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출장 (2)
여기 오기 전 연락했더니, 바로 뛰어온 모양이다.
난 동료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트리시 오코너. 월스트리트 타임즈 기자예요.”
“아! 이분이······.”
“그 기자님이셨군요.”
“이쪽은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장 이동호, 이쪽은 부지사장 김범석.”
트리시는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동호 선배는 손에 묻은 소스를 재빨리 닦은 다음 그 손을 잡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동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 무명의 기자였던 그녀는 여러 차례 특종을 보도하며 이제 유명 기자가 됐다.
한번 유명세를 얻으면 여기저기서 제보가 쏟아지고, 이 제보로 기사를 써서 더욱 유명해지기 마련.
동호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미인인데.”
“그래요?”
하긴,안 꾸미고 다녀도 어디 가서 미인이라는 얘기를 듣기에 충분한 외모다.
“니 주변에는 왜 이렇게 미녀가 많아?”
“또 누가 있는데요?”
“성윤아랑 사라 공주님도 있잖아.”
“······.”
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트리시는 자연스레 우리가 앉은 자리에 합석했다.
“아빠! 저도 흑맥주 하나요.”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깜짝 놀랐다.
‘아빠라고?’
‘저런 분한테 이런 딸이?’
대충 이런 표정이다.
머리카락 색 빼고는 닮은 데가 없긴 하지.
난 트리시에게 물었다.
“회사는 어때요?”
그녀는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요즘 엄청 잘나가고 있어요. 제보도 많이 들어오고, 광고도 많이 들어오고. 기자도 새로 뽑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인터넷 신문사에 불과했던 WST는 토머스 모터스 관련 리포트를 시작으로 연달아 특종을 터트리며 이제는 제법 유명한 지역 언론사로 거듭났다.
그저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1회차 때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언론사가 이렇게 클 줄이야.
이런 게 나비효과라는 건가?
“그런데 뉴욕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투자 때문인가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다.
“만나자마자 취재부터 하는 건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직업이잖아요.”
“아직은 저도 잘 몰라요.”
“비밀이에요?”
“그런 셈이죠.”
트리시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좋아요. 하지만 특종 있으면 가장 먼저 알려줘야 해요.”
“약속드리죠.”
* * *
식사를 마친 우리는 컨티뉴 캐피탈 본사로 향했다.
컨티뉴 캐피탈은 월스트리트의 중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이면도로의 15층짜리 건물에 입주해있었다.
동호 선배는 건물 안내서에 붙은 이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 건물 하나에 몇 개의 금융사들이 들어서 있는 거야?”
돈만 있으면 설립할 수 있는 만큼, 세상에는 모래알만큼 많은 투자사들이 존재한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철저한 보안을 거친 다음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40대 초반의 잘생긴 금발 백인 남성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록허트.
현재 컨티뉴 캐피탈의 대표이자, 최근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투자자다.
몇 달 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요. 다들 보스를 뵙고 싶어합니다.”
난 같이 온 일행을 소개해 주었다.
유명 투자자를 만났기 때문인지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바, 반갑습니다.”
인사가 끝난 다음 우리는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컨티뉴 캐피탈은 한 층의 절반을 사용했다.
직원도 단순 사무직 직원들을 포함해 20명 정도로 늘었다.
호텔에서 몇 명이서 모여 투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제법 회사 같은 모습을 갖춘 걸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난 회의실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다.
모리스 피어슨, 가브리엘라 차베즈, 그리고 에드워드 밴슨.
난 그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월스트리트의 전문 금융인들 사이에 있기 때문인지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잔뜩 위축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동호 선배를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한국지사장 이동호입니다.”
데이비드는 왜 이 사람을 뽑았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야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아니, 나라는 사람을 구했기 때문.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굳이 본사까지 데려온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동안 여기서 같이 일할 겁니다.”
내 말에 동호 선배와 김범석은 깜짝 놀랐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출장이라고 했잖아요. 설마 놀러 온 줄 알았어요?”
“······응?”
놀러 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어쩐지 관광 책자와 맛집 지도부터 챙기더라니.
비록 바지사장(?)이지만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도록 말이다.
굳이 노력해서 뛰어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을 부릴 줄은 알아야 한다.
시장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번 기회에 월스트리트에서 세계 금융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두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겠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라고?”
“영어 공부도 하고 좋잖아요. 이번 기회에 리포트도 전부 영어로 쓰는 연습해요.”
둘 다 영어라면 웬만큼 하겠지만, 제대로 비즈니스를 하려면 영어는 아무리 배워도 부족하다.
난 에드워드 밴슨에게 말했다.
“교육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그는 두 사람 앞에 섰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예.”
에드워드 밴슨은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일하러 돌아갔다.
난 데이비드와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의 얘기를 나눴다.
“주총은 잘 봤습니다. 결국 이겼군요.”
“데이비드의 도움이 컸어요.”
“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대준건설에 대해 알려줬잖아요. 하마터면 넋 놓고 있다가 당할 뻔했습니다. 김성권 대표도 감사를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데이비드는 웃음을 지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다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전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요?”
“보스가 하는 일이라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모양이다.
하기야 스노우 크래시를 먹은 것에 비하면 한정그룹 경영권을 빼앗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국내 10대 재벌그룹이라고 해봐야 스노우 크래시 하나만도 못하다.
만들어진 지 10년도 안 된 스타트업이 한국 10대 재벌그룹의 시총보다 높다는 것은 세계를 주도하는 사업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 봐야 얼마 벌지도 못했는데요.”
그 고생을 하고도 번 돈이라고 해봐야 부대비용을 제하면 고작(?) 1조 7천억 원.
그래도 덕분에 바닥까지 떨어졌던 컨티뉴 캐피탈의 잔고는 18억 달러로 늘어났다.
데이비드는 웃음을 지었다.
“기간 대비 수익률을 생각하면 모두가 경악할 겁니다. 게다가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얻지 않았습니까?”
그건 바로 사우디 차기 국왕의 신뢰.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다.
“알렉스 프레스턴에게 대금을 지불해야 할 시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80억 달러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넥스트로젠 지분을 매각하려구요.”
난 사라와 오간 얘기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을 봤으니 응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안 될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죠.”
일단 2안을 생각해놓긴 했다.
밀린 얘기가 끝나자 본격적인 일 얘기가 시작됐다.
컨티뉴 캐피탈이 돈만 투자하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투자한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케어했다.
난 투자한 기업들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보고 받았다.
먼저 프리즈너.
일반적으로 영화 제작은 사전 준비와 촬영 기간을 합치면 1년은 훌쩍 넘어간다. 촬영을 끝내고 나서 편집과 후반작업을 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그러나 프리즈너는 그딴 거 없다.
영화 한 편당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이게 촬영만이 아닌 편집과 후반작업까지 포함한 거다.
A급 영화에 비하면 그야말로 날림이나 다름없지만, B급 영화는 B급 영화 나름대로의 감성이 있는 것 아니겠나?
최저 비용과 최소 시간이야말로 프리즈너의 최대 장점.
놀랍게도 좀비네이도2는 그사이 촬영을 끝냈고, CG 작업 중이다. 이미 케이블과 OTT 등에 배급계약도 끝내 투자비를 거의 회수했다고 한다.
“여긴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하는 곳이니 크게 신경 쓸 것 없겠네요.”
대신 당장 큰 수익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어차피 돈 때문이 아니라 시드 때문에 투자한 거니 상관없다.
그다음은 퍼플게임즈.
그들이 개발하는 크래프트 밸리는 슬슬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물리엔진은 완벽하게 작동했고, 마치 레고처럼 블록을 활용해 뭐든 만들 수 있었다.
게임을 일부 공개하자 여기저기서 투자의사를 밝혀왔다. 단지 지분 투자가 아니라 아예 게임사를 통째로 사겠다는 곳도 있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게임이었습니까?”
“그럼요.”
“크래프트 밸리는 단지 게임이 아니에요.”
“그럼요?”
“게임 플랫폼이죠.”
블록을 쌓는 걸 넘어 게임 내의 제작툴을 활용해 누구나 새로운 게임을 만들 수 있고,얼마든지 각종 모드를 설치할 수 있다.
한 번 즐기고 마는 게임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해나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재화의 거래도 가능하다.
실제로 크래프트 밸리는 출시 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메타버스 게임이 된다.
어차피 이 기업들이야 잘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마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스노우 크래시.
원래 알렉스 프레스턴과 롤프 부치가 운영하던 회사를 컨티뉴 캐피탈이 인수한 뒤, 시드 루카스 원톱 체제로 회사를 바꿨다.
클라우드 빅3인 AMZ, NS, 구블은 직접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프레미스(On-premise)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반면 스노우 크래시는 데이터센터 없이 다른 회사의 데이터센터에 저장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멀티클라우드 플랫폼을 제공한다.
데이터 활용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기존 기업들과는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시드는 CEO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능을 이것저것 추가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빅3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겹치는 것들도 다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시스템이 개선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업종과 기업에 맞게 개별 시스템을 구축했고, 원하는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그래프로 보여주었다.
이는 기존 클라우드 업체들보다 월등히 빠르고 편한 방식이었다.
웬만한 자료 정리나 회계 처리를 미미르가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직원을 덜 써도 될 정도였다.
효율성이 올라가자 거래하는 기업들의 만족도는 크게 증가했다.
이 모든 게 사명을 바꾸고 사업 방향을 전환한 지 몇 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잘나가는 것 같지만,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빅3가 본격적으로 견제에 나섰습니다. 중복되는 서비스를 철회하지 않으면 데이터 이용에 제한을 두겠다고 밝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