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143화
외가(外家)의 부탁(7)
“네…… 에?”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원평은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태원평이 살아온 사흑천은 모두들 자신의 아비, 광혈흑마 태상천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그런데 눈앞의 금령검제는 오히려 태상천을 흔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쓰기 싫어?”
뭐든지 다 들어줄 기세는 언제고, 태원평이 이제 와 태도가 돌변하자 장운은 밀고 당기기를 시전하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태원평은 정말이지 태상천이 너무나 두려웠다.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여, 자신의 아비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싫으면 말아라. 나는 상관없으니까.”
장운은 진정 무자비했다.
다시 주먹을 말아 쥐고는 폭력을 행사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매 앞에는 장사 없다는 옛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제아무리 콧대 높은 사흑천 후계자 태원평이라고 해도 매질을 버틸 수는 없었다.
물론 순순히 따르려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그래, 서신을 쓰면서 감금되어 있다는 뜻을 담아서 은밀히 써보자!’
이런 희망에 부풀었지만 장운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내가 불러준 그대로,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쓰도록. 만약 한 글자라도 어긴다면……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베고 더 이상 협상은 없다.”
장운의 그 서슬 퍼런 말에 태원평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악마야. 저놈은 필시 악마가 분명해.’
자신을 너무나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운의 모습을 보며 태원평은 경이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다시 불러주마. 그대로 받아 적어.”
그런 태원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운은 협상의 달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제가 이것을 쓴다면…… 저를 살려주실 겁니까?”
서강 상단에 처음 올 때 모습과는 달리, 잔뜩 풀이 죽은 태원평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장운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 * *
“천주님. 도련님께서 본 사흑천의 성을 넘어 서강 상단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시간은 다시 원점으로, 태원평이 장운이 던진 미끼인 서신에 낚여 미친 듯이 서두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쯧쯧, 이 아비가 다 알아서 해준다니까.”
수뇌부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태상천은 거대한 근육을 꿈틀대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굴 닮았는지 몰라. 아무튼 간에 광마친위대는 붙였겠지?”
태상천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정파와 분위기가 좋지 않아 외출을 삼가라고 명령을 내리려던 차였다.
한데 하나뿐인 아들이란 녀석이 여인의 호출이 신이 나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좀 복잡하다고나 할까?
“물론입니다. 대신 많이는 아니고…… 혈랑검 제진명을 비롯하여 호위대 세 명이 따라붙었습니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에 태상천은 굵고 두터운 눈썹이 꿈틀대었지만 그것도 잠시.
“흐음, 혈랑검이라면 차기 대주 감으로 손색이 없는 아이지.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는군.”
태상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혈랑검 제진명이라고 한다면 대주 직급과 무공을 견줄 만한 고수였다.
또한 상황 판단이 빠르고 눈치도 쓸만해서 태상천 역시 내심 중용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던 중 오후가 되던 때였다.
“처, 천주님! 큰일 났습니다!”
오전에 보고를 하였던 수하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태상천은 그의 낯빛을 보자 솔직히 직감하였다.
필시 자신의 아들인 태원평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아니나 다를까?
“도련님께서 서강 상단으로 이동하던 도중…… 화산파의 고수들과 조우하여 시비가 붙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태상천은 크게 좌절하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왜 하필 화산파란 말인가?’
화산파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인 것은 물론이고 섬서 최강의 집단 중 한 곳이었기에 감히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동시에 화산파를 비롯하여 정파 무림이 눈에 불을 켜고 사흑천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안타까움은 커져갔다.
“도대체 우리 아들을 건든 자가 누구란 말인가?”
태상천은 크게 노여워하며 소리쳤다.
상황이 복잡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승심이 끓어오른 까닭이었다.
“그게…… 화산파의 소요자라고 합니다.”
“소요자? 화산파의 대장로로 어지간해서 강호무림에 나오지도 않은 자가 왜?”
태상천은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께서 하필이면 소요자가 그토록 아낀다는 화산지화 예진설에게 다가가다가 그만 시비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핫!”
태상천은 사연을 듣자 더욱 어이가 없었다.
‘신부를 맞이하러 간 놈이 도중에 한눈을 팔아?’
영웅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을 품는 법이니 여인을 많이 만나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강여월이라는 신부감을 보러 가는 자리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아비인 태상천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나서야겠다.”
태상천은 진지한 얼굴로 당장 뛰어갈 채비를 하였다.
소요자는 자신조차 긴장해야 될 정도로 고수였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미우나 고우나 자식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었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천주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헉헉!”
다른 수하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뭣이라?”
“저희 정보원들이 파악하기로는, 헉헉…… 도중에 잘 해결이 되어 도련님께서 무사히 서강 상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어찌나 빨리 왔던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
태상천은 이제야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그 이후부터는 걱정이 없었다.
서강 상단 측으로부터 잘 도착했다는 보고와 함께 예비 신부와의 대면은 잘 끝났으며 많은 선물을 대동한 채 태원평 일행이 사두마차를 타고 떠났다고 알려왔다.
“서강 상단이면 조금 아쉽긴 해도…… 어차피 평아도 정실 부인이라기보다 노리개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상황이 잘 풀려 곧 이어질 것 같다는 소식에 태상천은 그리 평가하였다.
실제로 태상천은 물론이고 태원평도 강여월과의 관계에 있어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그저 미색 하나에 홀렸을 뿐이고, 태상천은 서강 상단의 금자와 재산에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한데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렀다.
“평아가 왜 이렇게 늦지?”
분명 서강 상단을 떠났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태원평은 물론이오, 그의 호위를 맡은 광마친위대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도련님께서 무척이나 오랜만에 강호무림에 나섰으니 여흥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요?”
수하의 말이 일리가 있어 그러려니 했는데 그러기를 벌써 삼 일이 지나던 그때였다.
“천주님! 이것을 좀 보십시오!”
수하가 미친 듯이 달려와 부리나케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 서신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태상천의 마음을 진탕 흔들기 충분하였다.
-아버지, 무림맹 놈들에게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물론 이는 모두 장운의 계획이었다.
장운은 전생인 검신 장인랑 시절, 무림맹주인 천운학검 남일산과 사흑천주인 광혈흑마 태상천 두 사람 모두에게 팽을 당하였다.
그래서 장운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두 집단,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다…… 그 무림맹과 사흑천을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
장운의 계획은 실로 대범하고 정교했다.
정말이지 금령검제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성공만 한다면 무림맹과 사흑천 모두에게 복수를 행해야하는 장운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 이것은 필시…… 평아의 서체가 분명해!”
태상천은 그답지 않게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비의 자식의 서체를 몰라볼 리는 없었다.
사실 태원평은 사흑천 내부에서도 악필(惡筆) 중의 악필이었기에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심지어 선혈까지 튀었어!’
태상천은 그 서신에서 이리저리 튄 피를 보고는 주먹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엄하게 키우긴 했어도 그래도 나름 금이야 옥이야 다루었다.
자신은 때려도 남들은 못 때리게 키웠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무림맹이 도대체 왜…….”
태상천은 수뇌부와 함께 도대체 이게 무슨 사단인가 의구심을 품다가 어렵지 않게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화산파를 비롯한 정파 놈들과 시비가 일어났다고 했지.”
태상천은 확신했다.
정파 무림은 안 그래도 자신과 사흑천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 사흑천의 후계자란 놈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탐스러운 먹잇감이리라.
‘그들의 짓이 분명해!’
더군다나 정파 무림에서 그토록 좋아하는 명분도 있었다.
화산파의 가장 큰 어른인 소요자와 시비가 붙었으며 화산파의 꽃이라는 예진설을 희롱하였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태상천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사실 그도 좀이 쑤시던 차였다.
검신 장인랑을 끌어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천운학검 남일산 때문에 너무 조용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광마친위대를 비롯하여 본 사흑천 정예 병력을 모두 소집하라!”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더 참는다면 사파 지존이 아니라 동네 건달만도 못한 신세가 되리라.
“존명!”
태상천의 한마디에 광마친위대들과 사흑천이 자랑하는 여러 정예 병력이 일제히 도열하였다.
이 광경만 보아도 얼마나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우리 사흑천의 일원들은 들으라.”
태상천은 분노와 자긍심, 그리고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천하일통(天下一統)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심 희망을 가진 채로 열심히 소리를 질렀다.
“더러운 위선자이자 비겁한 정파 놈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나뿐인 후계자, 내 아들 태원평을 납치 및 감금한 것으로 보인다! 빌어먹을 정파 놈들이 다른 짓을 벌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도록 하자.”
태상천은 그저 당하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누가 때렸는지 피아식별(彼我識別)을 제대로 못 해서 그렇지, 행동력 하나만큼은 예술인 작자였다.
“우리의 형제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모두 다 진군하라!”
태상천은 그 길로 정파 무림과 전면전을 선포하고 말았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니냐고.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이니 상황이 보일 리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정파 무림을 도륙하고 마음껏 살육행을 저지르고 싶었던 사흑천과 태상천은 미쳐 날뛰었다.
우와아아아!
바야흐로 과거에 존재하였다던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령검제 장운이 조작한 한 통의 서신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