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날이 오다
양진철 PD를 통해 여러 대본을 받아 봤는데.
‘내가 몰랐던 것 중에도 좋은 시나리오가 많아.’
지상파 방송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들.
그런 대본 중에서 예상외의 진주들이 꽤 있었다.
‘이걸 왜 아직까지 편성을 안 했지?’ 싶은 작품들.
물론 방송국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사실 로맨스가 주가 되는 작품이 아니면 지상파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만들기는 힘들지.’
지상파에서 아무리 대본이 괜찮더라도 드라마 제작에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게.
TV 시청자들이 원하는 드라마 장르는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 시청률일 텐데.
TV를 시청하는 주요 시청층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년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OTT는 얘기가 다르지.’
반면, 인터넷을 통해 VOD와 같은 방송 콘텐츠를 보는 이들은 20대, 30대들.
그렇기에 OTT 플랫폼의 작품은 그런 젊은 시청층을 공략해야 했다.
지상파에서는 수요층이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편성이 반려당한 작품들이 오히려 OTT에서는 더 좋은 콘텐츠일 수도 있다는 것.
‘게다가 요즘 드라마 트렌드는 이런 작품들이 더 먹히기도 하고.’
지금 시기가 딱 그때였다.
TV에서 반복되는 뻔한 사랑 타령, 전문성 부족 등의 한국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질리기 시작한 시기.
덕분에 앞으로 몇 년간 인기를 끌게 되는 드라마 장르는 미생이나 응답하라와 같은 현실과 매우 흡사한 생활 밀착형 드라마들인데.
지상파에서 반려당한 대본 중 그런 것들이 꽤 있었다.
“이거 좋네요. 미드 보는 거 같기도 하고, 웹 소설 읽는 거 같기도 하고.”
“오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선하더라고요. 미드에는 이런 게 많은데,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장르잖아요?”
범죄 수사 드라마의 대본.
회귀 전에 이런 장르의 드라마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과는 색다르게 차별되는 점이 있어 신선했다.
‘본 적은 없는 드라마인데, 꽤 내 취향이야.’
주인공은 형사였다.
총 10개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형사.
그중에는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던 전생도, 전쟁터의 병사로 살았던 전생도, 냉전 시대 소련의 스파이로 살았던 전생도 있었다.
전생의 경험과 지식 등을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범죄 수사물.
주인공은 실제 살인을 해 봤었던 전생의 경험을 통해, 살인자의 사고방식을 추측해 범인을 잡아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주인공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웹 소설의 느낌이 진하게 나면서도, 드라마 문법에 맞춰서 대본을 쓴 게 묘한 재미가 있었다.
“…어?”
이것 외에도 OTT로 나온다면 잘 팔릴 것 같은 작품들은 더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내가 감으로 잘될 거 같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잘됐었던 대본.
“양 PD님, 이분한테 연락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글이 좋네요.”
“어? 프런트? 아아, 그 스포츠 드라마요?”
“네. 보셨나요? 어떻게 읽으셨어요?”
“봤죠. 재밌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스포츠 드라마라 조금 꺼려지긴 하더라고요. 그 왜, 예전에 MBS에서 말아먹은 외인구단이라는 드라마 있죠? 그게 제 대학 선배가 맡은 작품이거든요. 하하.”
외인구단이 진짜 제대로 망했었지.
저거 망하고 나서는 간간이 나오던 스포츠 드라마가 아예 사라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나 드라마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드라마 대본, 프런트도 그런 작품이었다.
몇 년 후에 방영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야구 선수가 아니라 구단을 운영하는 단장이 주인공으로 스포츠 드라마 같으면서도, 오피스 드라마 같고, 그러면서도 성장 드라마 같던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알던 드라마와는 내용이 조금 달라. 아마 이게 초안이고 드라마로 나온 건 여기서 더 발전된 거겠지.’
전체적인 뼈대는 같았지만, 세부적인 에피소드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드라마로 나왔던 최종본이 훨씬 더 발전된 버전이었다.
회귀 전 스포츠 소설을 썼던 나였기에, 당연 이 드라마도 재밌게 봤었다.
명대사나 명장면들이 많아 몇 번이나 돌려 봤었을 정도.
작품의 인기도 대단했었다.
첫 시청률이 3%대에 불과했던 게 마지막쯤에는 20% 가까이를 찍었을 만큼 엄청나게 성공했던 드라마였다.
거기에 인터넷 화제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내가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서도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그날 내용을 가지고 여러 게시글이 올라왔었을 정도다.
“이 작가분한테 한번 컨택해 보죠. 잘만 찍는다면 좋은 드라마가 나올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주남 3, 4화 나온 거 보셨나요?”
“네. 봤어요. 좋던데요?”
박은지 작가와는 며칠 전 계약을 끝마쳤다.
회당 고료는 처음 박은지 작가가 선제안한 대로 회당 1억.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우면 고마웠지.
아무튼, 회당 1억이라는 금액이 박은지 작가에게 열정을 불어넣기라도 한 건지, 드라마 대본이 빠른 속도로 나오고 있었다.
‘배우들도 슬슬 확정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한시연한테서 카톡이 오기도 했다.
아마 우주남의 대본을 읽어 보고 출연 욕심이 생긴 모양.
뭐,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우주남은 양진철 PD가 메가폰을 잡고 찍게 될 작품.
내가 회사의 주인인 건 맞지만, 캐스팅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뭐 돌아가는 걸 보면 양 PD님은 시연 씨도 후보 중 한 명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물론 베스트는 원래 우주남을 찍었던 여배우가 이번에도 맡는 것일 것이다.
연기천재가 되었다로 한시연이 톱급 배우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여주 역을 맡았던 분과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니까.
이제 막 톱급이 된 사람과 그런 자리를 몇 년이 넘게 유지하는 사람은 다른 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래 역할을 맡았던 여배우분은 캐스팅을 거절하셨다.
양진철 PD도 우주남의 여주 역이 그분께 찰떡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의사를 물어봤었다던데.
거절하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어쩔 수 없긴 하지. OTT 플랫폼 독점 계약인 만큼 배우들 입장에서는 꺼려질 수밖에.’
지금 시기는 대중들에게나, 배우들에게나 OTT 플랫폼에만 독점 공급되는 작품이란 게 꽤나 생소한 시기.
게다가 아직 제대로 출범하지도 않은, 시작 단계나 다름없는 플랫폼 독점 공급이니.
출연을 꺼리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남주인공 역할만큼은 내가 알던 배우와 긍정적으로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점.
아무래도 여배우분과는 달리 남배우분은 이제 막 주연급 배우로 들어선 분이었으니, 출연료만 맞는다면 OTT 플랫폼 독점 공급도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그나저나-
“채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예.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별개로 채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나 진섭이 형이 알고 지내던 실력자들 위주로 스카우트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고요.”
며칠 전, SW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내가 차릴 OTT 플랫폼의 자체 제작 작품들을 만들 회사.
있어 보이려고 신축 빌딩의 고층을 임대해 사무실을 차리기도 했다.
아무튼.
SW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채용 공고를 올렸는데, 조건이 다른 회사들보다 훨씬 후해서 그런가 지원자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호구가 되면 안 되지만.’
물론 마구잡이로 아무나 채용하는 건 아니었다.
철저히 실력만을 봐 가며 사람들을 뽑을 예정.
학벌이나 경력, 인맥 등을 모두 배제해 가며 편집 실력이나 촬영 기술 등만을 검증할 생각이었다.
내가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돈을 푸는 거지, 그냥 자원 봉사를 하려는 게 아니니 말이다.
‘뭐 이쪽은 양 PD랑 최 대표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사실 내가 앞으로 무슨 드라마가 성공할지는 꽤 꿰고 있어도, 그걸 누가 연출했는지까지는 아예 모르는 터라 채용 관련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일임했다.
그나마 내가 아는 PD나 작가라면 정말 유명한 사람 몇 명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최근 케이블로 이적했거나 한 상태라서 영입이 당장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TVM 같은 곳은 연 단위로 재계약을 한다던데.
다음 해에는 놓치지 않고 우리 회사도 영입 경쟁에 뛰어들게 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국내에서 가장 큰 경쟁자가 TVM일 수도 있으니까.’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넷플릭스겠지만.
국내에도 경쟁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몇 년 후, TVM의 모그룹인 CM그룹이 차리게 될 TVed라는 OTT.
일명 티베드라 불렸던 그곳이 국내에서는 가장 큰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티베드를 차릴 생각도 못 하게 해야지.’
OTT 플랫폼을 차릴 생각을 하기도 전에.
국내 사용자 수를 최대한 확보해 자체 OTT를 차리는 것보다 우리에게 작품 공급을 하는 게 이득이라 느끼게 만들 생각이었다.
* * *
미국 법인을 통해 실리콘밸리의 개발자 십수 명을 채용했다.
이들에게 OTT 플랫폼의 개발을 맡길 생각.
우우웅-
[피터 잭슨 - 드디어 그날이 왔어!]
[나 - 무슨 날?]
[피터 잭슨 - 정들었던 친구와의 작별 인사를 하는 날. 오늘부로 호빗 시리즈의 촬영이 전부 끝났다고.]
내가 한국에서 제작사를 차리고 이것저것을 하는 사이, 피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 와우, 축하해. 기분이 어때?]
[피터 잭슨 - 음.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기분? 촬영 중간부터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 어서 때려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홀가분하면서도 찝찝해.]
[나 - 음… 내가 그 기분 잘 알지.]
[피터 잭스 - 자네도 장편소설을 끝낼 때면 이런 기분이었나?]
…그거 때문은 아니고.
전역 날, 부대 문을 나설 때.
내가 딱 저런 기분이었다.
그 전까지는 전역 날만 기다리면서 살았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까 좋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하고,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발걸음이 가벼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떠나가지 않는 기분.
‘아… 갑자기 짜증 나네.’
군대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솟는다.
이게 아직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한 문제인데.
이번 생에서 병역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초에 신검을 치뤘는데, 아무런 이상 없는 1급, 건강 그 자체가 나와 버렸다.
즉, 조만간 내게도 영장이 날아올 거라는 뜻인데.
한 번 갔다온 만큼 두 번 가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알아보고 있긴 한데…….
도통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편법이나 불법으로 뺄 수는 없고.’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하기는 조금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자칫 발각됐다가는 유승준이 아니고 미스터 유가 됐던 누군가처럼, 나도 미스터 선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금 국민 호감 작가로 등극해 있는 나인데.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후우. 이건 차차 생각해 보자.’
아무튼.
군대 생각으로 잠시 우울해 있던 사이.
[피터 잭슨 - 뭐, 기분 이상한 것도 <마지막 마법사>를 찍을 생각을 하면 확 사라지지만 말이야.]
[피터 잭슨 - 요즘 돈 엄청 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제작비는 잔뜩 준비해 뒀겠지?]
[피터 잭슨 - 내가 호빗을 촬영하면서도 미리 다 촬영 계획을 짜 놨다고.]
이런 연락이 와 있었다.
이거 참.
‘내가 촬영 노예를 제대로 구하긴 했단 말이지.’
역시 피터만 한 감독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