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금감원 (1)
금융감독원.
이름 그대로 은행, 증권사, 보험사, 펀드사 등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기관이다. 일반인에게는 웬만해서는 만날 일 없는 곳이고, 금융사에게는 웬만해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곳이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왔다.
난 명함을 보았다.
그의 이름은 한종원. 직급은 과장. 특사경 소속이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먼저 한미루 씨가 컨티뉴 캐피탈 대리인이 맞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한종원 과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한정물산 매수 건과 관련해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왜 갑자기 금감원이 등장했을까?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한정그룹은 국민연금의 찬성을 대가로 100억의 뇌물을 건넸다. 합병은 물 건너갔으니, 경영권 분쟁이라도 편을 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부정청탁 의혹으로 손발이 묶여있다.
그러니 금감원을 움직여서 일단 찔러보겠다는 건가?
이미 받아먹은 게 있는 만큼 편들어줄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나올 줄이야.
“하긴,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으면 커피가 나와야죠. 그래야 다음 사람이 동전을 넣을 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언제부터 금감원이 이렇게 열심히였나요?”
“금융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게 저희의 일이니까요.”
난 대놓고 웃었다.
“프리머스 관리 감독은 다른 곳의 일이었나 보네요?”
내 말에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프리머스 사태가 터지자 금감원은 그동안 뭘 했냐며 강하게 질타를 받았고, 장진행 금감원장은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그 사태를 폭로한 사람이 바로 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직접 지적을 받으니 염치가 있다면 부끄러운 줄 알겠지.
“사모펀드가 국민들 상대로 수천억 해먹는 동안에는 놀고 있더니, 재벌그룹 경영권 분쟁에는 발 빠르게 움직이시네요.”
“말씀이 심하시네요.”
“나름 순화해서 하는 건데요.”
만약 이 자리에 프리머스 펀드 피해자가 있었다면 쌍욕부터 박고 시작했을 것이다. 나야 손해 본 게 없으니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거고.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몇 가지 의혹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무슨 의혹이요?”
“컨티뉴 캐피탈은 한정물산 주식을 9.2퍼센트 보유했다고 공시를 했습니다. 보유 지분이 5퍼센트를 넘으면 5일 안에 공시해야 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증권사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공시법에는 5퍼센트 룰이라는 게 있다.
상장사 주식을 5퍼센트 이상 보유하거나, 이후 1퍼센트 이상의 지분 변동이 생길 경우 5일 이내에 변동지분율과 보유 목적을 공시해야 한다.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은 9.2퍼센트인 시점에서 공시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전까지 보유량은 4.7퍼센트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투자사가 보유하고 있던 4.5퍼센트를 블록딜로 사들여 5퍼센트를 넘었기에 공시한 겁니다. 문제가 있나요?”
“지분을 늘린 과정에서 TRS는 없었습니까?”
TRS란 총수입스왑(Total Return Swap).
파생상품거래의 일종으로,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게 주식을 사게 하고 이익과 손실만 책임지는 방식이다.
“TRS가 불법은 아닐 텐데요.”
“투자자들과의 관계, 지분 취득 방식, 거래목적 등에 따라서는 차명으로 지분을 사들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공시법을 위반하기 위한 명백한 불법투자행위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내가 한 행위는 불법일까 아닐까?
만약 내가 라시드 왕자에게 1억 5천만 달러를 건네줘서 구매를 부탁한 거라면 불법이 맞다. 하지만 라시드 왕자는 자기 돈으로 주식을 사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한정물산 주식을 사는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과 이익을 내가 부담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저 돈 대신 주식으로 투자를 받았을 뿐이고, 이는 불법이라고 보기 힘들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금융거래에서 불법, 합법, 편법을 판단하는 기준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비슷한 사례를 놓고도 법원에서 판결이 엇갈리는 경우도 많다.
“엘리언트도 똑같은 의혹을 받고 있지 않나요?”
처음 TRS 관련 얘기가 나온 것은 엘리언트 매니지먼트 때문이다. 이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공시를 피했기 때문이다.
“엘리언트도 조사 중에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1회차 때 검찰은 금감원 조사를 바탕으로 엘리언트 매니지먼트를 기소하니까.
“그럼 편법으로 경영권 승계하려는 재벌이나, 부정청탁 받고 재벌 편들어주는 국민연금공단은요? 그쪽은 조사 안 합니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조사할 겁니다.”
“전 세계 언론이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고 있잖아요. 설마 금감원 직원들은 뉴스도 안 봅니까?”
내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그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조사를 하고 말고는 저희가 판단할 일이지, 한미루 씨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금감원이 하는 일이 대체 뭡니까? 재벌들 경영권 지켜주는 게 금감원이 하는 일입니까?”
어차피 조사 안 할 걸 안다.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재벌이나 국가기관을 건드릴 리 없지.
“일단 의혹에 대해 대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불법적인 일은 전혀 없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내 말에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럼요. 금융의 기본은 신뢰 아닙니까? 서로 믿고 살아야죠.”
“그럼 신뢰를 위해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겠네요.”
한종원 과장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뭔가요?”
“자료 제출 요구서입니다.”
난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서류를 꺼내 훑어보았다.
투자법인의 지분 관계, 자금출처, 투자자 모집과정, TRS 과정 등등.
한마디로 투자사 설립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내역을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내용이다.
“상당히 많네요. 이 자료들이 대체 왜 필요합니까?”
“전부 필요한 자료들이니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난 그 서류들을 다시 봉투 안에 넣어서 반대쪽으로 밀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다시 가져가세요.”
내 말에 한종원 과장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겁니까?”
“예. 자료 제출 요구는 말 그대로 ‘요구’잖아요. 제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요구는 거부가 가능하지 않나요? 금감원은 요구를 했고, 전 거절을 한 거죠. 뭐가 잘못됐나요?”
“지금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설마 요구가 아니라 강요나 명령이었습니까?”
“그렇다면요?”
“그럼 정식으로 영장 가져오세요. 이런 식으로 자료 들이밀며 윽박지르지 마시고.”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감사기관의 자료 제출 요구는 사실상 명령에 가깝다.
아마 이런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보통 금감원이 말하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기 마련이니.
처음에는 과한 요구를 한 다음 적당히 자료 제출 범위를 조정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저쪽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닐 생각은 없다.
한종원 과장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증권사에서 일하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금감원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
금융사에게 있어서 금감원은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존재다.
간단한 조사 한 번만 나와도 회사가 발칵 뒤집힌다.
죄가 있든 없든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영업을 정지시키거나, 아예 거래면허를 박탈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은 미국 법인.
따로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는 것도 아니고,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눈치 살피며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날 찾아온 것부터가 딱히 걸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난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금감원에서 일하고 계시니 잘 아실 겁니다. 이런 식으로 외국계 투자사를 적으로 돌리면 좋을 게 없습니다.”
“뭐라구요?”
“만약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한국은 재벌그룹 경영권 공격하면 수사기관을 동원해 방해한다고 오해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만약 투자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면 금감원이 그 뒷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나갈 수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금감원이 이렇게 움직인 것 자체가 무리수다.
또한 컨티뉴 캐피탈 투자금 중 절반은 라시드 왕자가 댔다. 그리고 공주님(?)이 함께 일하고 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날 찾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자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쉽게 움직일 수는 없겠지.
“투기자본들이 멋대로 설쳐댈 만큼 한국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금감원이 설쳐댈 만큼 컨티뉴 캐피탈은 만만하구요?”
“뭐라구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역사가 오래된 엘리언트는 쉽게 건드리기 힘들죠. 잘못했다가는 다른 사모펀드사들이 들고 일어나거나 외국계 자금이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언론에 알려지면 국제 망신이고, 소송당할 수도 있고. 그래서 결국 만만한 저 붙잡고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이봐요······.”
“정말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언론사에 금감원이 이런 요구를 했다고 알려볼까요? 국내 언론사들이 침묵해도 외신들이 이번 일에 주목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은데.”
“······.”
한종원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다.
TRS가 합법이라 해도 편법인 건 맞으니까. 판이 더 커지면 금감원도 죽기 살기로 나올 수밖에 없을 테고.
난 손가락으로 서류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 할 시간 있으면 금융사기나 좀 제대로 수사하세요.”
“뭐? 쓸데없는 짓거리? 말을 가려······.”
난 그의 말을 끊으며 계속 말했다.
“프리머스 사태도 그렇고, 코발트 게이트도 그렇고, 뭔 놈의 나라가 잊을 만하면 금융사기가 한 번씩 터집니까? 그것도 한번 터졌다 하면 조 단위가 우습게 넘어가고. 이게 다 금감원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한종원 과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 다 했습니까?”
난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다 안 했습니다. 까놓고 금감원이 관리감독만 제대로 했으면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대체 직원들은 월급 받으면서 뭐합니까? 이러라고 국민들이 세금 내는 줄 아세요? 가서 전하세요. 월급 루팡 소리 듣지 않으려면 똑바로 좀 하라고.”
“뭐, 뭐? 루팡? 이봐요, 한미루 씨!”
두툼한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조사하러 나왔다가 새파랗게 어린 나에게 훈계받을 줄은 몰랐겠지. 표정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체면 때문에 참는 모양이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경고하듯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릴 리가요. 전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