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밤 산책 (2)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늦은 시간임에도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유와 함께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었다.
후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예쁘다.
이렇게 보니 진세연과 확실히 많이 닮았다. 그러고 보니, 진세연에게 어렸을 때 친자매로 자주 오해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잠시 말없이 걷는데, 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아니에요.”
“응? 뭐가?”
“뮤키즈 주호랑 열애설 난 거요.”
“그래? 따로 연락 같은 것도 안 했어?”
“그냥 편하게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오긴 했는데…….”
“응?”
그 정도면 거의 만나 보자는 뜻 아닌가?
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히 얘기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주호 쪽에서는 호감이 있던 모양이다. 지유가 있는 자리마다 따라서 참석하다 보니, 사진이 찍혀서 기사가 나갔던 거고.
사실 아이돌에게 열애설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은 루머지만, 그중에는 사실도 꽤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나이대의, 그것도 전국에서 가장 예쁘고 잘생긴 남녀가 한곳에 모여있으니 서로 연애 감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소속사에서 아무리 막아도 어떻게든 몰래 연애한다고 한다. 주위에서도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고.
참고로 출처는 이동호 대표.
“주변에서는 많이 사귀지 않아?”
“그렇긴 한데…… 전 별로 관심 없어요.”
“어째서? 주변에 잘생긴 아이돌들 천지일 텐데.”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 별로요. 그리고 저 남자 얼굴 안 봐요.”
“어, 음…….”
이거 기분이 미묘한데.
지유는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선배가 못생겼다는 건 아니구요.”
“괜찮아.”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애라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
실제로 지유는 기부도 많이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 연예인이 돈을 잘 번다지만, 누구에게나 돈은 소중한 법.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기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지유가 나보다 기부를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요즘은 너무 바빠서 누구 만나고 할 시간도 없어요. 그러니 열애설 같은 건 다 거짓이라고 보시면 돼요. 오늘도 정말 오랜만에 나온 거예요. 그동안은 매일 집에 들어가면 잠자기에 바빴어요.”
이 말을 들으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럼 쉬거나 친구들 만나는 게 낫지 않았어?”
“어, 그게…….”
세나에게는 선후배 관계라고 말했지만, 이런 야밤에 한강에서 단둘이 만나는 선후배가 어디 있겠는가?
LA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나와 둘이서 만난다는 건 지유에게 상당히 리스크가 있는 일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그럼에도 굳이 나를 만나는 이유는 뭘까?
나와 지유는 딱히 접점이 없다.
1회차 때는 그저 진세연의 아니운서 합격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 뒤로는 본 적도 없다.
1회차 때와 달라진 건 그날 내가 조언을 해줬다는 것.
“그때 일이 고마워서 그러는 거라면 무리할 필요 없는데.”
지유는 살짝 볼을 부풀렸다.
“물론 선배한테 고맙긴 한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저 그날 만나기 전부터 선배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예전에 언니가 남친 생겼다고 자랑하며 같이 찍은 사진들 보여줬거든요.”
“아…….”
그러고 보면 진세연도 사진 찍는 걸 좋아했지. 같이 찍은 사진이 수백 장은 될 것이다.
그렇게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좋아하더니, 결국 아나운서가 됐다.
지금은 여러 방송에서 잘나가는 중.
“세연이는 잘 지내?”
“네. 이번에 라디오도 맡게 됐어요.”
“바쁘겠구나.”
그래도 월급쟁이니 그렇게 많이 벌지는 못할 거다.
경력이랑 인지도 쌓아서 나중에 프리 선언하면 많이 벌겠지.
“그때부터 언니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궁금했거든요. 아! 그리고 저 학교에서 선배 본 적도 있어요.”
“뭐? 진짜?”
“네. 학교 식당에서요.”
“그때 나 뭐하고 있었는데?”
“돈까스 정식 드시고 계시던데요.”
“아, 그거 맛있지.”
“맞아요.”
학식 맛없기로 유명한 한국대에서 그나마 먹을 만한 메뉴였다. 그래 봐야 냉동 돈까스지만.
그나저나 아까 세나에게 학교에서 만났었다고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설마 그날 만나기 전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었을 줄이야.
난 예전부터 궁금한 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내 말을 들었던 거야?”
“예?”
“씨랩 피처링 말이야.”
내 말을 따른다는 것은 밑져야 본전이 아니었다.
당시 지유에게 씨랩의 피처링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회였다. 그런데 지유는 내 말을 믿고 그 기회를 그냥 날렸다.
“프리머스 펀드가 사기라는 걸 맞춰서?”
“음, 그것도 그런데,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뭔데?”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니 말해봐.”
잠시 머뭇거리던 지유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할 때 선배가 너무 간절해 보였거든요.”
난 당황했다.
“내가?”
“네. 그래서 왠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았어요.”
“…….”
그랬나?
생각해보니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째서 선배는 그때 저한테 그 말을 해줬던 거예요?”
난 지유의 목소리를, 지유의 노래를 좋아했다. 자주 노래를 듣고, 영상을 돌려보았다.
훨씬 더 크게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날개가 꺾인 것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건 아마도…….
“좋아했으니까.”
“예? 저, 저를요?”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오해할 만한 발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팬이었거든.”
“아, 팬…….”
딱히 팬클럽에 가입하거나 콘서트를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난 분명 지유의 팬이었다.
“저 그때는 별로 안 유명했는데.”
난 빙그레 웃었다.
내가 말한 건 1회차 때. 그 기억 덕분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얘기하며 걷다 보니, 꽤 멀리 왔다.
“그만 돌아갈까?”
“네.”
우리는 다시 방향을 180도 돌려 걸어갔다. 아까보다는 왠지 발걸음이 가볍다.
바람 때문인지 후드가 벗겨지고 밝은 금발이 드러났다.
“금발 잘 어울려.”
“정말요?”
“응.”
“그런데 관리가 너무 힘들어요. 매번 미용실 가서 뿌염도 해야 하고.”
지유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저 이번에 강아지 한 마리 입양했어요. 엄청 예뻐요.”
“그래?”
“네.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서 주워 오셨어요. 누가 버리고 갔다는데,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너무하네.”
끝까지 키울 자신 없으면 아예 키우지도 말았어야지.
“그래서 제가 잘 키워보려구요.”
“착하네.”
대체 이런 착한 애한테 어떤 놈이 악플을 다는 걸까?
뭐, 원래 악플에는 별 이유가 없는 법이다만…….
“이름도 지어줬어요.”
“뭔데?”
“요미예요. 지요미.”
“큽.”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잘 참았다.
나쁜 주인에게 버림받았더니, 새 주인이 지유라니.
강아지 입장에서는 인생역전 아닌가?
“귀엽겠네.”
“네. 엄청요. 다음번에 오시면 보여드릴게요.”
“응? 어디를?”
그러자 지유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집으로 오시라는 게 아니라, 제가 데리고 나오겠다는 얘기였어요.”
“그렇구나.”
애가 약간 허당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팬들 사이에서도 댕청미(?)가 있기로 유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집 샀다며?”
“아! 어떻게 아셨어요?”
“들은 것 같아.”
반포에 고오급(?) 아파트를 샀다고 들었다.
출처는 당연히 이동호 대표.
“부동산 투자?”
“아니에요. 부모님께 드리려고 산 거예요. 사실 부모님이 저희 키우느라 엄청 고생하셨거든요. 아버지는 몸이 안 좋으신데도 공장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도 청소부터 식당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으셨고. 그래서 돈 많이 벌면 꼭 좋은 집 사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설마 그 집이 50억 원짜리일 거라고 부모님은 생각이나 했을까?
“꿈을 이뤘구나.”
“대출금 갚으려면 이제부터 더 열심히 해야죠.”
좋은 마인드다.
빚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이지.
“사실 비싸다고 주변에서 사지 말라고 했는데, 가격을 떠나 부모님을 좋은 집에서 살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아니야. 잘 샀어.”
서울 집값 비싸다는 얘기가 하루 이틀 나온 건 아니지만, 아직 본격적인 폭등은 시작도 안 했다.
지금 샀으면 나중에 침체기에 들어가더라도 손해 보지는 않을 거다.
생각해보면 나도 부동산 쇼핑 좀 해야겠구나.
나중에 부모님 이사할 집, 세나 독립할 때 줄 집 등등.
“흐응, 세계 최고 사모펀드에서 일하시는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되네요.”
“세계 최고는 무슨.”
“다들 컨티뉴 캐피탈이 최고라고 하잖아요. 뉴스에도 엄청 자주 나오고.”
내 동생과는 다르게 시사에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지유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는 건 어때요?”
“꽤 재밌어.”
무엇보다 예전이었다면 TV로만 봤을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재미가 있다. 그중 상당수가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게 문제지만.
기업이 쑥쑥 커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이번에 발표한 거 봤어요. 세븐 라운드도 로키랑 써릴 스크린을 활용해 찍고, 앞으로는 저희 회사 뮤직비디오도 써릴 스크린으로 찍을 거래요.”
로키와 써릴 스크린을 가장 먼저 도입한 건 할리우드.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한국이다. 덕분에 컨티뉴 캐피탈은 엔터사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키를 쥐게 됐다.
“온라인 콘서트에도 활용할 거라고 하던데.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 현실이 되다니.”
“기술이란 사람의 인식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법이니까.”
10년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거리에 전기차와 수소차가 달릴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특히 인터넷 세상은 지금 거대한 변혁이 시작되는 중.
“선배, 탁동식 감독님 만났죠?”
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감독님과 얘기하는데, 갑자기 선배님 이름이 나와서요. 이동호 대표님과 같이 만났다고 하시던데. 우리 학교 선배님들이고 아는 사이라고 하니, 이런 인연이 다 있냐며 웃으시던데요.”
“그랬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탁동식 감독은 왜 만난 거야?”
“저 이번에 세븐 라운드에 출연하니까요.”
뜻밖의 대답에 난 깜짝 놀랐다.
“뭐? 진짜?”
그러자 내 물음에 지유는 오히려 당황했다.
“모, 모르셨어요? 제작발표회도 하고, 기사도 많이 떴을 텐데…….”
투자하는 것까지만 신경 썼지, 그 이후에는 딱히 알아보지 않았다.
지유의 본업은 가수지만, 연기도 열심히 한다.
음악 활동과 연기를 병행하는 아이돌은 많지만, 지유만큼 성공을 거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 지유가 세븐 라운드에 출연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걸 생각하지 못한 건 1회차 때는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
원래대로라면 지유는 씨랩 사건 이후로는 음원만 발표했지,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니.
난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TV를 잘 안 봐서. 그런데 무슨 배역이야?”
“연희라고 주인공에게 도움받는 역할인데…… 죄송하지만 스포라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어!”
지유가 그 역할을 맡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