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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경영권 분쟁 (5) (135/529)

 138화. 경영권 분쟁 (5)

 합병 실패, 주민재 회장의 은퇴 선언과 기자회견장에서 실신, 컨티뉴 캐피탈의 보유 공시 등등.

 여러 악재가 겹치며 한정그룹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진짜 초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합병은 취소됐어도 주주총회는 예정대로 열릴 예정이었다. 합병 외에도 이사 선임 등 다른 안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합병 취소 이후에도 별다른 입장표명이 없던 KSGI 김성권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성권 대표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합병은 총수일가의 경영권 세습을 위한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무리수였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총수일가가 그룹을 주주들의 것이 아닌 사유재산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애초에 횡령과 배임으로 주주들의 자산에 큰 피해를 끼친 이사들이 여전히 이사회에 남아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엄단을 촉구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주총에서 사내이사의 자격조건을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로 할 것을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기업의 주인은 회장이나 그 일가가 아닌 주주입니다. KSGI는 주주들의 권익을 위해서 앞으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겠습니다.”

 발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현재 주민재 회장은 집행유예 중이고, 주철진 부회장은 재판을 진행 중이다. 따라서 김성권 대표의 이 발언은 총수일가를 회사에서 내쫓겠다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는 엘리언트 역시 동조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경영자의 윤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범죄전력이 있는 경영자가 경영에서 배제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합병 찬성과 반대로 시작된 분쟁은 이제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판이 커졌다.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특종으로 보도했고, 한정물산 주가는 또다시 폭등했다.

 [김성권 대표, 한정그룹 총수일가를 경영에서 배제하겠다고 공식 선언!]

 [한정그룹을 상대로 한 헤지펀드들의 적대적 M&A 공식화]

 [한정물산 주가 15만 원 돌파! 어디까지 오르나?]

 [재계, 적대적 M&A에 대해 큰 우려 나타내. 정부의 대책 요구]

 이전이었다면 언론들은 한정그룹 편을 들며 사모펀드를 투기자본으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론이 들끓고 있는 만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발표가 나가자마자 주가는 폭등했고 소액주주들이 모인 게시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와! 합병 취소로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시작이었네.

 -조낸 흥미진진하다~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정말로 경영권을 빼앗는 거 아니야?

 -ㅋㅋㅋ 편법으로 자식에게 경영권 승계하려다가 기업을 통째로 빼앗기게 생겼네.

 -웃을 일이 아닙니다. KSGI고 엘리언트고 돈밖에 모르는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이 경영권 잡으면 뭔 짓을 할지 모릅니다.

 -뭔 짓을 하는데?

 -사내유보금으로 자사주 매입해서 소각하고, 비핵심자산 매각하고, 다른 계열사 상장시켜서 자금 확보하고, 그렇게 배당 늘리고 주가 최대한 끌어 올린 다음 팔고 나갈 겁니다.

 -잠깐. 그럼 주주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닌가?

 -ㅋㅋㅋ 상식적으로 저게 가능하겠냐?

 -합병도 부결시켰는데 안 될 게 뭐임?

 -합병 반대를 위해서는 3분의 1 이상만 확보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사 선임이나 해고를 위해서는 2분의 1 이상을 확보해야 합니다.

 -아! 그럼 안 되겠는데. 50퍼센트를 어떻게 확보해?

 -그래도 국민연금이랑 주총 미참석표 빼면, 40퍼센트만 확보해도 킹능성 있음~

 -그러니까 40퍼센트를 어떻게 확보하냐고. 장난하냐?

 -누가 이기든 내 주식만 오르면 좋겠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래야 주가가 떡상한다!

 -지금이라도 담그는 게 좋을까요?

 -여기 물 온도 좋습니다. 날래날래 들어오시오~

 -20만 원 가즈아!

 * * *

 성수동의 한 주상복합건물.

 집에 돌아온 사라는 씻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혼자 살기에 지나치게 넓은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살다 보니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물끄러미 한강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을 확인한 사라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전화를 건 사람은 라시드 왕자.

 두 사람은 사촌 관계지만, 실제로는 친남매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라시드의 형제자매들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얼굴과 이름도 잘 모른다.

 심지어는 친어머니에게 나온 형제자매들조차도 사라만큼은 가깝지 않았다.

 [한정그룹 분쟁을 놓고 한국이 시끌시끌하군. 오영환 대통령 입장도 꽤나 곤란해진 모양이고.]

 사라는 놀란 듯 물었다.

 “설마 신경 쓰고 있었어요?”

 [1억 5천만 달러나 투자했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 있나?]

 라시드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1억 5천만 달러면 있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아쉬운 금액은 아니다.

 어차피 나랏돈이니 설사 전액 손실이 나더라도 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신경 쓰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겠지?’

 [일은 어때?]

 사라는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밌어요.”

 에이오일에서 일하며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사우디 국부펀드 쪽으로 이직을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라시드가 한미루를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얘기만 들었을 땐 왠지 사기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말만 번드르르한 사기꾼들을 여럿 봤었고.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뭘 하려나 했더니 설마 한국 10대 그룹 중 한 곳의 경영권을 빼앗으려 할 줄이야.]

 “저도 놀라워요. 처음에는 단지 합병안을 막는 게 목표인 줄 알았는데.”

 이게 가능할 거라고는 KSGI와 엘리언트조차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미루는 정치권까지 들쑤셔 놓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로 판이 커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가 앞으로 뭘 할지,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라시드 왕자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그의 사촌여동생이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흥미를 갖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마련해둔 자리는 어떻게 할까?]

 그녀는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게요. 당분간은 한국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 * *

 계약서는 한글과 영문 두 부로 작성됐다.

 한글로 된 계약서는 꼼꼼하게 읽어보았고, 영문으로 된 계약서는 데이비드에게 보내 확인을 거쳤다.

 양쪽 다 전자결제로 사인을 했고, 이제 한 팀이 되었다.

 [(속보) 컨티뉴 캐피탈, KSGI와 엘리언트와 손잡아]

 [삼자연합 형성. 지분 28.2퍼센트.]

 [해외자본들의 국내 기업 경영권 위협.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하나?]

 [전경련, 정부의 대책 촉구]

 [전문가들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 요구]

 한정그룹은 즉시 기업사냥꾼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정치권과 여론에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대해 김성권 대표는 연일 보도자료를 내며 한정그룹 총수일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주식회사는 주주의 이익이 우선돼야 합니다. 이는 상식입니다.”

 이에 한정그룹 측 역시 반격에 나섰다.

 “주주환원을 위해 올해부터 배당성향을 60퍼센트까지 끌어올리겠습니다. 또한 비핵심자산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활용하겠습니다. 한정물산은 앞으로도 주주가치 재고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마치 누가 더 많이 퍼주나 대결을 보는 듯했다.

 주주들은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주철지니~ 이제까지 주주들 개똥으로 알다가 이제 정신 차렸네.

 -그동안 총수일가끼리 헤쳐 먹다가 빼앗길 것 같으니 갑자기 잘해줌.

 -개새끼들 ㅋㅋㅋ

 -이래서 시장경제에는 경쟁이 필요하다니까.

 -아담 스미스 의문의 1승!

 -이러면 주철진 찍어줄 만하지 않나?

 -저거 얼마나 가것냐?

 -지금이야 저러지만 주총 끝나면 입 싹 씻을걸.

 -안 돼. 돌아가. 니들 편들어 줄 생각 없어.

 -레알~ 재벌은 믿는 게 아니다.

 -그럼 뭐 성궈니는 약속 지킬 줄 아나?

 -사기꾼이나 투기꾼이나 도찐개찐이지.

 -적당히 올랐을 때 팔고 나가는 사람이 승자임.

 * * *

 대통령 집무실.

 상황을 전달받은 오영환 대통령은 실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놈이 컨티뉴 캐피탈 대리인이라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 확실히 알 것 같다. 다름 아닌 멋대로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폭로해 금감원을 곤경에 빠트렸던 놈이다.

 그런데 그놈이 컨티뉴 캐피탈의 대리인이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놈들이 K문화재단의 일을 언론에 알린 게 분명해.’

 처음부터 KSGI과 엘리언트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처음부터 국민연금 찬성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정그룹과 K문화재단의 거래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진작 협상 카드로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컨티뉴 캐피탈이 벌인 일이라는 거지.’

 당연하지만 얼마 전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한미루가 그런 엄청난 정보를 입수했을 리는 없다.

 정보와 자본을 다루는 존재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다.

 다행히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의심이 많았다. K문화재단과 한정그룹의 관계는 밝혀낼 수 있어도, K문화재단과 자신의 관계를 입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번 일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뒤에 있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오영환 대통령은 한미루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애송이는 조금만 압박하면 아는 걸 다 말하겠지.’

 * * *

 난 생각도 정리할 겸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빠지면 90퍼센트. 이중 주총 참가표 비율을 80~90퍼센트로 계산하면, 실제 유효표는 70~80 정도다.

 이중 과반을 확보하면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다.

 엘리언트 매니지먼트 11.4퍼센트, KSGI 7.7퍼센트, 컨티뉴 캐피탈 9.2퍼센트.

 합치면 28.3퍼센트.

 여기에 외국계 주주들과 소액주주들 표를 더하면······.

 “좀 아슬아슬한데.”

 저쪽도 목숨이 걸려있는 일인 만큼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어에 나설 것이다. 아직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다.

 다행히 쓸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한미루 씨죠?”

 “그런데요.”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남자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편한 복장에 등산화를 신었고, 머리가 살짝 벗겨졌다.

 둥근 눈과 후덕한 얼굴 덕분인지 인상이 서글서글해 보였다.

 친하게 말을 걸기에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자세히 봤는데, 모르는 사람이다.

 “무슨 일인가요?”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금감원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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