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요코하마 일렉트론 (6)
송 가즈키.
소프트박스 그룹의 회장이자 일본 최대의 부자인 그는 투자에 있어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는 수많은 투자자와 사업가를 만나왔다.
그들은 각자의 사상과 목표,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게 되지 않았다.
송 가즈키는 담담하게 물었다.
“어째서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팔 거라 생각합니까?”
한미루는 그 이유에 대해 말했다.
“돈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인사이트 펀드는 전세계 400여 개의 스타트업에 투자 중입니다. 이들 중 수익을 내는 기업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 기업들은 추가 투자를 받지 못하면 생존이 힘듭니다.”
최근 10년은 스타트업의 전성시대였다.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적자투성이인 기업에 엄청난 가치가 매겨지곤 했다.
그동안 스타트업의 성공 방식은 심플했다. 적자를 감내하고 일단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막대한 투자였다.
그럴듯한 사업 아이템을 들고 컨퍼런스에서 발표만 해도 수백만 달러의 투자금이 모여들었다.
인사이트 펀드는 그러한 기업들에 거액을 투자했다.
당장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기업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돈을 뿌려가며 시장을 장악하는 것에만 매진했다.
언론에서는 ‘인사이트 펀드의 투자를 받은 기업들은 지출에 중독됐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워크스페이스의 몰락과 렉스의 파산으로 인해 업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투자자들은 이 기업이 나중에 정말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그때까지 버틸 체력이 되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당장 추가자금을 넣지 않으면 망할 기업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시장 상황에서 인사이트 펀드가 이 기업들을 매각하려 한다면, 투자한 돈의 절반도 건지기 힘들 것이다.
결국 당장 현금 마련을 위해서는 제 가치를 받을 수 있는 기업을 파는 수밖에 없다.
바로 요코하마 일렉트론이다.
송 가즈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십 년 동안 투자해왔지만, 이런 위기는 처음입니다.”
지난 분기 손실액만 3조 엔이다.
이는 소프트박스 그룹이 입은 손실이니, 실제 인사이트 펀드의 손실액은 500억 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송 가즈키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전 항상 미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0대의 마지막에 인생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송 가즈키 회장의 인생 50년 계획은 유명했다.
20대에 이름을 날리고, 30대에 최소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하고, 40대에 사업에서 승부를 걸고, 50대에 1조 엔의 매출을 완성한다. 그리고 60대에 후계자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하는 것이다.
“제가 세운 계획은 그대로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죠.”
“예. 은퇴는 실패하셨죠.”
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60세의 생일에 깜짝 은퇴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후계자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직전에 은퇴를 취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욕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됐다고 말씀하셨죠.”
“전 미래의 핵심 키워드를 ABC로 정의했습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Cloud). 그게 가져올 미래를 생각하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죠.”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직접 그 미래를 움켜쥐고 싶었다. 그래서 은퇴를 미루고 이전보다 더욱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스타트업 투자에 앞서 AI군 전략을 수립했다.
소프트박스를 중심에 놓고, 미래를 지배할 1등 기업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인수한 기업들과 소프트박스의 시너지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고, 기업들끼리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이 전략을 완벽하게 실행한 곳이 나타났다.
바로 컨티뉴 캐피탈이다.
스노우 크래시를 중심에 놓고,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레전드게임즈, 블록게임즈, 프리즈너, 오코너 버거 등의 투자기업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스노우 크래시의 AI와 클라우드는 각 기업의 빅데이터와 결합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 결과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은 호텔업을 넘어 하이엔드 숙박공유업으로 진출했고, 레전드게임즈와 블록게임즈는 ESD와 클라우드 게이밍의 강자로 떠올랐다.
프리즈너는 새로운 CG 기술을 선보였고, 오코너 버거는 각종 데이터를 활용해 신메뉴를 개발하고 지점을 늘렸다.
지금 스노우 크래시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까?
만약 그가 스노우 크래시를 손에 넣었다면, 1조 달러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을 것이다.
스노우 크래시야말로 그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기업이다. 살 수만 있었다면 모든 걸 팔아서라도 샀을 것이다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은 그걸 손에 넣었다.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인수금액은 겨우 200억 달러 정도.
창업자들이 1000억 달러에도 팔지 않겠다던 기업을 어떻게 이렇게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을까?
나중에 내막을 알게 된 그는 무릎을 때리며 한탄했다.
‘어째서 그걸 몰랐지?’
스노우 크래시가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무렵.
그는 실리콘밸리로 찾아가 알렉스 프레스턴과 롤프 부치를 직접 만났다.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고, 벤처기업을 설립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본 경험도 있는 만큼 그는 프로그래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롤프 부치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천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미네르바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의 천재인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컨티뉴 캐피탈이 그랬듯 AI 프로그램의 실제 개발자의 가족을 찾아내 특허를 확보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스노우 크래시를 인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걸 알아챈 사람이 과연 데이비드 록허트일까, 아니면 눈앞의 남자일까?’
모두가 데이비드 록허트에 대해서만 신경 쓰지, 한미루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처음 한미루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계기는 일본을 뒤흔든 초유의 사태…… 바로 사마라 회장의 탈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컨티뉴 캐피탈의 공동대표가 일본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한미루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데이비드 록허트는 딸 때문에 뉴욕을 잘 떠나지 않는 반면, 한미루는 항상 투자 현장에 있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그 순간, 그는 벼락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록허트 대표는 카게무샤고, 이제까지 모든 투자는 한미루가 지시한 거였나?’
일본 전국시대 당시.
각 지역의 다이묘들은 항상 신변의 위협을 받았고, 혹시나 갑작스레 죽기라도 하면 세력 전체가 와해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때문에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골라 대역을 맡겼다. 그게 바로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다.
‘그렇다면 진짜 다이묘는 한미루인 건가?’
송 가즈키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가 수십 년에 걸쳐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눈앞의 청년은 불과 몇 년 만에 해낸 셈이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AI, 빅데이터, 클라우드는 분명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
다만 그 미래를 움켜쥔 사람이 그가 아니었을 뿐이다.
만약 컨티뉴 캐피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PIF의 투자도 유치하고, 인사이트 펀드는 문제없이 잘나갔을까?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처럼 빠르게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사이트 펀드가 투자하려 했던 스타트업 중 일부는 러시펀드가 먼저 투자했더군요. 그 투자는 전부 크게 성공했구요.”
그러자 한미루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역시 좋은 기업을 알아보는 눈은 서로 비슷한 모양이네요.”
송 가즈키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인사이트 펀드의 전략을 눈치채고, 그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을 것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인사이트 펀드의 대해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조언을 할 만한 자격이 될까요?”
“어떤 말이라도 좋습니다.”
한미루는 잠시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대해 아실 겁니다.”
그 말에 송 가즈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의 자존심 때문에 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을 나와 싸웠다가 다케다 신겐에게 패해 도망쳤습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말 위에서 대변을 지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죠. 하지만 그는 그 패배를 곱씹으며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은 천하를 손에 넣습니다.”
“일본 고사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한미루는 웃음을 지었다.
“오기 전 공부를 좀 했습니다. 회장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큰 비전만 일방 추구하면 전멸의 위험이 큽니다.”
그 말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전멸? 인사이트 펀드가 전멸할 수 있다는 겁니까?”
“예. 현재 인사이트 펀드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은 약 400여 개입니다. 이 기업들을 전부 살리려 한다면 전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중 살릴 기업과 아닐 기업을 냉정하게 구분하셔야 할 겁니다.”
“…….”
뼈아픈 얘기지만 맞는 말이었다.
송 가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요코하마 일렉트론에 대해 얘기해 보죠. 매수한다면 금액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기업 인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금액이다.
파는 쪽이야 당연히 가장 비싼 가격에 팔고 싶고, 사는 쪽은 가장 싼 가격에 사고 싶다. 거래가란 그 중간에 결정되기 마련.
“현재 주가 정도면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경영권 프리미엄은요?”
“요코하마 일렉트론은 온갖 규제에 묶여 있습니다. 인수를 한다 해도 기술에 접근할 수도 없고, 경영에 개입할 수도 없습니다. CEO를 바꿀 수도 없고, 이사회 한 명 교체하기도 힘들죠.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하는데, 경영권 프리미엄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째서 인수를 하려는 겁니까?”
“돈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각을 공식화한다면, 컨티뉴 캐피탈이 아니더라도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사고 싶어 하는 곳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살 수 있는 곳은 몇 안 되겠죠.”
세계 3위 반도체 장비기업은 사고 싶다고 해서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팔고 싶다고 해서 쉽게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먼저 일본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 외에 관련국들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고 장내에서 매도한다면 주가가 내려갈 테니 제값을 받기 힘들겠죠.”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사려는 사람이 많아야 매물의 가격이 오르기 마련. 그러나 한미루의 말대로 요코하마 일렉트론을 살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저희는 과반의 지분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인사이트 펀드의 보유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장내 매수도 진행할 생각입니다.”
* * *
난 소프트박스 본사를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바로 데이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팅은 잘 끝나셨습니까?]
“예.”
[직접 만나보니 어떻습니까요?]
“역시 대단한 사람이던데요.”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음에도 남 탓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수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요코하마 일렉트론 매각 의사는 확인했어요. 가격만 맞으면 팔 겁니다.”
[그렇군요. 그보다 보스가 송 회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난 깜짝 놀랐다.
“어! 벌써요?”
[이 바닥에서 소문은 빛보다 빠른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