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휴식 (10)
애니버스가 가장 성공한 K-팝 플랫폼인 것은 맞다.
그러나 확장성의 한계는 분명했다.
일단 K-팝 외에 외국 아티스트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실패했고, 몇몇 대형 기획사들은 여전히 자체 앱을 고수했으니까.
여기에는 향후 엔터 업계의 주도권을 탑티어 엔터에 넘겨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이 지분 70퍼센트를 인수한다면?
탑티어 엔터의 자회사라기보다는 컨티뉴 캐피탈의 자회사가 된다. 그만큼 다른 엔터사들과 제휴를 맺기 쉬워질 것이다.
박진웅 사장은 나에게 물었다.
“경영에 대한 독립성은 확실하게 보장해줄 수 있습니까?”
난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단 하나만 제외하면요.”
“뭔가요?”
“플랫폼 수수료는 어느 정도로 생각 중인가요?”
“현재는 15퍼센트로 계획 중입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너무 적어서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일단 시장을 장악한 다음 수수료를 올릴 생각이니까요.”
한마디로 아티스트와 팬들의 필수앱으로 자리 잡고 나면, 본격적인 수수료 징수를 시작하겠다는 것.
낮은 가격으로 시장을 장악한 다음, 수수료를 올리는 건 플랫폼 기업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가격을 올리면 안 쓰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이미 락인 효과(Lock-In Effect)가 생긴 상태.
배달앱을 예로 들면, 가게 입장에서는 수많은 소비자가 거기 있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수많은 가게가 거기 있기 때문에, 안 쓸 수가 없다.
“어느 정도로 말인가요?”
“30퍼센트까지는 올릴 생각입니다. 그 외에서 광고 노출이나 프로모션 등으로 추가 수수료를…….”
그는 내가 수수료가 너무 적어서 실망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 수수료를 올려 수익을 극대화할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난 그 말을 자르며 물었다.
“어째서 30퍼센트인가요?”
“그건…….”
“한번 맞춰볼까요? 엔플이 30퍼센트를 받기 때문이겠죠.”
탐 스콧 CEO의 말처럼 엔플이 시작한 플랫폼 30퍼센트 수수료는 어느새 모든 업계에서 황금률처럼 굳어졌다.
앱마캣에서 30퍼센트를 떼어가고, 플랫폼에서 30퍼센트를 떼어가고, 파트너사에서 또 30퍼센트를 떼어간다.
이렇게 세 번만 떼어가도 아티스트가 받는 몫은 34퍼센트로 줄어든다. 네 번 떼어가면 24퍼센트로 줄어들고.
이 얘기를 들으니 어째서 애니버스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하아.”
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는 살짝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 저렴한 생각을 하면 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곳도 그만큼 수수료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해드리죠. 레전드게임즈는 스트림을 잡겠다는 목표로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를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현재 스트림과의 점유율은 두 배 가까이 차이 나죠. 그럼에도 탐 스콧 CEO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글쎄요.”
난 답을 말해주었다.
“스트림이 플랫폼 수수료를 기존 3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내렸거든요. 덕분에 수많은 게임사들이 혜택을 봤죠. 스콧 CEO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애초에 스트림의 수수료가 그렇게 낮았다면, 굳이 ESD 시장에 진출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는 엔플과 구블이 앱마켓 수수료로 30퍼센트를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도 ‘날강도 짓’이라며 분노했다.
“애니버스가 성공한다면, 그건 탑티어 혼자 잘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참여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노력 덕분일 겁니다. 그런데 성공하고 나면 수수료를 올리겠다니. 그런 마인드로 접근한다면, 성장에 금방 한계가 올 겁니다. 기획사들에게 수수료 얼마 더 뜯어낼 생각을 하기보다는 이 플랫폼이 어떻게 아티스트와 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말씀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탑티어 엔터면 국내 엔터회사 원탑이자, 웬만한 대기업보다도 시총이 높다. 그러니 어디 가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겠지.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차라리 수수료를 최대한 낮추는 건 어떤가요? 제 생각에는 10퍼센트까지도 낮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항변했다.
“그렇게 하면 수익은커녕 적자가 날 겁니다. 실제로 레전드게임즈 스토어도 계속 적자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애니버스를 통해 더 많은 뮤키즈의 팬들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더 많은 앨범과 굿즈, 그리고 공연 티켓을 팔 수 있겠죠. 향후 새로운 그룹을 런칭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출발할 때부터 세계 시장을 노릴 수 있을 테니까요. 최대한 많은 아티스트와 팬을 끌어들인다면, 수익은 알아서 따라올 겁니다. 1억 매출에 30프로 받는 것보다는 10억 매출에 10퍼센트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애니버스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많은 가수들이 너도나도 들어오려 할 것이다.
박진웅 사장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난 그가 화를 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쨌거나 수수료 장사를 하실 생각이라면, 저희는 별로 투자할 생각이 없습니다.”
일개 직원(?)에게 한소리 들은 그는 동호 선배를 보며 물었다.
“지사장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한 팀장의 말이 제 뜻이라고.”
“…….”
* * *
박진웅 사장이 나간 뒤.
동호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화난 것 같은데.”
“상관있나요?”
어차피 결정이야 유현무 대표가 내리겠지.
“근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쓴소리하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였죠.”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좋은 소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 눈치 볼 것 없어요. 상대가 선배 눈치를 봐야지, 선배가 상대 눈치를 볼 필요 있나요?”
상대를 신경 쓰는 건 바라는 게 있기 때문. 바라는 게 없다면 신경 쓸 것도 없다.
이번만 해도 협력을 원하는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니다.
“투자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내가 지사장을 계속 잘할 수 있을까?”
“걱정 마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니까.”
본사에서 단기교육(?)을 받긴 했지만, 아직 지사장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나이도 젊고, 경험도 부족하다.
만약 컨티뉴 캐피탈이 적당한 회사였다면 경영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절대 갑 위치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정도 되면 알아서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기 마련이니.
난 옛날 일을 떠올렸다.
“이러고 있으니, 기업들 돌아다니며 IR 담당자들 만나던 때가 생각나네요.”
“아! 그거 재밌었지.”
동호 선배는 아이돌 보겠다고 일부러 기획사만 열심히 돌아다녔다.
리포트 하나에 주가가 오르고 떨어질 수 있는 만큼,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찾아가면 매우 잘해주기 마련.
그런데 나중에는 담당자가 그만 좀 찾아오라고 화낼 정도였다.
“기업 탐방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부장한테 땡땡이친 게 걸려서 같이 시말서 썼던 거 기억나요?”
처음부터 땡땡이치려고 했던 건 아니고, 날이 너무 더워서 잠깐 찜질방에 들러서 씻고 쉬다가 가려 했는데, 둘 다 퍼질러서 잤다.
동호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아! 이건 1회차 때만 있었던 일이었나?
난 대충 넘어갔다.
“아무튼 뭐 그랬다는 거죠.”
프리머스 펀드가 터지기 전까지 3년 동안 지겹도록 붙어 다녔으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추억이다.
그 추억을 지금은 나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게 좀 아쉽다.
“아! 콘서트 보러 갈 거지?”
“그건…….”
안 간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지유를 만나 대화한 게 떠올랐다.
“티켓은 있어요?”
“그럼. 받아놓은 거 있지.”
동호 선배는 자랑스럽게 티켓을 꺼내보였다.
“이 티켓 가격이 지금 팔면 얼마인지 알아?”
“얼만데요?”
“로열석이라 5천 달러는 받을걸.”
난 깜짝 놀랐다.
“5백 달러가 아니라요?”
“그건 정가고, 암표 가격은 열 배 넘게 뛰었어.”
* * *
LA K-팝 페스티벌이 열리는 소파이 스타디움은 인파로 가득했다.
주변에서는 각종 행사가 이뤄졌다.
여러 부스가 차려져서 한국 문화와 관광을 홍보했고, 푸드트럭들에서는 각종 퓨전 한식을 판매했다.
한쪽에서는 K-팝 커버 댄스팀을 뽑는 행사가 열렸다. 간이 스테이지에 다양한 아마추어팀들이 올라와 각자의 실력을 뽐냈다.
잭슨은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
그는 이혼 후 혼자 자녀를 키웠고, 그의 자녀들은 K-팝의 열성적인 팬이었다.
LA에서 최대 규모의 K-팝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몇 달 전부터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동안 일만 하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다. 마침 아들 생일이기도 하니, 콘서트에 가서 가족끼리 좋은 추억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예매 당일.
잭슨은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클릭하면 쉽게 티켓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K-팝의 인기를 너무 우습게 생각한 거였다.
티켓 판매가 시작된 순간 예매 사이트는 마비됐고, 접속 대기 순번은 50만 번으로 밀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대기 순번이 풀렸지만, 모든 좌석이 전부 마감된 뒤였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티켓 예매를 위해 전세계에서 300만 명이 동시에 접속했다고 한다.
비록 표는 못 구했지만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잭슨은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비행기 연착이나, 기타 사정으로 인해 취소되는 티켓을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판매한다는 공지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이른 시간에 애들을 데리고 공연장에 온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 판매 줄은 이미 길게 늘어서 있었고, 대기조차 마감됐다. 알고 보니, 취소된 티켓을 잡기 위해 팬들이 며칠 전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겠다며 플래카드까지 준비해온 아들은 고개를 떨궜다.
“아빠, 우리 공연 못 보는 거야?”
“어, 그게…….”
당황하는 그에게 한 남자가 접근해왔다.
“혹시 티켓 필요하십니까?”
“그렇긴 한데…….”
“아! 제가 마침 남는 티켓이 몇 장 있는데, 구매하실래요?”
그 말에 잭슨은 반색했다.
“얼마인가요?”
“장당 1000달러요.”
“…….”
그가 알기로 가장 싼 티켓 가격은 88달러.
그런데 1000달러라니!
세 장 가격이면, 한 달 생활비나 다름없다.
“조, 조금만 깎아주시면…….”
암표상은 코웃음을 쳤다.
“참 나! 지금 이 가격에도 못 사서 안달인데. 사기 싫으면 저리 가쇼. 돈도 없으면서 뭔 공연을 보겠다고.”
집 안 사정을 뻔히 아는 장녀 미쉘이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 공연 안 봐도 되니 맛있는 거 먹으면서 놀아요. 여기 온 것만으로도 재밌어요.”
하지만 어린 코비는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생일에 콘서트 볼 거라고 애들한테 자랑했는데.”
실망했을 텐데도 애써 웃는 딸과 실망해 우는 아들을 보니, 아이들만이라도 어떻게든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겠습니다.”
암표상은 웃음을 지었다.
“몇 장 드릴까요?”
“두 장 주세요.”
암표상이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 건네주려는데, 한 동양인 청년이 다가왔다.
“어! 지금 그 티켓 파시는 건가요?”
“그렇소.”
“장당 얼마죠?”
“1000달러.”
“총 몇 장 있나요?”
“11장 있는데.”
그러자 청년은 웃음을 지었다.
“마침 잘됐네요. 딱 그만큼 필요했는데. 장당 1500달러 드릴 테니, 저한테 전부 파시죠.”
암표상의 표정이 밝아졌다.
“돈은 있나?”
“그럼요. 이 자리에서 현찰로 지불해 드릴게요.”
청년은 지갑 안에 가득한 100달러짜리를 보여주었다.
“오케이. 다 팔겠네.”
잭슨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내가 먼저 사겠다고 했는데,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암표상은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그쪽도 1500달러 내시든지.”
“…….”
잭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티켓 좀 보여주시겠어요?”
“여기 있네.”
“잠시만요.”
티켓을 확인한 청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말했다.
“A구역 K22, 23, 24, 25, D구역 J17, 18, 19, 20, 그리고 F구역 G36, 37, 38. 지금 암표 판매 확인했으니까 예매 취소해주세요. 그리고 바로 이쪽으로 좀 와주세요. 여기가 어디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