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이스케이프(Escape) (9)
일본 검찰은 현재 사마라 회장의 행적을 추적 중이었다.
집을 탈출했어도 일본 내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요르단에 모습을 드러내자 요시네 검사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아마 일본 검찰 전체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게 감시를 좀 더 잘하지 그랬어?
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느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바쁘실 테니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자 요시네 검사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가겠다는 거지?”
“제 마음대로죠. 지금 임의동행 아닌가요?”
“무사히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엄한 사람 계속 붙잡아 놓고 싶으면 괜한 억지 쓰지 마시고 정식으로 체포하세요.”
사마라 회장은 일본에서 경영을오래 했기때문에 털어서 나올거라도있지만, 난 그저 일본에 입국해 사마라 회장을 만난 것밖에 없다.
나를 붙잡아 놓는다고 해서 요르단에 있는 사마라 회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요시네 검사는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앉아! 정말 체포당하고 싶어?”
난 보란 듯이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PIF 쪽에 무슨 이유로 체포했는지 공문 하나만 넣어주시구요.”
내 지위는 컨티뉴 캐피탈의 공동대표.
여기에 더해 사우디 국부펀드가 투자한 러시 펀드의 고문이다. 이런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체포했다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는 나를 죽일 듯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전 이만.”
이래서 사람은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이다.
* * *
무사히 도쿄지검을 빠져나온 나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훑어보았다.
[(속보) 키오노스 전 회장 일본 탈출]
[일본에 구금 중이던 사마라 회장, 요르단 암만에 모습 드러내!]
[일본 검찰 정말 몰랐나?]
[일본 정부 관계자, 사실 파악 중.]
[프랑스의 반응은?]
사마라 회장의 기자회견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전세계 언론의 기사가 쏟아졌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반도체 기업 회장이 일본에서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고국으로 돌아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일본.
탈출 사실조차 몰랐던 일본 언론들은 정규방송을 멈추고 속보를 내보냈다.
기사를 대충 훑어본나는 내친김에 에이튜브 반응도 한번 알아보기로 했다.
[충격! 전세계경악! 일본 후진국임이 세상에 드러나!]
[요르단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고, 일본은 피눈물을 흘리다!]
[세기의 탈출극에 전인류가 깜짝 놀라고, 모두가 칭찬을 쏟아내다!]
[경악! 사마라 회장 탈출로 일본은 망할 거라는 예언 현실화!]
[일본은 이제 국제사회에 무릎 꿇고 사과할 일만 남았다!]
“…….”
그만 알아보자.
썸네일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택시를 타고 가는데 트리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디예요?]
“일본이에요.”
[서, 설마 일본에 간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요?]
“이것 때문이라뇨?”
[사마라 회장 탈출 말이에요. 미루 씨가 도와준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아무 관련 없는데.”
[정말요?]
“그럼요.”
[아닌 것 같은데.]
“진짜예요.”
[마침 일이 있어서 일본에 갔는데, 마침 그 타이밍에 사마라회장이 탈출했다는 거예요?]
“그렇죠. 이거 참 우연이네요.”
[흐음…….]
전혀 안 믿는 눈치다.
“기사 쓰고 있어요?”
[지금 쓰는 중이에요.]
최근 WST가 제법 유명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역 인터넷 신문사다. 요르단에 특파원이 있는 것도 아닌 만큼 다른 언론사 기사를 보며 열심히 짜깁기 중일 것이다.
“필요하면 자료 좀 보내줄까요?”
트리시는 반색했다.
[정말요? 그럼 좋죠.]
“저희 쪽에서도 지금 상황파악 중이니 끝나는 대로 보내줄게요.”
* * *
[(WST) 티에리 사마라 키오노스 전 회장, 일본을 탈출해 요르단 입국]
(전략)
보석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던 대기업 회장이 몰래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마라 회장이 파티에 부른 악단은 경비업체 직원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사마라 회장이 누군지 몰랐으며, 음향장비 케이스에 숨은 것도 나중에 친척들을 놀래기 위한 깜짝 쇼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케이스에 숨어 몰래 자택을 빠져나온 사마라 회장은 근처 주차장에서 다른 경호원들과 합류. 그들과 함께 차량과 신칸센을 이용해 오사카로 향했다.
그리고 간사이 공항에서 전용기에 탑승했다.
보석 중인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속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커다란 음향기기용 케이스에 몸을 숨겼다.
전용기 역시 탑승객과 화물에 대한 검사는 당연히 이뤄지지만, 그들은 X-ray 검사대보다 큰 물건은 별다른 검사 없이 옆으로 통과시킨다는 점을 노렸다.
도쿄에서 가까운 하네다 공항이나 나리타 공항 대신 간사이 공항을 택한 이유는 아마도 그곳의 보안검색이 가장 허술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용기는 간사이 공항을 떠나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그곳에 착륙하자 사마라 회장은 경호원들과 함께 활주로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전용기로 바꿔 탔다.
이 전용기는 다시 요르단 암만에 있는 퀸 알리아 국제공항으로 향했고, 그곳에 내린 사마라 회장은 정상적인 입국절차를 밟고 고국 땅에 발을 디뎠다.
기자회견에서 사마라 회장은 ‘의혹만으로도유죄가 전제되고 차별이 만연하며기본적 인권마저 무시되는 일본 사법제도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 난 불공정과 정치적 박해에서 빠져나왔다. 살아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신의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 * *
도쿄지검 특수부는 사건 보석 조건 위반으로 인한 보석 취소를 청구했고, 보석금 20억 엔은 몰수됐다.
보석이 취소된 만큼 사마라 회장은 일본으로 돌아오면 바로 구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즉시 요르단 정부에 사마라 회장의 송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르단 정부는 자국민이 정상적인 경로로 입국한 만큼 송환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첫 기자회견에서 사마라 회장은 일본 사법부를 맹비난했다.
“나는 기소도 없이 구금됐고, 변호사 출석도 없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도 만나지 못한 채 5개월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그 사이 키오노스는 이사회를 열어 나를 해임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공산국가와 독재국가에서도 기업인을 이런 식으로 체포와 구금하지는않는다.”
이에 일본 검찰 역시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사토 이치카 법무대신은 분노하며 말했다.
“티에리 사마라는 중대한 범죄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던 도중 도주했습니다. 해외 출국 금지를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했음에도 해외로 도주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본인이 정말로 결백하다면 당장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의 공정한 형사 사법제도도 아래 정정당당하게 재판을 받아 본인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겁니다.”
이에 사마라 회장이 다시 반박했다.
“검찰이 피고의 유죄를 증명해야지, 피고에게 무죄를 증명하라는 게 무슨 말이냐? 이게 바로 일본 사법부의 실체다! 일본 검찰은 이처럼 무죄추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마저 무시하고 있다! 이러고도 일본의 사법제도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지 전세계에 묻고 싶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사마라 회장의 말이 백번 맞았다.
당황한 사토 법무대신은 ‘무죄를 증명하라는 게 아니라, 무죄를 주장하라는 걸 잘못말했다.’며 말을 바꿨다.
하지만 진짜 폭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마라 회장은 추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정경유착으로 인한 사내 쿠데타다. 나를 체포한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압력이 있었고, 합병을 막기 위해 경영진과 일본 검찰이 손을 잡아 나를 체포했다. 난 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 * *
한때 2000엔까지 떨어졌던 키오노스 주가는 사마라 회장이 경영을 맡은 지 2년 만에 네 배가 올랐다.
때문에 세간에서 ‘프랑스산 악마’로불리는 것과달리, 주주들은 그를 ‘경영의 신’, ‘일본 기업의 구세주’라 불렀다.
그런 사마라 회장을 몰아내자, 투자자들의 우려가 컸다.
그러자 일본 정부의 무려 1조 엔의 반도체 지원책을 발표했고, 덕분에 키오노스 주가는 꾸준히 올라 얼마 전 1만 엔을 돌파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비난을 받고 있긴 해도 사마라 회장은 망해가던 키오노스를 살린 장본인이다. 그런 경영자를 강제로 몰아냈는데 만약 회사가 다시 위기에 처한다면?
그때는 세계적인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때문에 일본 정부가 지원에 나섰고, 기대감으로 인해 주가가 크게 뛴 것이다.
사이토는 일본 반도체의 부활을 자신했다.
정부의 투자로 덩치를 더 키운 다음 SPME와 경영을 완전히 분리시켜 얼라이언스를 파기하는 것이목표였다.
마침 유성전자 고객사 이탈로 인해 기회가 생겼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장 증설을 서둘렀다.
그런데…….
요르단에 나타난 사마라 회장을 본 순간, 사이토는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그는 온갖 폭로를 터트렸다.
[사마라 전 회장, 키오노스 분식회계 의혹 제기]
[키오노스 요코하마 반도체 공장 화학물질 유출 사고 은폐]
[노조 분쇄에 사이토 회장 관여]
[키오노스, 정부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자민당 의원과 내각 관료들에게 로비 벌여……]
발언 하나하나 핵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로비 명단에 포함된 자민당 의원들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신규 투자가 문제가 아니라, 파업과 화학물질 유출 사고 은폐 등으로 인해 기존 공장들이 제대로 운용될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사마라를 배신한 것은 절대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일본 반도체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마라 회장을 몰아낸 뒤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만약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면 간신히 살려놓은 키오노스는 다시 몰락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사이토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1년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정부의 투자가 이뤄진 뒤라면 충격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터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 * *
데이터센터 산업 진출을 선언한 후.
유성전자 주가는 20퍼센트가량 하락한 반면, 반사이익 볼 것으로 예상되는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는 크게 올랐다.
그중 가장 많이 오른 기업은 키오노스.
유재호는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주식 매입에 나섰지만, 당장 큰 반등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한미루는 무슨 생각인 거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키오노스가 유성전자의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어쨌거나 투자 결정에 있어서 키오노스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한미루의 말대로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도 내심 뭔가 하긴 할 거라는 기대감이 들긴 했다. 어쨌거나 그동안 한미루가 손을 대서 폭락하지 않은 주식이 없으니.
‘이번에도 뭔가 약점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주가를 폭락시킬 생각인가?’
그 생각이 맞았다.
그런데 본인이 폭로한 게 아니라, 사마라 회장을 탈출시켜서 폭로시켰다!
유재호는 기사를 본 순간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이게 뭔…….”
그동안 조용히 갇혀 지내던 사마라 회장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탈출했을 리는 없다.한미루가 뭔가 수를 썼음이 분명하다.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대체 이런 방법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아니, 설사 상상을 했더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실행에 옮기겠는가?
그런데 한미루는 그걸 실행에 옮겼고,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유재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 이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