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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2) (138/529)

 143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2)

 “알겠지만 이제까지 재벌그룹이 공격을 받은 적은 있어도 경영권을 빼앗긴 사례는 한 번도 없어.”

 “뭐든 최초가 있는 법이죠.”

 “그러니까 그 최초가 문제라고. 다들 이런 선례가 생길까봐 걱정하는 거지.”

 기업은 주주의 것이고, 다수의 주주의 신임을 얻는 자가 경영을 맡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만큼은 재벌그룹 경영권은 대를 이어 상속한다는 게 상식이다.

 따라서 누군가 이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남의 가업을 빼앗느니, 기업사냥꾼이니, 벌처 펀드니 하며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정말로 다수의 주주의 신임을 얻은 사람이 경영자가 된다면?

 사람들은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믿었던 상식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재벌그룹 입장에서 그것만큼 걱정되는 일도 없겠지.

 “그래서 진짜 가능할 것 같아?”

 “글쎄요. 일단 해봐야 알지 않겠어요?”

 “한정그룹이 재계 순위는 10위여도 정치권이나 언론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아. 정치권과는 오랫동안 쌓아놓은 커넥션이 있고. 특히 이번 정부와는 대단히 친한 만큼,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걸.”

 어떤 재벌도 정부와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를 이어 자리를 승계할 수 있는 경제권력과 달리, 정치권력은 보통 5년이면 끝이라 해도 그 제한된 시간 안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니.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뭔데?”

 “대준건설이라고 알아요?”

 “당연히 알지. 그거 부실기업이잖아. 덩치만 컸지 부채는 많고 실적은 별로고. 안 그래도 산은이 그거 떠넘기려고 여기저기 찔러보는데, 받겠다는 곳이 없어.”

 누가 미쳤다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을 인수하고 싶어 하겠는가?

 “이걸 화안건설이 인수하는 게 어떨까요?”

 내 말에 허민웅은 깜짝 놀랐다.

 “뭐? 대체 뭔 소리야? 그런 기업을 왜 인수하라고······.”

 말을 하던 허민웅은 눈을 빛냈다.

 “설마 그 기업에 뭔가 있는 거야? 엄청난 기술이나 자산 같은 게 있다든지? 아니면, 하루아침에 미분양이 전부 팔려나갈 이슈가 있다든지?”

 “아니요. 쥐뿔도 없어요. 인수하면 골치만 아플걸요.”

 “그런데 왜 인수를 하라는 거야?”

 “그걸 한정물산이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난 데이비드에게 들은 얘기를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허민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제가 아니라 록허트 대표의 생각이에요.”

 “그렇군. 대준건설을 인수한다는 핑계로 한정물산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못 하도록화안건설이 먼저 나서서 먹어 달라는 건가?”

 “이번 일을 돕는 게 허민웅 씨에게도 더 이득이지 않겠어요?”

 “어째서?”

 난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몰라서 물어요? 누가 봐도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

 화안그룹 장남 허민홍은 한정그룹 장녀 주혜진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두 그룹은 서로 사돈지간인 셈이다.

 당연히 한정그룹 쪽에서는 사위가 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밀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정그룹이 경영권을 빼앗긴다면?

 허민홍 입장에서는 든든한 지원군이 사라지는 셈이다. 형수네가 어려워지면 형이 힘들어지고, 그러면 동생은 좋은 법이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알다시피 난 그저 일개 화안에너지 부사장일 뿐이니까.”

 “너무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마요. 그 나이에 부사장직에 오른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니까.”

 허민웅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고마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아빠가 화안그룹 회장이기 때문. 우리 아빠가 회장이면 나도 부사장될 자신이 있다.

 “그럼 이 문제를 누가 결정할 수 있는데요?”

 “그거야 당연 회장이지. 우리 아버지.”

 “그렇군요. 그럼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

 “응?”

 허민웅은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너 잘 모르나 본데, 우리 아버지 성격 장난 아니야.”

 “뉴스에서 봐서 잘 알아요.”

 허성훈 회장은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에 허민웅 못지않게 사고를 치고 다녔고, 아직도 가끔 회의장에서 고성을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진다고 한다.

 그거 맞고 실려 간 임원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오죽하면 야구팀 화안 호크스가 우승을 못하는 이유는 최고의 투수가 아직 마운드에 등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농담까지 있겠는가?

 “자식인 나도 가끔은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쳐.”

 “그렇게 말하니 더욱 만나 뵙고 싶어지네요.”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세요? 어서 안내하세요.”

 내 말에 허민웅은 당황했다.

 “뭐? 지금 가자고? 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리고 우리 술 마셨잖아.”

 “전 세 잔밖에 안 마셨어요.”

 “난 많이 마셨어! 아! 오늘은 형네서 자고 내일 가자.”

 “저랑 친하시죠?”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허민웅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연하지.”

 “그럼 아들이 친한 동생 데리고 늦게 집에 들어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

 * * *

 화안그룹 회장 허성훈.

 그가 내일을 위해 슬슬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둘째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

 얼굴이 벌게져 있는 걸 보니 술 마시다가 온 모양이다.

 평소 집에 좀 오라고 해도 잘 안 오던 아들놈이 이 시간에 왜 집에 왔나 했더니, 이유가 좀 황당하다.

 “이 시간에 누구를 데려왔다고?”

 “아, 예. 한미루라고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는 친구입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지금 재계에 이 정도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도 없으니.

 말 한마디로 DA금융그룹 후계자를 날린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KSGI와 엘리언트와 손잡고 한정그룹을 먹겠다고 달려들고 있다.

 컨티뉴 캐피탈은 화안그룹과도 인연이 깊다.

 그도 그럴 것이 화안그룹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던 토머스 모터스를 컨티뉴 캐피탈이 박살을 내놓았으니까.

 “둘이 어떻게 알게 된 사이냐?”

 “미국에 있을 때 절 찾아왔습니다.”

 짐작했던 대로다.

 “그놈 말을 듣고 주식을 판 모양이군.”

 허민웅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소에너지 사업 전체가 무너졌을 테니까.

 “집에 데려온 이유는?”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좀 있다고 해서요.”

 ‘일전에 신세 진 게 있다고 따르는 건가?’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화안그룹 회장이 약속도 없이 이렇게 멋대로 찾아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 자체가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무슨 얘기를?”

 허민웅은 방금까지 한미루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정부가 나서서 대준건설과 한정물산을 합병시킬 수도 있다고?”

 “예. 그 과정에서 한정물산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해서 그 주식을 산은이 가져가고 대신 한정그룹의 손을 들어주는 거죠.”

 그렇게 하면 주총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다.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로군. 그래서?”

 “화안건설이 먼저 나서서 대준건설을 인수해달라고 하던데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재벌그룹이 나서서 도와준다면 한정그룹을 돕지, 하이에나나 다름없는 사모펀드를 돕겠는가?

 허민웅의 입장에서는 한정그룹이 무너지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번 기회에 지난번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더욱 없겠지.

 ‘벌써부터 지 형과 맞설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그룹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다.

 허성훈 회장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버지의 예상과는 달리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들어보고 판단해야겠죠.”

 “뭐라고?”

 허민웅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지금 컨티뉴 캐피탈은 한정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안그룹의 도움을 필요로 하구요. 그게 그룹에 이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도움이 안 되면 거절하면 그만입니다. 어느 쪽이든 들어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어요? 알게 된 정보로 한정그룹과 뒤에서 다른 협상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허성훈 회장은 속으로 놀라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때로는 어떠한 계기를 통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한량처럼 지내던 놈이 그날 이후 사람이 바뀐 것처럼 행동하더니······.

 ‘한미루가 그 계기였다는 건가?’

 아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궁금해서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잠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 * *

 화안그룹 회장의 집은 평창동에 위치해 있다.

 본사가 종로 쪽에 있으니 출퇴근하기 편하려나?

 “일단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올게.”

 “세수하고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았어. 아! 술이 왜 이렇게 안 깨냐?”

 허민웅이 먼저 아버지를 만나러 간 사이 난 거실에 앉아 기다렸다.

 살다 보니 재벌 회장님 댁에도 다 와보는구나.

 크게 특별할 건 없었다.

 넓은 정원과 지하주차장이 있는 3층짜리 단독주택이다. 허민웅 말에 따르면 바로 붙어있는 저택은 관리인 숙소와 경호동으로 쓴다고 한다.

 실내 인테리어는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후지다.

 뭐랄까? 시골에 있을 법한 큰집 같은 느낌이랄까? 가구들 역시 손때가 묻어있을 정도로 오래됐다.

 잠시 후, 허민웅이 돌아왔다.

 “저 이만 돌아갈까요?”

 “아니. 만나보시겠대. 들어가자.”

 난 그와 함께 2층 서재로 향했다.

 널찍한 서재에는 오래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매일같이 청소를 하는지 책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안쪽의 책상에는 아저씨와 노인의 중간쯤 되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평소 인상을 자주 쓰는지 이마와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있고 은테안경을 썼다.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색 양복 대신 면바지에 스웨터를 입은 간편한 차림이다.

 그가 바로 화안그룹 허성훈 회장이다.

 보통 2세 경영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 하지만 화안그룹 창업주인 허영태 회장은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사망했고, 그는 고작 28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있을지 우려의 시선이 많았으나 놀랍게도 30년 넘게 안정적으로 그룹을 이끌며, 현재는 화안그룹을 재계 6위까지 올려놓았다.

 경험과 연륜 모두 여느 회장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한미루라고 합니다.”

 허성훈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인사를 받았다.

 “허성훈이네. 요즘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온 건가?”

 “먼저 예의 없이 이 늦은 시간에 뵙게 된 점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회사로 찾아뵙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다니? 못 만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오해를 사시면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허성훈 회장은 내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컨티뉴 캐피탈은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지금 상황에서 나를 만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게 없겠지.

 “대충 얘기 들었네. 화안건설이 대준건설을 인수했으면 좋겠다고?”

 “예.”

 내 말에 허성훈 회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적자에 부실투성이인 기업을 인수하라고? 그게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아! 정말로 인수하시라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허민웅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인수해달라며?”

 난 태연하게 말했다.

 “인수 선언을 하고 적당히 실사하는 척하다가 포기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실사 과정에서 인수하면 안 될 이유가 무더기로 발견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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