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119화
파란의 비무행(比武行)(2)
“아무리 실전과 같은 비무라고 하나…… 자네와 나의 배분이 하늘과 땅 차이거늘, 양보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나?”
벽소월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정파 무림에서 강호의 선후배가 싸울 때 하수삼초(下手三招), 혹은 후학삼초(後學三招)라고 하여 세 번의 공격을 허락하곤 했다.
이는 서로 간의 배분이 크게 차이가 날 때나 실력이 차이 날 때 연장자가 양보해 주는 강호의 예의였다.
금령공자 장운이 아니라 평범한 실력의 후배였다면 당연히 삼 초를 양보하였을 것이다.
‘네놈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벽소월은 삼 초식이나 양보할 수는 없었다.
대신 주위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을 의식하는 만큼 이 잘 나가는 금령공자에게 선제공격을 양보하면서 찬사를 듣고 싶었다.
그 생각의 타협점이 바로 선제공격 한 번을 양보하는 일이었다.
“정말입니까?”
장운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봐줄 상황이 아닐 텐데 선제공격을 허락한다는 것은 바둑으로 따진다면 접바둑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니까.”
벽소월은 먼저 선공을 하라는 듯 검을 쥔 손을 까딱거렸다.
끝까지 허세와 겉멋으로 점철이 되어 있는 작자였다.
‘끝까지 헛 멋만 들었군.’
장운은 내심 고소(苦笑)를 지으며 준비를 하였다.
세간의 평가는 이런 겉멋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실력으로 정해지는 것이니 곧 판가름이 날 터.
장운은 벽소월이 의도치 않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그것을 마다할 장운이 아니었다.
“크으~ 역시 무림의 어른이시다.”
“암! 은광세검 어르신은 우리 무림의 모범이시자 한 마리 고고한 학과 같으신 분이지.”
“금령공자가 다소 파격적인 언행을 하는데도 저런 양보를 보이다니, 아무리 봐도 대인배의 그릇이라니까?”
한편 벽소월의 민낯을 모르는 군중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칭찬하기 바빴다.
그들의 말에 벽소월을 비롯하여 은검문 전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중이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칭찬이 이들을 허명에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흐흠!”
벽소월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이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곧 나락에 떨어질 것도 모른 채.
“비무 시작!”
오늘 비무의 정식 입회인이 될 제삼자의 호명에 마침내 금령공자 장운과 은광세검 벽소월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스윽!
벽소월은 시작하자마자 방어적 태세를 취하였다.
약속했던 대로 선제공격을 받아내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러면서 청수한 도인의 풍모를 자랑하며 슬쩍 손을 들었다.
와아아아!
그 여유로우면서도 인자한 모습에 뭘 모르는 여러 군중들이 환호를 하며 화답을 하였다.
“……그럼 갑니다.”
장운은 그 모습을 한 차례 빤히 바라본 다음 천천히 초령검을 들어 올렸다.
그 자세가 어찌나 완벽하고 매끈하던지 옥석(玉石)을 구분할 줄 아는 자들은 일제히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반면 벽소월은 내심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실수이자 패착이었다.
-사식(四式) : 무극만검(武極滿劍)!
금령공자 장운은 자비가 없었다.
선제공격을 얼마든지 양보하였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즉, 첫 초식부터 무려 혼원무극검법의 절초인 사식 무극만검을 시전한 것이다.
파아아아앗!
오식을 깨우친 이후, 이전보다 훨씬 더 풍성해지고 강력해진 장운의 검강이 초령검을 따라 소용돌이쳤다.
더군다나 무극만검이 어떤 초식이던가?
장운의 앞을 가로막던 무수히 많은 자들이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그 검에 쓰러질 정도였다.
하물며 벽소월과 비슷한 급이라는 장운의 아비, 금령검객 장천호조차 고전을 면치 못한 초식이지 않은가.
선제공격의 이점 아래 무극만검을 그대로 시전해 버렸으니 이것은 가히 폭력에 가까웠다.
“엇? 어어어어?!”
상황은 장운이 예측했던 대로 흘렀으며 벽소월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었다.
첫 초식부터 해일과 풍랑이 밀려오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휘익!
벽소월은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이 행동은 머리로 계산하여 취한 행동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본능이 반사신경처럼 반응했던 것이다.
즉, 제대로 된 방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대로 버틸 리 없었다.
콰지지직!
벽소월은 갖은 겉멋을 부릴 때와 달리, 그대로 뒤로 발라당 나자빠지며 비무대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지가 하늘로 향하며 고개는 옆으로 획 제쳐진 것이 어찌나 우스워 보이던지 황금표국의 일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
단 일검, 단 일초식, 선제공격 한 방에 비무는 종료되고 말았다.
이 허망하고도 어이없는 결말에 좌중들은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고 놀라 경악하여 입을 다물어버린 것은 은검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모두가 얼어붙어 있는 와중 그나마 소리를 내지른 것은 은검문의 후계자이자 은광세검의 장남인 벽광일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며 곧바로 아비에게 달려갔다.
“컥! 커커커커커컥!”
장남의 부축을 받은 채 몸을 일으킨 은광세검 벽소월은 다행히도 죽거나 주화입마에 들어서지 않았다.
사실 그 자리에서 절명하지 않았던 것은 장운의 배려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명색이 무림의 선배거늘 어찌 목숨을 취할 수 있겠나?’
대신 자만하고 진짜를 알아보지 못한 아둔한 눈을 가진 죄로 냉혹한 현실을 조금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친선 대련이 아니니만큼 장운이 마음먹기에 따라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벽광일은 거듭 거친 호흡을 내뱉는 아비를 애써 일으키면서 조치를 취했다.
그 덕분일까?
벽소월은 장운의 배려와 벽광일의 도움 덕분에 일검에 패배한 자 치고는 재빨리 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출혈도, 내상도 없었으니 금방 정신을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워낙 놀랐던지라 벽소월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한숨을 내쉰 후에야 간신히 정신 차릴 수 있었다.
“네 이노오오옴!”
곧바로 정신을 차린 벽소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장운을 향해 호령을 내뱉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고 위엄을 갖춘 채 떠받드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작자가 선제공격을 양보한 주제에 채 일검도 버티지 못하고 무참히 패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치욕이었다.
‘그것도…… 사지를 위로 든 채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격렬한 비무 끝에 멋지게 패배한 것도 아니고 유악한 서생이 천하장사(天下壯士)에게 주먹 한 방 맞고 기절한 모양이 되었으니 벽소월은 차마 버틸 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반면 장운은 무덤덤했다.
기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길 것이었고 그 결과가 좀 더 빨리 다가온 것뿐이었다.
“네, 네놈이 정녕…….”
그 덤덤한 반응에 벽소월은 더 화가 치밀어 울화를 터뜨리려는 찰나!
“선배께서 선제공격을 양보하셨고 저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장운이 물었다.
그 말에 벽소월을 비롯하여 벽광일과 은검문도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장운이 먼저 제안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선제공격을 양보하겠다고 찬사와 박수를 받은 것은 벽소월 본인이 아니던가?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제공격을 양보했으면 예전초식(禮典招式)으로 화답해야지.”
벽소월이 더듬더듬 당황하며 외쳤다.
예전초식은 주로 허례허식을 위시로 하는 명문 정파에서 친선 비무, 혹은 대련 때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공격성을 배제한 채 인사를 위해 만든 초식이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소림의 동자배불(童子拜佛)처럼 예의를 위해 만들어진 초식을 예전초식이라 불렀다.
“네? 실전과 같은 비무에서도 예전초식을 취해야 합니까?”
장운은 어이없는 척 정곡을 찔렀다.
“…….”
너무나도 정확한 말을 듣자 벽소월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장운의 말이 옳았으니까.
처음부터 장운은 실전을 방불케 하자는 비무를 제안했고 벽소월도 받아들였다.
그러니 선제공격이나 예전초식 같은 것은 생략해도 되며 오히려 그런 것을 제안하는 쪽이 겉멋에 찌든 허세인 셈이다.
“흠흠! 내, 내가 착각을, 내 사고에 오류가 있었네. 그러니…….”
벽소월은 전형적인 꼰대였다.
자신의 논리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번 비무는 자신의 착각으로 패배하였으니 무효로 하자는 제안을 하려 했다.
“없던 일로 하고 다시 비무를 하잔 말씀이시죠?”
장운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했다.
“그렇지!”
의외로 장운 쪽에서 먼저 말을 해주자 벽소월은 간만에 화색이 돋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장운은 여기까지 이 모든 것을 계산했는데 그것을 아예 모르는 벽소월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사실 장운은 선제공격을 감행할 때부터 예상했다.
일검에 패배한 벽소월이 억지를 부리며 재대결을 요청하리란 사실을.
예상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벽소월의 맷집이 생각보다 좋다는 점, 그것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허락하지요.”
그것을 예상하였기에 장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는 한 치의 예상도 어긋나지 않게 움직이곤 했다.
“뭐, 뭐어?”
벽소월은 장운이 생각보다 훨씬 더 흔쾌히, 수월하게 허락을 하자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자신을 무참히 꺾었으니 그 명예만 취한 채 대결을 회피하리라 생각했다.
벽소월은 자신이 장운이라면 절대로 재대결에 응하지 않으리라 판단 내렸다.
만약에 진다면 이전의 승리는 운이 좋은 것으로 치부되니 장운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한데 이렇게 흔쾌히 허락한다니 벽소월 입장에서는 의외라고 느꼈다.
“이 감숙성에 모처럼 많은 동도들이 모였습니다. 한데…….”
장운은 좌중을 돌아보면서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벽소월에게 시선을 향했다.
“단 일검 만에 허망히 끝난다면 아쉬워서 어찌 발걸음을 돌리겠습니까?”
장운의 입장은 여전했다.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싸운다.
결과는 물론이고 몸도 마음도 온전히 패배를 느낄 때까지 흠씬 두들겨 준다, 였다.
“벽 선배께서 납득하시기 어렵다면 저는 얼마든지 더 싸워도 좋습니다.”
부르르!
벽소월은 그 치욕적인 말에 전신을 떨다가도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장운이 마음을 바꿔 재대결을 하지 않을까 봐 싶은 것인데 소인배의 눈에는 소인배만 보이는 법이었다.
장운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벽소월은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줄 알았다.
“내가 너무 방심했네. 그러니 다시 하세.”
결국 벽소월은 체면을 잔뜩 구긴 채 정식으로 비무 요청을 다시 하였고.
“바로 시작하시죠.”
장운의 말에 무림의 선배와 후배가 공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준비하시고…….”
입회인을 맡은 제삼자의 말에 장운과 벽소월은 다시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재대결이 성사되기 직전!
“아! 이번에는 선제공격을 양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끝까지 확인사살을 취하는 장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