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54화
엄청난 공을 세우다(4)
[공동산에서 일검(一劍)의 빚을 기억하십니까?]
짧은 문구로 시작하는 낯선 서신을 본 그는 이례적으로 몸을 떨었다.
부르르!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천하에서 검술 실력이라면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초절정의 검객, 복마진검 진가후였다.
그는 서신의 내용을 모두 읽기 전에 그 구절을 읽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공동산의 주인이자 구파일방에 속하는 명문 정파, 대 공동파의 장문인인 그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공동파의 장문인이 공동산에서 일검의 빚을 진 적은 오직 단 한 번.
천하제일검 검신 장인랑과의 비무뿐이었다.
과거 진가후는 장인랑과의 대결에서 패했고 실전과 다름없는 비무였기에 목숨을 잃을 뻔하였지만 장인랑은 최후의 순간 검을 회수하여 그를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분명히 장인랑에게 고맙다고 하며 이 빚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다고 하였다.’
그 일검의 은혜를 입은 후, 장인랑과 진가후는 연령을 초월하여 친밀하고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같은 검의 길을 걸으며 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던 두 사람은 이윽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까지 되었다.
몇 달 전 강호무림에서 검신 장인랑의 실종 소식이 퍼지며 얼마나 비통하고 슬퍼했던가?
참고로 검신 장인랑을 사살한 무림맹은 구파일방의 연합이 아니라 별개의 집단이기에 진가후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으음, 필체와 서신을 보니 검신 아우는 아닌 것 같고…….”
서신의 내용에 의하면 검신 장인랑을 알거나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일검의 빚을 기억한다면 감숙성 초입으로 병력을 보내 혈건방을 섬멸해 달라고?”
진가후는 중얼거렸다.
감숙성의 패자인 공동파에 있어 혈건방이란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그러지 않아도 아끼는 검신의 걱정에 잠을 못 이루던 진가후였다.
놀랍게도 감숙성 제일의 실력자인 복마진검 진가후는 서신 한 통에 의해 직접 출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동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었다.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반면 혈건방의 방주, 혈건염라(血巾閻羅) 나진곤은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황금표국의 애송이들이 철기맹의 물건을 싣고 와 모두 쳐 죽이고 그것을 빼앗을 차례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자기 공동파가, 그것도 감숙성 제일 고수인 복마진검 진가후가 직접 나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하여 감숙성 초입 부근에는 장운 일행과 공동파 일행, 혈건방 일행 셋이 모두 모이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황금표국이 공동파와 연이 있었나?”
방주의 질문에 혈건방의 수뇌부들은 제대로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금표국은 공동파와 연줄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구파일방은 무림맹을 의식하여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치고 있었다.
구파일방에 속한 화산과 종남이 황금표국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니 공동파가 황금표국을 돕거나 지지할 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감숙성 일대에서는 염라대왕으로 불리며 막 나가는 나진곤이었지만 오직 단 한 곳, 공동파의 눈치만은 보았다.
감숙성에서 칼 밥 먹고사는 자들은 공동파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진 대협. 혈건방을 이끄는 나 모라고 합니다.”
나진곤은 진가후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올리며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감숙성 일대에서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개차반 나진곤이 이렇게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까딱!
정중히 예의를 차리는 나진곤에 비해 진가후는 도도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보였다.
“대 공동파를 이끄는 복마진검 진 대협께서 무명소졸(無名小卒)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나진곤의 말에는 다소 뼈가 있었다.
비슷한 수준끼리 어울려야지 중소 군파가 다투고 있는 곳에 어쩐 일로 왔냐는 뜻이었다.
“…….”
나름의 치열한 양상을 펼치는 둘에 비해 장운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장운을 제외한 다른 일행은 모두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었지만 장운은 확신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진가후 형님.’
그는 당장에라도 진가후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비밀은 지켜야만 했다.
서신까지 보냈으니 자신을 도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자네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아니나 다를까?
진가후의 태도는 확실했다.
그는 나진곤을 향해 냉정한 어투로 말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네에?”
그 차가운 말에 나진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가후는 뛰어난 실력과 동시에 훌륭한 인성을 겸비하여 감숙성에서 절대적으로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렇게 홀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네에게 구구절절 내 사연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공동파를 대표하는 검법이자 천하를 진동시킨 복마검법(伏魔劍法)을 모두 익혀 복마진검이라는 별호를 따낸 사나이.
진가후는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이미 신검합일의 경지를 이뤄낸 초절정 고수였기에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였다.
“으으.”
그 엄청난 기세에 절정 고수인 혈건염라 나진곤조차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나진곤에게 있어 진가후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자 아득히 높은 산과도 같았다.
결국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진 대협께서 필시 다 뜻이 있는 것이겠죠.”
나진곤은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휘익!
세차게 고개를 돌려 장운 일행을 한차례 노려본 다음.
“그럼 이 무명소졸 나 모는 진 대협을 존중하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저 이를 뻑뻑 갈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나진곤은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는 작자였다.
그는 장운에 이어 진가후까지 바라보고는 차분히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 * *
“이럴 수가!”
갑자기 나타난 공동파와 혈건방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혈건방이 모두 물러나자 감우량은 크게 당황하였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 장운 도련님의 계획이 틀림없다!’
감우량은 장운 쪽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장운은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감우량은 확신했다.
공동파의 개입은 처음부터 장운이 계획한 일부였다는 사실을.
오오오!
“드디어 혈건방이 물러났다.”
“그 마적단 같은 놈들이 저절로 물러나고 있어!”
감숙성 외곽을 떠돌며 한 번 점찍은 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혈건방이 제 발로 물러나자 장운 일행은 쌍수를 들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자, 장운 도련님. 공동파의 장문인께서 이쪽으로 오십니다!”
반골 응운곤이 외쳤다.
그는 좀처럼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진중한 편이었지만 눈빛만으로 개차반 나진곤을 제압한 인물이 가까이 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렇게 올 줄 알았지.’
한편 장운은 여전히 흔들린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공동파의 장문인이시자 무림의 선배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장운의 지시 아래 모두가 긴장을 하며 대검객인 진가후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황금표국의 일원들은 혈건방이 나타날 때보다 더 놀라며 떨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장운 무리 속으로 복마진검 진가후와 그를 호위하는 공동삼검(伏魔三劍)이 장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자네가 내게 서신을 보내었는가?”
차분한 음성이지만 그 속에는 명문 정파의 기상이 담겨 있었으며 절대로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내공이 깔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장운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반가움을 애써 감추며 정중히 대답하였다.
“잠시 자네만 따로 이야기할 수 있나?”
진가후가 말했다.
그 말인즉, 주위 사람들을 뒤로 물려 단둘이서 독대하자는 뜻이었다.
마침 장운도 그것을 원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장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 일행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신호에 감우량과 응운곤, 천세은은 주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많이 물러설 필요는 없었다.
파아아앗!
강호에서 손꼽히는 무공 실력을 지닌 진가후가 직접 내공을 발산하여 소리를 차단하는 무형(無形)의 벽마저 만들었으니 말이다.
진가후가 무형의 벽을 만들어 그 공간에는 오로지 그와 장운, 단둘만 허락된 상태였다.
“곧바로 물어보지. 자네는 누구이며…… 검신 장인랑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진가후가 비밀을 유지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오매불망(寤寐不忘) 장인랑을 찾고 있었고 만약 그를 실종시키게 만든 자들에게 소식이 흘러가면 안 되니 직접 소리를 차단하여 본인만 알고자 하였다.
“네, 저는 황금표국의 셋째인 금령공자 장운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검신 장인랑 대협께서는…….”
장운은 서신을 보내기 전부터 준비한 말을 이어나갔다.
장운은 전생의 자신을 죽인 원수, 무림맹과 사흑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전생의 아군을 모아야만 했다.
그들 중 가장 믿을 만하고 가까운 사이는 바로 이 진가후였다.
“제 사부가 되십니다. 바로 이 검이 그 증거지요.”
소리는 차단될지언정 두 사람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장운은 태연하게 검은 천으로 휘감긴 초령검을 언급했다.
“허억! 그, 그 검은……!”
검신 장인랑과 매우 가까운 사이답게 진가후는 곧바로 그 검을 알아보았다.
그 검은 자신을 꺾은 검인데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특히 장운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언급한 이상 검신의 검 초령검임을 확신했다.
“장 아우는 어떠한가? 아직 살아 있나? 상태는 어떻고?”
진가후는 무척이나 흥분하여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본래 근엄하고 진중한 성격인데 장인랑의 걱정이 컸던 까닭이었다.
장운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저 또한 알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 초령검은 공야월 노야께서 발견하시고 제게 가져다주셨지요.”
진가후는 장운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 접했던 소문을 기억해 냈다.
만철야장과 만철당 장인들이 어느 젊은 친구 휘하에 들어갔다는 파격적인 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랬나 했더니 검신의 제자임을 알고 들어갔다 생각하는 진가후였다.
“그게…… 그게 정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토록 장인랑의 생사를 알고 싶었건만 이번에도 알아내지 못했다.
감숙성의 절대자, 진가후의 목소리가 떨리자 장운의 마음도 무너져 내리는 듯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미안합니다, 진 형님. 때가 온다면 모두 말하겠습니다.’
장운은 그를 앞에 두고 미안한 감정을 숨겼다.
진가후는 그 어느 누구보다 믿을 만한 인물이긴 하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비록 만남은 짧았지만 저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진 대협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하였으며 어려운 일이 있거든 공동산에서 일검의 빚을 말하라 하셨습니다.”
장운의 말에 진가후는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검신의 애검 초령검부터, 사람을 가리는 눈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공야월까지 그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장 아우의 제자면 내게도 제자나 마찬가지지.”
스윽!
곧이어 진가후는 소리를 차단하는 무형의 벽을 풀었고, 그러자마자 모든 이들에게 고했다.
“여기 금령공자 장운은 우리 공동파의 귀빈이자 나의 손자와도 같은 아이다. 그러니…… 감숙성에서 장운을 돕는 데 총력을 기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