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요코하마 일렉트론 (1)
소프트박스 그룹 송 가즈키 회장.
그는 일본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봐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소프트웨어 유통 산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이후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와 통신사를 인수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위기는 연달아서 발생했다.
먼저 1990년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며, 일본 경제는 장기침체에 빠져들었다. 이어서 2000년대 초에는 닷컴버블이 터지며 IT 불황이 시작됐다.
그러나 송 가즈키 회장은 위기를 기회라 생각하고, 그때마다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
버블 붕괴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세계 2위 GDP와 1억 2천만 명의 인구를 지닌 경제 대국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내수 시장에 안주했지만, 그의 판단은 달랐다.
‘일본의 성장은 이제 끝났어. 크게 성장하려면 세계로 나아가야 해.’
다행히 그는 성공할 기업을 알아볼 만한 안목을 지녔다.
전세계에 투자할 기업들이 널려 있었다. 다만 투자금이 부족할 뿐. 그래서 그는 인사이트펀드를 출시해 여러 기업과 연기금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원래 인사이트펀트의 주요 투자자로 사우디 국부펀드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사우디 국부펀드는 예상과 달리 컨티뉴 캐피탈과 손잡고 러시펀드로 방향을 틀었다.
사우디 국부펀드의 참여가 불발되며, 인사이트펀드의 출시 규모는 예정보다 반토막 났다.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찌된 일인지 그가 투자하려는 기업들마다 러시펀드가 먼저 투자했다. 그렇지 않은 기업들에는 손쉽게 투자했지만 별로 성적이 좋지 못했다.
인사이트펀드의 수익률은 곤두박질친 반면, 러시펀드는 승승장구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기업들 중 알짜는 러시펀드가 쏙 빼가고, 쭉정이만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스타트업 투자에는 리스크가 뒤따른다.
이제까지 투자에 실패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만약 컨티뉴 캐피탈만 아니었다면, 사우디 국부펀드가 인사이트펀드에 참여하고, 투자도 성공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심각한 악재가 터졌다.
그는 미래는 클라우드에 있다고 예측했다.
과거 클라우드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클라우드는 기업 활동에 필수적인 인프라다.
그동안 그가 말한 머신러닝, 인공지능, 빅데이터…… 이 모든 것이 클라우드에 있었다.
개인별 맞춤 추천, 매출수요 예측, 상품 검색, 결제 간편화 등등. 이제 클라우드 없이는 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인사이트펀드의 포트폴리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렉스. 여기서 투자한 돈은 무려 250억 달러.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기업들의 클라우드 전환이 빨라지며 렉스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으니까.
문제는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사태 이후 스노우 크래시가 이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효율성과 안정성 모두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고, 자연히 다른 업체들은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는 렉스를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서비스형 소프트웨어의 선두주자인 세일즈파워에 매각하는 방안까지 논의됐으나, 스노우 크래시로 인해 세일즈파워 역시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
결국 매각은 무산됐고, 상장에도 실패했다.
고객과 직원은 떠나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결국 렉스는 파산했다.
‘이것도 다 컨티뉴 캐피탈 때문이잖아!’
만약 컨티뉴 캐피탈이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스노우 크래시가 이렇게 빨리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렉스의 파산은 소프트박스 그룹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지난 분기 적자만 무려 3조 엔!
이는 일본 기업들 중 최대 규모다. 부채비율 역시 급격하게 높아지며 급하게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 * *
“그래서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팔기로 한 거군요.”
내 말에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 가치가 고점이라는 인식도 있을 겁니다. 반도체 공장 증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만큼, 당분간 장비 수요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니까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유재호 회장은 요코하마 일렉트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소프트박스 그룹이 처음 요코하마 일렉트론에 투자한 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당시는 반도체 회사들마저 줄 파산하고, 기존 공장마저도 멈춰 서던 시기였다. 그러니 장비가 팔릴 리 없었다.
파산할 거라는 얘기가 나오고 주가는 속절없이 폭락했는데, 이때 송 가즈키 회장은 대주주의 지분을 사들이고 꾸준히 주식을 매입했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그는 확신을 갖고 베팅했다.
역시나 닷컴버블 이후 본격적인 인터넷 붐이 일며 반도체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중국 시장을 개척했다.
“요코하마 일렉트론은 최근 3년 사이 급성장했습니다. 중국 반도체 굴기에 올라탄 덕분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송 가즈키 회장이 인사이트가 있네요.”
반도체는 첨단산업의 쌀.
전기로 작동하는 모든 기계에는 반도체가 들어가는 만큼, 중국은 반도체 자립에 나섰다.
반도체는 돈만 쏟아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돈을 쏟아부으면 어찌 됐든 성과가 나오기 마련.
중국이 기술력이 없지, 돈이 없겠는가?
국가가 돈을 쏟아부어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만큼, 당연히 반도체 장비 수요는 폭발했다.
쏟아지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요코하마 일렉트론은 중국 상하이에 해외 공장을 지었다.
덕분에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시총은 5조 엔에서 10조 엔으로 뛰었다.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52퍼센트로, 요코하마 공장과 상하이 공장의 생산 규모가 비등비등하다.
“말씀드렸다시피 요코하마 일렉트론은 3위 반도체 장비회사입니다. 1위는 미국의 ATAM, 2위는 네덜란드의 ESML이죠. 모든 단어를 줄여 부르는 일본인들 특성상 보통 요코일렉이라 부릅니다.”
반도체 장비회사라고 하면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네덜란드의 ESML.
이곳은 대당, 2, 3억 달러 하는 EUV 장비를 만든다.
그러나 이 장비는 미국의 제재에 의해 중국 수출이 막혀있다.
반면 요코하마 일렉트론은 산화, 포토, 식각, 증착 등 반도체 전체 공정에 들어가는 다양한 기계와 장비를 생산한다.
“전세계 모든 반도체 공장에는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장비가 들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성전자 역시 매년 수조 원어치의 장비를 사들이고 있죠.”
“기업 문화가 폐쇄적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합니다. 기술이 외부로 알려질 걸 걱정해 특허도 내지 않고, 증권거래소에 공개하는 기업 정보 역시 최소한만 공개하고 있죠.”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어디가 인수할까요?”
현재 시총은 약 10조 엔.
이중 36퍼센트를 소프트박스 그룹이 가지고 있다. 단순 계산해도 3조 6천억 엔이고,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한다면 4조 엔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아마 중국이 가장 사고 싶어 할 겁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위해 돈을 쏟아붓는 중.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최대 고객 역시 중국 CMIC다.
하지만…….
“중국 기업은 불가능하겠죠.”
반도체 관련 기업의 인수합병은 각국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일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중국과의 인수합병을 다른 나라가 허가할 리 없다. 따라서 중국 기업은 제외.
“같은 반도체 장비회사들도 불가능합니다. 독과점 문제가 있으니까요.”
해당 기업에 대해 잘 알고, 인수 후에도 가장 잘 운영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동종 업종을 하는 기업이다.
그래서 NS가 게임사를 인수하고, 디즈니가 영화사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회사의 경우 독과점 우려로 인해 인수합병이 쉽지 않다.
중국 기업과 기존 반도체 장비회사를 제외한다면,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사들일 만한 곳은 결국 몇 곳 안 된다.
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현재 상황은 1회차 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원래대로라면 유성전자와 스노우 크래시는 이 정도로 심한 견제를 받지도 않았을 테고, 요코하마 일렉트론이 이렇게 빨리 매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전세계가 반도체 전쟁을 벌이는 중.
유성전자와 PSMC는 7나노 이하 파운드리 경쟁을 벌이고 있고, 안텔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파운드리 시장에 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까지…….
이런 상황에서 요코하마 일렉트론이 매물로 나오면, 팽팽한 균형추가 흔들릴 것이다.
“지금 CEO가 누구죠?”
“나카자토 요시하루입니다.”
“중국은요?”
“루퍼트 리우입니다.”
“중국인인가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합작사인 요코일렉 차이나를 처음 설립했을 때부터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난 잠시 머릿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현시점에서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미래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이 기업은 향후 반도체 시장에…… 특히 중국 반도체 굴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업이다.
일본에는 ‘독을 삼키려면 그릇까지’라는 속담이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판을 더 키워보는 건 어떨까?
“이 기업을 저희가 사는 게 어떨까요?”
유재호 회장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인수하자는 겁니까?”
“예.”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표정이다. 난 식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후, 유재호 회장이 입을 열었다.
“요코하마 일렉트론 인수는 상당히 리스크가 큽니다. 지금이야 잘나간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잘나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도체 시장은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당연히 반도체 장비 역시 이를 따라간다.
지금이야 중국 반도체 굴기에 올라타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지만, 향후 반도체 사이클이 꺾이기라도 하면 매출과 이익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게다가 지금으로서는 요코하마 일렉트론 인수에 나설 만큼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유성전자는 현금이 많기로 유명한 기업.
한때는 사내보유금이 150조 원을 넘었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 설계 투자와 반도체 공장 증설, 그리고 데이터센터 설비 투자로 인해 현재는 40조 원까지 줄어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만큼, 더 이상 일을 벌이는 것은 부담이 크겠지.
“그건 걱정 마세요. 컨티뉴 캐피탈과 유성전자, 그리고 사우디 국부펀드가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만들 거니까요. 자금은 저희가 마련하겠습니다. 유성전자는 그저 자금 일부를 대고, 인수를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일부라면 어느 정도입니까?”
“10퍼센트면 어떤가요? 이렇게 하면 독과점 문제도 피할 수 있을 테구요.”
유재호 회장은 내 표정을 보며 말했다.
“진심인 모양이군요.”
“예.”
“혹시 이 기업도 편자의 못입니까?”
사실 유성전자 입장에서는 굳이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인수할 이유가 없다.
유성전자는 반도체 생산에 있어서 슈퍼 갑. 어디가 인수하든 거래에는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 제안을 흘려들을 수도 없겠지.
동우정밀, NP세미, RD쿼넷, 그리고 ADM까지.
내 조언에 따라 인수하고 투자한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봤으니까.
난 자신 있게 말했다.
“절 믿으세요. 인수에 나서는 게 반드시 유성전자에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