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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1) (137/529)

 142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1)

 난 바로 KSGI로 찾아갔다.

 내 얘기를 들은 김성권 대표는 뭔 헛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경영권 분쟁 도중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경영권 분쟁 중이냐 아니냐는 누가 정하는 건가요?”

 “예?”

 “정확히 몇 퍼센트 지분을 확보한 시점부터 분쟁이 시작된 겁니까?”

 “지금은 경영권 분쟁 도중이 아니라는 겁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죠. 개별 기업끼리의 거래라면 법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정부라면 씨알도 안 먹히지 않을까요?”

 김성권 대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군요. 제가 너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죠.”

 하지만 여기는 다이내믹 코리아.

 재벌과 정부가 손잡으면 불가능이란 없다.

 오영환 대통령 성격상 절대 받은 돈을 뱉어낼 사람이 아니다. 돌려줄 방법도 마땅치 않을 테고.

 따라서 돈을 받아먹은 이상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할 것이다.

 시장에서 국가는 공정한 심판의 역할이다. 그런데 심판과 상대 팀이 한편이라면? 게임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유상증자 대상은 산업은행이고, 산은이 가진 기업 중 하나를 한정물산에 떠넘기겠군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만약 대표님이라면 어느 기업과 합병을 시키겠습니까?”

 내 물음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김성권 대표는 바로 답을 내렸다.

 “대준건설이군요.”

 “맞습니다.”

 데이비드도 똑같은 대답을 내놨다.

 대준건설은 한때 도급순위 5위까지 올랐던 대형 건설사다.

 하지만 무리한 차입과 대규모 미분양으로 인해 부도가 났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망했겠지만, 대마불사라는 국가적 원칙(?)에 따라 공적자금을 쏟아부어 살려냈다.

 워낙 덩치가 큰 건설사다 보니 인수하기만 하면 단숨에 재계 순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때문에 그동안 여러 그룹들이 탐냈다.

 치열한 경쟁 끝에 대준건설을 품에 안은 건 호은그룹.

 하지만 입찰가를 너무 높게 써낸 게 문제였다. 무리한 투자와 부채를 견디지 못한 호은그룹은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 됐고, 대준건설은 다시 매물로 나왔다.

 현재 최대주주는 산업은행.

 부채는 조 단위에, 매년 수천억 원의 돈을 투입하고 있지만 경영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다고 망하게 둘 수도 없다.

 이제까지 들어간 돈도 돈이지만, 건설업의 특성상 하청업체 등 경제 전반에까지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매분기 적자 행진에도 불구하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장과 임원들은 꼬박꼬박 월급과 성과급을 챙겨갔다.

 이렇다 보니 경영은 더욱 엉망이었고, 기업 경쟁력 역시 크게 하락했다. 도급순위 5위였던 것도 옛말.

 지금은 덩치만 컸지 브랜드는 하락했고 시공능력도 점점 뒤처졌다. 이렇게 되자 대기업들은 더더욱 인수를 꺼렸다.

 정부 입장에서는 골칫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투입한 돈은 많은데 경영은 점점 악화되고, 팔리지 않으면 계속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 몇 달 전 중견 건설사인 유반건설이 인수 후보로 나섰으나, 실사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추가부채가 발견되며 무산됐다.

 그런 애물단지 기업을 한정물산이 떠안아 고용을 유지시킨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지는 셈.

 산업은행은 부실기업을 떠넘기고 자금을 회수해서 좋고, 한정물산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어서 좋다.

 두 기업을 합병해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고용을 유지하겠다고 하면 반대할 명분도 마땅치 않다.

 김성권 대표는 새삼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눈치챈 겁니까?”

 “본사에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평소에는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다.

 역시 데이비드 록허트가 괜히 천재 투자자로 불린 게 아니었다. 미리 내 사람으로 만들어놔서 다행이다.

 가만히 있었다면 눈 뜨고 뒤통수 맞았겠지.

 “미리 알아서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해결 방법이겠군요.”

 내가 누군가?

 이미 해결책까지 들고 왔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김성권 대표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자신 있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저쪽에서 인수 얘기가 나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대준건설을 인수하자는 겁니다.”

 반응은 한참 후 나왔다.

 “······예?”

 * * *

 난 역삼동 지하에 있는 술집에 도착했다.

 주차장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자 4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다.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한미루 님 되시나요?”

 “예.”

 “일행분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난 그녀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고급스럽고 조용하다는 느낌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실내가 펼쳐졌다. 널찍한 직사각형의 테이블에는 술과 안주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허민웅이 앉아있었다.

 미국에서 만난 뒤 두 번째 만남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헤이, 브라더! 어서 와.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정말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만이네요.”

 내가 좀 떨어진 곳에 앉자 그는 엉덩이를 열심히 움직여 내 쪽으로 이동했다.

 허민웅은 안내해준 여성에게 말했다.

 “얘 얼굴 잘 봐둬요. 내가 친동생 같이 생각하는 친구니까. 혹시 나중에 혼자 오더라도 잘 대접해주고. 아! 술값은 내 앞으로 달아놔요.”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부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신가 봐요.”

 허민웅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죠. 아주 보통이 아니에요.”

 “그럼 오늘부터 저도 잘 보여야겠네요. 두 분 말씀 나누시다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갔고 둘만 남았다.

 난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누가 보면 정말 친한 사이인 줄 알겠네요.”

 “이거 왜 이래? 너 자꾸 이러면 형 서운해.”

 서운하든지 말든지.

 난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여자 나오는 술집 아니에요?”

 “불러줄까?”

 “저 먼저 일어날 테니 이따 실컷 부르세요.”

 “뭐야, 재미없게. 혹시 이런 데는 처음이야?”

 “이번에는요.”

 1회차 때 큰손 고객 접대하느라 한두 번 따라와 본 적이 있긴 하다. 시중들고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돌아왔지만.

 인테리어만 봐도 그때 갔던 술집과는 레벨이 다르다.

 역시 돈이 많으니 좋은 데 다니는구나.

 “아! 승진한 거 축하드려요.”

 팀장이었던 그는 지난번 일에 대한 공으로 현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직책상으로는 이제 형과 동급이 된 셈이다.

 “놀리냐? 승진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야.”

 높은 자리에 있으면 책임도 늘어나기 마련.

 화안그룹은 사업부를 조정해가며 수소에너지 사업을 전부 화안에너지에 몰아주었다. 그리고 사실상 허민웅에게 맡겼다.

 만약 사업이 잘못될 경우 그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요. 수소에너지는 잘 될 테니까요.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룹의 가장 핵심 사업이 될걸요.”

 “그래?”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대체 언제부터 내 말을 이렇게 잘 믿었어?

 그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일단 한잔하자.”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뉴스에도 별로 안 나오고 조용하네요.”

 “내가 뉴스에 나갈 일이 뭐 있나?”

 “폭행이랑 음주운전?”

 그러자 허민웅은 멋쩍게 웃었다.

 “에이, 그게 언제적 얘기야? 뭔 똥오줌 못 가리던 시절 얘기를 하고 있어?”

 “몇 달 전까지 기저귀 차고 다녔나 봐요?”

 내 말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안 그래도 요즘 반성하는 중이니까. 언제 하루 날 잡아서 사과라도 하러 다녀야 하나 고민 중이야.”

 난 살짝 당황했다.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지 않았어요?”

 “내가 어떤 캐릭터인데?”

 난 바로 말했다.

 “화안그룹 망나니?”

 “······고민이라도 좀 하고 말해줘.”

 그는 술을 몇 잔 마시더니 말했다.

 “다 너 때문이지, 뭐.”

 “저 때문에요?”

 “내가 그동안 좀 막 살긴 했잖아.”

 “‘좀’이요?”

 “나 정도면 양호한 거야. 니가 진짜 망나니 같은 놈을 못 만나봐서 그래.”

 “만나봤어요.”

 “누구?”

 “주현진이요.”

 내 말에 허민웅은 살짝 놀랐다.

 “진짜?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걔 성격 완전 쓰레기인데. 재계에서도 아주 그냥 개차반으로 소문이 쫙 퍼졌어.”

 “정말 본인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하네요.”

 허민웅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나는 그냥 술 처먹고 사고 치는 거고. 아! 걔 이번에 운전기사한테 갑질한 거 봤지?그래도 난 주위 사람들에게는 잘해.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요즘은 더욱 조심하며 살고 있어.”

 “갑자기 착하게 살려는 이유가 있어요? 혹시 무슨 계기가 있었다든지.”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전에 호텔에서 너 만났을 때 말이야.”

 “그때 왜요?”

 “사실 몇 대 때린 다음 내쫓고 싶었거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왜 안 그랬어요?”

 “그거야 뭐······.”

 “유재호 회장님 소개로 왔으니까?”

 “그런 거지. 아무튼 그때 니 말 안 들었으면 지금쯤 난 망했을 거 아니야?”

 “그랬겠죠.”

 “그동안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다 우습게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딘가에 또 너 같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

 이건 좀 놀라운데.

 원래 사람 본성이란 쉽게 바뀌지 않기 마련. 하지만 어떤 본성을 지녔든 그걸 컨트롤할 수는 있다.

 재벌가 사람들이 각종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굳이 자신의 본성을 컨트롤할 필요가 없기 때문.

 허민웅의 경우 이제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때문에 계열사 한두 개 운영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가 그룹 회장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어쩌면 그가 형을 제치고 화안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철들었네요.”

 “칭찬이야, 빈정거리는 거야?”

 “칭찬이에요.”

 “하! 참 나. 뭐 이런 걸로 칭찬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런데 진짜 한정그룹을 먹을 생각이야?”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큰 그룹을 어떻게 먹겠습니까?”

 “그럼?”

 “깔끔하게 한정물산 하나만 먹을 생각입니다.”

 내 말에 허민웅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니야? 한정물산이 한정그룹 지주회사인데. 지주회사만 먹으면 그룹 전체를 먹는 거지.”

 “그렇긴 하죠.”

 “지금 우리 그룹뿐 아니라 다른 그룹들도 다들 불편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어.”

 “어째서요?”

 “10대 그룹 중 하나가 경영권이 넘어갈 수도 있는데 마음이 편하겠어? 경영권은 어느 그룹이든 가장 민감한 문제야. 까놓고 말해 헤지펀드가 작정하고 공격하면 버틸 만한 그룹이 몇 곳이나 되겠냐?”

 “그렇군요.”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는 건가?

 하기야 평소에는 멱살 잡고 싸우더라도 경영권 문제가 생기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K재벌들의 미덕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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