군지 알겠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
[별일 없이 지내고 있어요.]
“별일 없기는. 지금 뉴스 보니까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더만. 설마 저게 별일 아니라는 거야?”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아니, 이런 일이 있으면 형한테 미리 좀 말하지 그랬어?”
[이게 허민웅 씨랑 관계가 있나요?]
“몰라서 물어? 누가 봐도 관계가 있어 보이잖아.”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정그룹 장녀 주혜진은 화안그룹 장남 허민홍과 결혼했다. 그러니 그에게는 형수네 집안 일인 셈이다.
“만나서 얘기하자. 지금 시간 돼?”
[지금은 좀 힘들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알았어. 꼭 연락해.”
한미루가 개입한 이상, 이 상황이 적당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좋겠지.’
* * *
한미루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뒤.
유재호 회장은 사우디뿐 아니라 중동 쪽 인맥을 총동원해서 라시드 왕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사우디는 전제군주제의 특성상 모든 주요직에 왕족들이 앉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왕과 왕세자의 측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무능력한 사람이 수장에 앉으면 실제 조직은 2인자에 의해 굴러가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국가든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상당수 장관들은 그저 얼굴마담 역할만 하고 있고, 실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실무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라시드 왕자의 사람이라는 건가요?”
김지석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조사를 해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군부 쪽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는 돈과 군대.
돈줄에 이어서 군부까지 틀어쥐었다면 뭘 노리고 있는 건지는 뻔하다.
그가 지금처럼 막후의 권력자로 남을지, 아니면 훗날 전면에 나설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걸 다들 모르고 있었단 말이군요.”
“정확히는 알면서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라시드 왕자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방한했을 때 보여준 모습만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앞으로 나서거나 발언한 적이 없었다. 그저 왕세자를 보필할 뿐이었다.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숨기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유재호 회장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왠지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빚이 생기는 느낌이로군.’
이런 빚이라면 기꺼이 환영이다.
한미루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생각하는데 컨티뉴 캐피탈과 관련한 기사가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한정그룹 합병과 경영권 승계에 관한 얘기는 여러 차례 들었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컨티뉴 캐피탈이 등장한 것이다!
그 기사를 본 유재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토머스 모터스 사태를 터트리고,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한국에서 재벌그룹을 집어삼키겠다고 나설 줄이야.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행보다.
유재호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 * *
허민웅과 통화가 끝나자 또 다른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름 아닌 유성그룹 회장이다. 오늘따라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구나.
“안녕하세요, 회장님.”
유재호 회장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고 계시나 했더니 재밌는 일을 하고 계셨군요.]
“기사 보셨나요?”
[네. 설마 한정그룹에도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쪽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주식을 매수하지는 않았을 테고. 경영권을 빼앗을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쪽이 제 지분의 가치를 얼마로 쳐주느냐에 달렸겠죠.”
[한국에서 재벌그룹을 먹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모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야 주목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10대 그룹 경영권이 걸려있는 문제인데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10대 그룹 안에 묶여도 유성그룹과 한정그룹은 시총 규모가 20배 가까이 차이 난다.
한정그룹 크기라고 해봐야 유성그룹 계열사 하나 크기만도 못하다.
[아! 그런데 혹시 성윤아 씨에게는 미리 얘기했나요?]
“아니요. 그렇진 않았는데요.”
[기사 보고 알았으면 서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굳이 서운하고 말고 할 게 있나?
[지금이라도 연락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성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윤아 씨. 지금 일하는 중이겠네요.”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기사 보고 있어요. 또 저만 몰랐겠네요.]
“그렇진 않아요. 이게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라서요. 사실 진작 말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혹시 유재호 회장님은 알고 계셨던 거 아니구요?]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방금 깜짝 놀라서 전화 주시던데요. "
그 말에 기분이 좀 풀렸는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하긴. 미리 새나갔으면 안 되긴 했겠네요.]
“그쪽 분위기는 어때요?”
[난리 났죠. 한정물산은 폭등하고 HJ로직스는 폭락하고, 그 외 한정그룹 계열사들은 주가가 널뛰기하고 있는 중이구요.]
실제로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탄식이 터져 나오는 중이다.
이럴 때 아래에서 사서 위에서 잘만 팔면 매매 한 번에 50퍼센트를 버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위에서 사서 아래에서 팔면 한 방에 마이너스 50퍼센트를 찍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 주식시장이 이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왜 하필 한정그룹이 타깃인 거예요?]
이유야 당연히 돈이 되기 때문.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난 농담처럼 말했다
“그냥 그날 주현진 씨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뭐가요?]
“윤아 씨한테 괜히 찝적거리는 것도 그렇고.”
[그, 그럼 설마 저 때문에······.]
난 웃으며 말했다.
“물론 농담······.”
[저, 저 이만 일하러 가볼게요.]
농담이었다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난 잠시 핸드폰을 보며 생각했다.
으음, 설마 괜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 * *
한정그룹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기자회견장에서 쓰러진 주민재 회장은 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의사가 바로 조치한 덕분에 위험한 상황은 피했지만 한동안은 병상에 누워있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철진 부회장은 호통을 치듯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박운용 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저놈들은 대체 언제 매수를 한 겁니까?”
합병안 발표 후 매수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는 건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매입을 끝냈다는 얘기다.
즉, 시장에는 처음부터 9.2퍼센트만큼의 물량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거래량이 그렇게 적었구나.’
“어떻게 9.2퍼센트를 매수할 때까지 아무도 모를 수 있습니까?”
“엘리언트처럼 지분을 파킹하는 수법을 쓴 모양입니다.”
법에 따라 보유 지분이 5퍼센트를 넘으면 바로 공시해야 한다. 9.2퍼센트인 시점에서 공시가 나왔다는 건 편법을 썼다는 얘기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 지분에 경영권이 흔들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양자연합과 대결을 벌이는 중이고, 합병 실패로 인해 타격을 입은 상태다.
한마디로 가장 약해진 시점에서 기습을 당한 셈이다.
‘아니, 가장 약해진 시점을 노려 기습을 한 거겠지.’
이제 합병은 문제도 아니었다.
잘못했다가는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말을 하지 않을 뿐,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헤지펀드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해도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주철진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세요.”
박운용 실장은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 *
김성권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 판에 뛰어들었을 줄이야.”
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것은 KSGI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래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다른 세력이 분쟁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매수를 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한정그룹조차도 엘리언트와 KSGI가 손잡고 합병 반대에 나설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말이다.
정말이지 놀랍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그냥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는 건가?’
그는 주로 첫인상으로 상대를 파악했고, 그건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뛰어난 투자자에게는 특유의 기세 같은 것이 있다. 그런데 한미루를 만났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이질감이었다.
실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옆에 두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취업을 제안한 것 역시 농담이 아닌 진담이었다.
‘거절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설마 컨티뉴 캐피탈 쪽 사람이었을 줄이야.
김성권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전화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성권은 쓸데없는 질문은 건너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제가 일하고 있는 곳입니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목적은 뭡니까?”
[짐작하고 계신 대로입니다.]
“한정물산의 경영권을 빼앗는 것입니까?”
[네.]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요. 국내 재벌그룹을 상대로 한 적대적 M&A는 이제까지 성공한 사례가 없고, 앞으로도 힘들 걸로 예상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국민연금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국민연금은 한국의 거의 모든 대기업의 최대주주나 다름없다. 그리고 국민연금은 대체로 재벌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요?]
현재 국민연금은 부정청탁 의혹으로 손발이 묶인 상황.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못 하는 상황에선 45퍼센트만 확보해도 경영권을 빼앗을 수 있다.
현재 양자연합이 확보한 표는 약 19.1퍼센트. 컨티뉴 캐피탈의 지분을 더하면 28.3퍼센트로 올라간다.
‘여기에 소액주주들과 이탈표를 더한다면?’
처음 KSGI의 목적은 합병을 막고 경영 참여를 통해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거였다. 하지만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정물산은 한정그룹의 지주회사.
한정물산 경영권만 얻으면 그룹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대한민국 10대 그룹을 상대로 하는 적대적 M&A가 성공한다면 사모펀드의 역사를 새로 쓰는 셈이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의 등장 덕분에 상황이 달라졌다.
김성권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말했다.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