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69화
녹림(綠林)과 협상하다(1)
장운이 장룡과의 비무에서 승리를 거두고 정식 후계자로 승낙을 받았으며,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던 장건이 꼬랑지를 내리며 통쾌함을 얻은 그 날 밤.
“장운아, 여기 있었구나.”
밤늦게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장운의 절친한 사람들부터 다른 파벌 그리고 장건까지, 비무가 끝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마지막 손님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는 놀랍게도 오늘 모든 것을 잃은 쓰라린 패배를 당한 장본인, 과묵공자 장룡이었다.
아주 늦은 밤, 전신과 얼굴에 붕대를 칭칭 맨 채 찾아오자 간담이 서늘할 법도 한데 장운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장룡은 장운의 얼굴을 한 차례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의외로 분노나 원망, 시기와 질투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치의 후회도 없는 후련함뿐이었다.
왜냐하면 장룡은 대공자로서 명예와 자존심마저 집어던지며 모든 것을 내던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밤이 깊었던 까닭일까?
좀처럼 말이 없다던 과묵공자는 가깝지 않은 배다른 동생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아닙니다. 원망은 하지만 이해도 갑니다.”
장운 또한 솔직하게 말했다.
장룡의 의도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었고 장운도 그것을 잘 알았다.
“나는 날이 밝은 대로 감숙성 분타로 이동할 계획이다.”
장룡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행보를 밝혔다.
그 말에 장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위에 태양이 두 개 떠 있을 수 없듯 이미 패배한 대공자 장룡이 황금표국 본관에 있다면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장운은 그가 다른 분타로 가거나 아니면 풍검문의 후대를 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마침 좋은 기회가 있어. 내 외가인 풍검문에서 지원을 해줄 테니 상대적으로 개척이 덜 된 감숙성 분타를 제대로 해보자더군.”
“좋은 계획이십니다. 마침 제가 공동파와 인연이 있으니 도움도 드릴 수 있습니다.”
장운은 구태여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지 마시고 황금표국 본국에서 계속 머물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못된 행동인 걸 알기에 그랬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좋구나.”
장룡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씨익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비록 정식 후계자는 못 되었지만 황금표국을 위하는 마음은 너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황금표국의 자랑스러운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던 장룡.
“너를 도와 본 표국을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도록 하마.”
한때 두 형들의 견제와 방해를 지속적으로 받던 장운이었다.
하나 그는 결국 승리자가 되었으며 그 두 형들로부터 충성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최후의 승리자는 금령공자 장운이었다.
* * *
-막내였던 장운이 황금표국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결국 금령공자 장운이 차기 국주로 낙점받았다!
이 소식은 황금표국 내부를 넘어 섬서성, 그리고 전 중원까지 널리 퍼졌다.
물론 콧대가 높고 도도한 구파일방과 무림맹, 사흑천의 상위 문파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 소식은 섬서 서안의 화제나 다름없었다.
그사이, 황금표국은 내부 정리에 들어갔다.
첫째 공자였던 장룡은 말했던 대로 감숙 분타로 가서 분타장이 되어 새 출발을 하였다.
둘째 공자인 장건은 장운의 밑에서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살리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셋째 공자인 장운.
그는 며칠 동안 어딜 가든 축하를 받았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는 높은 책임을 요구하는 법.
어느 날, 장천호가 장운을 소환하였다.
“부르셨습니까?”
장운이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황금 총회의 날도 아닌데 어찌하여 부른 것일까?
‘분명 어떤 임무를 내리실 것이 뻔하다.’
장운은 곧바로 직감하였다.
눈치를 보니 커다란 임무를 맡길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화산파 표행에서 있었던 명룡채의 배신을 기억할 것이다.”
“……!!”
그 말에 장운은 몸을 떨었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예상치 않았던 배신으로 인해 당시 얼마나 위기를 겪었던지.
추후 녹림은 명룡채의 채주였던 명룡부왕 지건악이 단독으로 일으킨 돌발행동이며 녹림 전체와는 상관없는 독단적인 일이라고 해명했다.
오죽했으면 녹림을 이끄는 녹림왕(綠林王) 군부명이 이례적으로 서신과 선물을 보내왔을까?
“녹림왕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결국 합당한 보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가족과 같은 표사들과 지인들을 잃었는데 말이다.”
장천호가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평소 냉철한 장천호였지만 그가 유일하게 이성을 잃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만을 믿고 따르는 황금표국 인원들이 사망하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장천호는 표행을 하다가 표국 사람이 사망하였을 시 성대한 보상금을 직접 전달할 정도였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왔지만 피는 오직 피로서만 씻을 수 있는 법이다.”
장천호의 말은 옳았다.
장운도 그 말에 동의를 했다.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으니 말이다.
“때마침 녹림과 통행료 협상을 앞두고 있다.”
통행료 협상이라는 말에 장운의 두 눈이 커졌다.
황금표국은 대형 표국인 만큼 인근 산채와 개별적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녹림의 수뇌부들과 삼 년마다 한 번씩 협상을 통해 통행료를 정하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준점이지 각 산채의 친분도나 과거 역사에 마다 조금씩 다르곤 했다.
“녹림왕은 어떻게 제시를 했습니까?”
“명룡채 건으로 미안하니 통행료를 올리지 않고 동결하겠다더군.”
“헛!”
장운은 그 소리에 국주 앞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 코웃음을 쳤다.
‘산적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는군.’
장운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명룡채는 그간의 우정을 배신하고 황금표국을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원들이 사망하였고 하마터면 황금표국의 위신이 땅에 곤두박질칠 뻔했다.
그런 일을 버젓이 해놓고 지건악 단독행동이었다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하더니 급기야 통행료를 동결하겠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입니다. 깎지는 못할망정 동결이라니요. 심지어 본 표국은 그 어느 표국보다도 더 녹림에게 통행료를 후하게 주는 편이 아닙니까?”
장운의 말은 정확했다.
표국과 녹림은 공생 관계이니 구태여 척을 질 것이 없다는 게 장천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표국보다도 후한 통행료를 매달 내고 있었고 친분도에 따라 채주들에게 여러 선물 및 금자를 주기도 했다.
그런 황금표국에게 잘 대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기만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장운 네게 곧 있을 통행료 협상 자리에서 대표로 참석하도록 해라.”
“네?”
장운은 장천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크게 놀라고 말았다.
임무가 있을 것은 예견했지만 장천호와 함께 가거나 혹은 참석만 하는 정도로 인석하였다.
그런데 대표로 나서다니.
“너는 이제 평범한 일개 표두가 아니다. 내 정식 후계자가 되었으니 이런 자리에서 공을 세우고 나아가 이름을 떨쳐야 한다.”
장천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운아, 너는 더 이름을 떨치고 대성해야 한다. 아직도 섬서성 바깥을 벗어나면 본 표국을 그저 상단의 호위무사 취급을 하며 낮춰 보는 이들이 즐비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고 싶다.”
장운 또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의 말에 저도 동조합니다. 명문 정파라는 족속들도 도도한 자존심을 세우지만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무(武)의 힘을 빌려 생존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들이 더 낫습니다. 우리들은 합당한 노동을 제공하고 표행을 완수하는 반면, 저들은 자릿세니 영역이니 하면서 혈세를 빼앗을 뿐이지요.”
그 의견은 너무나 신랄하고도 통쾌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흑방 무뢰배들이나 명문 정파나 다를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표행을 완수하여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취하는 표국이 더 납득이 갔다.
씨익!
장천호는 웃었다.
자신과 똑같은 의견일 뿐만 아니라 장운을 보며 젊었을 적, 그러한 시선을 바꾸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좋구나, 좋아. 그래서 네가 이번 통행료 협상을 맡도록 해라. 그리고…… 녹림왕 군부명을 조심하도록 해라. 그는 곰의 덩치에 호랑이의 기운, 여우의 꾀와 돼지의 탐욕을 동시에 갖춘 작자이니.”
수십 년 전, 녹림왕 군부명은 혈혈단신으로 무림에 나타나 중원 각지에 존재하는 많은 산채를 직접 두 손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그 정점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그 역시 사파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얼마 전 장천호가 꺾은 하오문주 천악귀오 엽공천보다도 한 수 위의 무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장운이 웃었다.
전생부터 누군가와 입씨름을 하거나 토론을 하는 걸 즐겨했다.
그리고 명분의 칼자루는 자신에게 있다.
“반드시 성과를 챙겨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 * *
“황금표국 통행료 협상 건과 관련하여 일 처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한편 녹림의 본산에서 거대한 왕좌 같은 의자에 호랑이 가죽을 걸쳐 입은 자가 입을 열었다.
초로의 노인의 나이였으나 덩치나 타고난 신체는 가히 대장군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자가 바로 녹림을 이끄는 총 두령인 녹림왕 군부명이었다.
“황금표국 측에서 참가한다고 합니다. 한데…… 놀랍게도 금령검객이 참가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아들, 금령공자 장운이 대표로 온다고 하더군요?”
“뭣이?”
전혀 뜻밖의 소식에 군부명의 커다란 눈이 더 커지고 말았다.
“그게 정말이더냐?”
“네, 이미 답신을 받았습니다.”
수하의 말에 군부명은 이윽고 배를 잡으며 웃었다.
“크하하하하하핫!”
어찌나 통쾌하게 웃어젖히던지 산이 뒤흔들리고 묘목들이 덜덜 떠는 듯 보일 정도였다.
“총 채주님. 왜 웃으십니까?”
녹림왕의 제자들이 몹시 의아한 모습으로 물었다.
“생각해 보거라. 그러지 않아도 명룡채 사건으로 인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뭐? 그 애송이를 내보내다니.”
군부명은 아직도 웃긴지 여전히 쿡쿡대며 말하였다.
“금령검객도 다 되었구나. 하오문주를 잡아내어 달리 보고 있었는데…… 혜안이 흐려진 탓일까?”
녹림왕 군부명.
그는 금령공자 장운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자자, 보나 마나 우리에게 호구 잡힐 것이 뻔하니 미리 축배를 좀 들도록 하지!”
심지어 협상에서 승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며 설레발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녹림왕이 방심하고 있을 때 황금표국 정식 후계자 장운은 만반의 준비를 하며 잔뜩 벼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흘이 흘렀을 무렵!
“황금표국 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장운이 신묘수사 아정과 노련한 상수 노관, 그리고 응운곤과 천세은 등 자신의 사단을 완벽하게 이끌고 나타났다.
“왔군.”
그가 모습을 보이자 녹림왕과 그 수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본래 다른 표국 사람들은 녹림왕과 녹림 총채를 향해 예우를 표하며 포권을 하거나 인사를 먼저 했지만 장운은 달랐다.
장운은 말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자신의 일행에게도 내려오지 말라 전했다.
“음?”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군부명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그의 예상에는 새파란 애송이인 장운이 자신을 보자마자 기가 죽어 벌벌 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처억!
장운은 무언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의아해했으나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 자세히 바라보던 군부명은 이윽고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런 미친!”
그렇다.
장운이 내던진 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녹림왕이 보낸 화해의 선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