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대본을 쓸어담자
어제 자기 전, 오랜만에 삼국지 소설을 봤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위빠인 나로서는 촉빠인 나관중의 역사 왜곡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삼국지연의는 부정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거기에 분명 이런 장면이 있었지.’
분명 조조는 순욱 한 명만을 등용했는데.
‘거, 주위에 괜찮은 사람 없어요?’ 했더니 순욱이 희지재를 데려오던 장면.
문득 그때가 떠오르는 지금이었다.
“이게… 박은지 작가님 작품이라고요?”
“네. 아시죠? 작년에 넝쿨당 쓰신 분.”
“알다마다요.”
그걸 쓰신 분이셔서 그런가.
넝쿨째 이런 대본이 굴러 들어오네.
“어때요? 괜찮죠? 남주랑 여주 캐릭터가 완전 매력 있지 않아요? 여배우들 이거 많이 탐낼 거 같던데.”
“…네. 괜찮네요 확실히.”
물론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한국 내에서도 당시 방영되던 드라마 중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 1위를 찍고.
‘이거 중국에서 대박 치지 않나?’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도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게 되는 드라마였다.
이 작품 덕분에 치맥이 중국 내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되고, 치킨의 매출이 매우 크게 증가했을 정도.
그냥 드라마 하나가 흥행했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회현상에 가까운 반응이 나오게 된다.
덕분에 드라마 주인공 역을 맡았던 남녀 배우 둘 모두 중국에서 엄청난 떡상을 하게 되기도 했다.
물론 원래부터 둘 다 톱 배우들이기는 했지만, 그걸 넘어서 CF 등으로 1년에 수백억 단위의 돈을 챙겨 갈 정도.
아마 그해 연예인 수입 1, 2위인가 그랬을 거다.
“박 작가님이랑 얘기 좀 나눠 봤는데, 저희가 제작을 맡는 거에 꽤 긍정적이시더라고요. 고료만 맞는다면 OTT 독점도 좋다고 하셨고요.”
“원하시는 고료가 어느 정도인데요?”
“음. 정확히는 아직 말씀 안 하셨는데… 눈치로 봐서는 회당 1억 원 가까이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당 1억 원이요…….”
그러면 총 얼마야.
20부작이라 쳤을 때 20억 원?
‘혜자도 이런 혜자가 또 없는데?’
언제였더라.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박은지 작가의 드라마, 우주에서 온 남자가 중국에 고작 6억 원 상당이라는 헐값에 팔렸다고.
그런데 고작 그만한 돈을 주고 판권을 사 온 중국의 동영상 사이트는 ‘우주남’으로 1,000억 원에 달하는 광고 수익을 올렸다면서.
재주는 한국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번다고 불평하던 기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그 1,000억 원의 광고 수익은 고스란히 내가 차릴 OTT의 수익이 되는 거다.
‘게다가 우주남을 보기 위해 가입할 여성 회원들까지 생각하면…….’
그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아무리 소설이건 드라마건 상관없이 썼다 하면 작품들을 모두 성공시킨 작가라지만.
그런 내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 작품이 대부분 남성향이라는 것.
검객무쌍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 대부분과 <마지막 마법사> 또한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연기천재가 되었다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고루 인기를 끌었다지만, 그건 연기천재가 되었다의 경우에만 한정된 얘기였다.
‘그래서 걱정도 조금 있었지.’
샤젤 감독이 라라랜드를 만들기 이전까지는, 여성 시청자들의 유입을 이끌 만한 킬링 콘텐츠가 부족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
그런데 그런 걱정이 지금 단번에 해결되게 생겼다.
‘여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우주남의 인기는 진짜 엄청났었으니까.’
일이 처음부터 잘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처음 받아 본 대본부터 이런 대어를 낚게 되다니.
물론 우주남 하나 가지고는 신규 여성 유저들을 오래 붙들고 있지는 못할 거다.
OTT 플랫폼이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질리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계속 자극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사실 드라마 관련해서는 굳이 회귀자 노트를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없었다.
나름 배우는 배우였다고.
내 머릿속에는 우주남 말고도 앞으로 수년 내에 성공하게 될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양 PD님, 혹시 방송국에서 편성이 미뤄졌거나, 제작이 불발된 대본들을 구해 보고 싶은데, 있을까요?”
“음. 그거야 어렵지 않죠. 당장 저한테도 그런 대본이 너덧 개는 있었으니까요. 주위에 물어보면 훨씬 더 많을 거고요. 그중에는 sbc 드라마 공모전 수상작도 있고, 타 방송사 공모전 수상작인데 편성이 불발돼서 저희한테 넘어왔던 것들도 있습니다.”
“그 대본을 저희가 제작한다고 해서 문제는 없겠죠?”
“예. 아무리 공모전 수상작이라고는 해도 편성이 안 되면 결국 저작권은 온전히 작가들 거라서요.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상파 방송국 공모전에서 수상을 했다가, 결국 편성이 안 되고 케이블로 넘어갔는데.
예상외의 대박을 치게 되는 작품들.
그런 걸 찾아보고자 했다.
* * *
최근 방송업계를 시끄럽게 하는 얘기가 있었다.
SW 프로덕션.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의 회사가 채용 공고를 올린 것.
물론 채용 공고를 올리는 신생 회사가 등장한 건 사실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었다.
-여기 어디야? 사명을 바꾼 건가?
-설립일 보면 신생 맞는 거 같은데… 조건이 이렇다고?
-말이 돼? 합성 사진 아니야?
드라마 스태프, 영화 스태프 등이 모이는 모 사이트의 갤러리.
이들이 난리가 난 건 SW 프로덕션의 채용 공고에 명시되어 있는 근무 조건 및 복리 후생 때문이었다.
드라마, 예능 등의 영상 제작사가 내건 조건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의 연봉과 인센티브가 적혀 있던 것.
-찾아보니 진짜네; 저만한 돈을 준다고? 대체 얼마나 굴리려고.
-ㅋㅋㅋㅋ공고에만 저렇게 말하고 막상 연봉 협상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줄이겠지. 한두 번 속냐.
-ㅇㅈ. 솔직히 저 조건은 말이 안 됨… 너희 같으면 150에 쓸 수 있는 걸 굳이 저만한 돈을 주겠음?
└150이 뭐냐 ㅋㅋㅋ 100만 주고 입 싹 닫는 놈들 겁나 많은데
사실 한국의 영상 제작 환경이 참으로 열악하기 그지없는 게.
경력이 몇 년은 되는 스태프들도 최저 시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 게 한국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냥 최저 시급만을 챙겨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웬만한 대기업 회사원에 준하는 만큼의 월급을 기본급으로 주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진짜가 맞는 건지 믿기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한 댓글이 의견 하나를 제기했다.
-어? 잠깐만… 나 SW 프로덕션의 SW가 뭔지 알 거 같은데?
└?? 뭔데?
-대표자 성함 봐 봐. 최진섭이라 되어 있는데 저 사람 얼마 전까지 SBC 드라마국 CP였던 양반임. 회사 홈피 가서 보면 최 CP 밑에서 PD 하던 양진철 PD도 이 회사 소속이라고 나와 있음.
-어, ㅅㅂ 나도 알겠다.
└뭔데.
└SW 그거네, 그거.
└;;; 간 좀 그만 보고 시원하게 말 좀 해라.
└패고 싶네 ㄹㅇ
-최진섭 CP: 연기천재가 되었다 담당 CP / 양 PD는 전작 뭔지 다들 잘 알지?
└연기천재 아님?
└이 정도면 다 말해 줬다ㅋㅋ
└ㅇㅈ 여기까지 말했는데 SW 모르는 거면 본인 머리 탓하면 된다.
-와… 설마 선우? 선우진? 그럼 선우진이 제작사 차린다고?
-몇 주 전에 선우진이 써밋 엔터 인수했다는 건 기사로 봤는데… 한국에도 제작사 차리려는 건가?
SW 프로덕션의 소유주가 선우진이 아니냐는 것.
이러한 의견은 나오자마자 삽시간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우진이 SW 프로덕션의 주인일 거라는 게 거의 사실로 취급되자마자.
채용 공고에 대한 반응이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와 ㅆㅂ 채용 지원 사이트 순간 마비됨 ㅋㅋㅋㅋㅋ
-떡밥 보고 있던 애들 다 지원서 넣으러 갔나 보네.
-그럴 만하긴 함… 나 지금 이직 1주일차인데 저기 지원서 넣을까 고민 중.
-선우진이 주인이면 저 조건들 다 진짜겠네. 쟤가 지금까지 거의 1조 벌었다며?
└ㅇㅇ… 대한민국 20대 최고 부자.
└ㅋㅋㅋㅋ심지어 그냥 20대도 아니고 20살임. 가장 파릇파릇한 때…….
-선우진이 차리는 회사면 무조건 가야지.
기존에 가득했던 의심의 눈초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사기가 틀림없다고 생각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거기에 선우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니, 신빙성이 확 올라 버린 것.
그러던 그때, 시끌시끌한 커뮤니티의 반응을 조금은 식히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SW 프로덕션 지원하려는 사람들 알아야 할 점]
지금 저기 채용 조건으로 한창 시끄럽던데…….
너희 그거 하나만 알아 둬라.
선우진이 돈 많다고 막 퍼 주는 자선사업하는 게 아니라는 거 ㅋㅋ
몇 달 전에 외국계 기업이 한국에서 스태프들 스카우트해 간 거.
그거 알고 보니 선우진 회사였던 건 알고 있지?
참고로 그때 데리고 간 사람 중에 실력 뽀록나서 바로 리턴한 사람들도 3분의 1이다.
한국에서 인맥이랑 술자리에서 야부리 터는 거로 일 해 먹고 살다가 정작 실력은 별거 없는 거 들통나서 그대로 잘림.
아마 SW 프로덕션도 비슷할걸?
실력 있으면 그만큼 대우받고, 없으면 걍 쳐다도 안 보고.
쟤네가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 실력에 자신 없으면 괜한 희망 가지지 마셈 ㅋㅋㅋ
참고로 여기서 실력 있다 기준은 네가 전날 술자리에서 술 꼴아서 감독한테 대들었어도, 네 실력 때문에 다음 날 울며 겨자 먹기로 감독이 널 찾을 정도.
-딱 말해 줌. 본인이 현장에서 짬밥 더 먹었다고 꼰대질하는 놈들보다 실력은 훨씬 좋다. 하지만 ㅈ같은 국내 환경 때문에 그동안 빛 못 보고 있었다. 이런 놈들만 지원해라.
-엌ㅋㅋㅋ 실력 있다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님?
└저거 실제 있었던 유명한 썰임. 저분도 외국계 회사에서 여기저기 헤드헌팅할 때 제의 받으셨었는데… 영어 안 된다고 거절하셨다던데. 한번 연락드려 봐야겠네.
└박OO 감독님? 그분은 인정이긴 하지.
-이거 맞음. 내 주위에도 선배 두 명 할리우드 진출하게 됐다고 술 쐈다가 한 명은 2주 일하고 돌아옴 ㅋㅋㅋ
└오, 다른 한 명은 남은 거?
└ㅇㅇ 한국에 있을 때도 실력 남달랐던 선배긴 한데… 암튼 돈 ㅈㄴ게 벌더라 연봉 최소 10만 달러부터 시작.
└10만 달러? ㄹㅇ? 1억을 넘게 준다고?
└ㅇㅇ 게다가 인센티브도 지림. 이번에 위플래쉬라고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있는데, 그 선배 거기 촬영 팀으로 합류했다가 영화 대박 나서 인센 엄청 받았다고 자랑하던데 ㅋㅋㅋ
그리고 비슷한 시각.
스태프들이 SW 프로덕션이라는 회사의 등장으로 한창 불타고 있을 때.
조금은 비슷하면서 다른 이유로 시끌해진 곳이 하나 있었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기획사, 사람액터스.
일찍이 한시연을 연기천재가 되었다에 투입한 혜안으로 최근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그들이었다.
연기천재가 되었다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그녀가 최근 계약한 cf가 중국에서만 무려 20개가 넘는 것.
“진짜야? 최 CP하고 양 PD 둘 다 방송국을 나가서 선 작가님 밑으로 들어갔다고?”
“네. 어제 양 PD님이 그러셨어요. 얘기 나온 지는 꽤 된 거 같던데, 퇴사한 건 그저께시라던데요?”
“으음.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 들어가신다는 대본 졸라서 받아왔다고?”
“네. 팀장님 의견도 좀 들어 보려고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팀장과 한시연.
한시연의 얘기를 들은 한 팀장이 그녀의 앞에 놓인 대본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 팀장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거… 냄새가 조금 나는데? 대박의 냄새가?’
한 팀장이 진짜 냄새가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코를 킁킁댔다.
그걸 본 한시연이 ‘저 오빠 또 저러네’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예전 그녀한테 연기천재가 되었다에 꼭 출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 연기천재를 제외하면 한시연의 가장 흥행작인 미니시리즈를 추천했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고.
오죽하면 사람액터스 내에서 한 팀장 별명이 개코겠는가.
무슨 신기라도 있는 건지, 작품 흥행 냄새는 개보다 잘 맡는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아무튼.
한 팀장의 저 표정은 대박작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
그걸 캐치 한 한시연이 자신의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톡, 토도독-
[작가님! 잘 지내시죠? 한국 들어오셨다면서요? ㅎㅎㅎ 저희도 조만간 한번 봬야죠! 저번에 주원 오빠랑만 야구장 가시고 ㅜㅜ 저도 불러 주시지! 서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