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군필 선우진
선우진이 떠나고 난 후의 위병소.
“아… 우진이도 드디어 가네.”
“전역자들 갈 때마다 부러운 건 원래 다 그렇다지만, 우진이 형 전역하는 건 진짜 존나 부럽습니다.”
“그러니까. 아, 우진이 전 재산 100분의 1만 나 주면 안 되나?”
“우진이 형 재산 100분의 1이면 그것도 몇천억 원입니다. 꿈 깨십쇼.”
“시발.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부러워지네.”
그를 배웅했던 부대원들이 아쉬움 섞인 말들을 뱉었다.
오늘 전역한 선우진이야 드디어 탈출했다며 좋아하고 있었겠지만, 남은 부대원들 입장에서 선우진이 떠난 자리는 무척이나 크게 느껴질 테니.
“후. 우진이랑 분대 외박 나가면 진짜 그것만 한 꿀도 없었는데. 지승아, 너는 한 번도 안 가 봤지?”
“일병, 홍지승! 예, 그렇습니다!”
“불쌍한 새끼. 그때 마신 술 한 잔이 지금 우리 월급만큼 나갔을 텐데.”
“이세진 상병님 월급 13만 원 아닙니까? 그러면 그때 마신 술 한 잔이 훨씬 더 비쌀 텐데…….”
“말이 그렇단 거지, 말이.”
가끔 분대 외박이나 분대 외출, 혹은 소대 외박을 나갈 때마다 부대원들을 거하게 대접하던 선우진이었다.
덕분에 남들은 근처 싼 펜션을 잡고 분대 외박을 즐길 때,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놀 수 있던 그들이었다.
심지어 호텔에 있는 비싼 술이란 술은 다 룸서비스로 시켜 놓고, 정작 몇 입 마셔 보더니 자기 입맛에는 안 맞는다며 어디다 전화를 해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위스키를 가져와 나눠 주기까지 했으니.
“그게 아마 발렌타인 40년짜리였나?”
“예, 그렇습니다.”
“저번 휴가 때 아버지한테 우진이 덕에 그거 마셔 봤다고 하니까 엄청 부러워하시던데.”
나중에 가격을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던 분대원들이었다.
한 병에 면세점 가격만 해도 8천 달러짜리 술.
면세점 가격으로 쳐도 한 잔에 30~40만 원은 했던 거다.
심지어 전 세계에서 연간 100병만 한정 생산되는 술이라고 하니, 시중가는 더 나갔을 터.
선우진과 같은 부대에 속한 덕에 얻은 행운이었다.
“와, 부럽습니다. 그런데 선우진 병장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부대원들의 말에 부러운 표정으로 홍지승 일병이 물었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와 며칠 전 일병이 됐지만, 정작 부대에 전입 온 지는 고작 일주일 된 홍 일병.
그에게 있어 선우진이라는 존재는 미디어를 통해서나 접해 본, 멀고도 먼 사람이었다.
물론 일주일 남짓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분대원으로 있었으니 조금의 친밀감이 생기기는 했다만.
말년 병장과 갓 전입한 신병의 거리감이란 게 그만한 세월로 쉬이 좁혀지는 건 아니었다.
“우진이 형? 뭐… 신기한 사람이었지. 쓸 때는 팍팍 쓰면서도 꽤 소박하기도 했고.”
“뉴스로 봤을 때는 뭐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막상 직접 보니 우리랑 다른 것도 없었지.”
“다른 게 없긴 뭐가 없습니까. 저도 그렇고 이세진 상병님도 우진이 형 얼굴 보다가 보면 웬 오징어 한 마리로 변하는데.”
“안 닥치냐?”
그러면서 또 재밌는 건 그렇게 한 병에 8천 달러짜리 술을 어디서 소주 사 오는 것처럼 가져오던 선우진이, 복귀해서는 다음 날 아침 메뉴가 꼬리곰탕에 오징어젓갈이 나오자 ‘해장 죽인다’라며 그걸 또 맛나게 먹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톱급 여자 아이돌 그룹을 만나 볼 수도 있으면서 주말만 되면 음악방송 생방을 틀어 놓고 여자 아이돌 노래를 따라부르던 모습도 그렇고.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던 인간이 바로 선우진이었다.
“후. 아무튼 좋은 세월 다 갔다, 다 갔어. 애들아, 들어가자. 이제 날 풀린다더니 아침이라 그런가. 춥다, 추워.”
어쨌든 그렇게 떠나간 선우진 병장을 추억하는 시간을 마치고.
분대장인 이세진 상병이 분대원들을 이끌고 막사로 향했다.
* * *
전역 다음 날.
어제는 가족들과 쭉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인터넷을 살폈는데.
원래 남 군 생활은 쏜살같이 빠르다고.
[선우진, 500여 팬 환영 속 전역.news]
-아니, 선우진 전역 벌써 함?
-엊그제 들어간 거 같은데 벌써 전역이라니 ㅋㅋㅋㅋㅋ
-근데 왜 기사에 사진은 없냐? 군복 입은 거 궁금한데
└기사는 여러 군데서 나왔는데, 다 사진 없더라 ㅋㅋㅋㅋ 아마 언론들 못 오게 한 듯?
└기레기들이 오지 말라고 안 옴? 신기하네.
└그냥 연예인 수준이 오지 말라고 하면 ㅈ까라 하겠지만, 선우진인데 뭐… 지금 쟤 위로 오성이랑 현대밖에 없지 않나?
└부자 순위 말하는 거면 그거 맞음 ㅇㅇ
-선우진이 이미지가 친숙해서 글치 ㅋㅋㅋㅋ 사실 개씹 넘사벽급 부자임.
-암튼 시간 겁나 빠르다~ 21개월 금방이네 그동안 대체 나 뭐 했냐…….
-ㄹㅇ 선우진 입대할 때 나 취준생이었는데 지금도 취준생이네… 시간 지난 거 맞냐?
└그건 네가…….
1년 9개월.
나한테는 지독히도 길었던 그 시간이 남들에게는 금방이었나 보다.
하긴, 원래 자기 군 생활만 길게 느껴지는 법이지.
그리고 나는 마냥 1년 9개월을 군 생활에만 충실했던 것도 아니라 특히 더 길게 느껴진 것도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
입대하기 전에 하도 벌려 놓은 게 많았던 터라.
휴가를 받아서 나와 놓고는 막상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실무적인 거야 직원들이 알아서 한다 해도, 주요한 결정 같은 건 결국 내 허락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휴가 내내 일만 한 건 아니었고, 즐길 건 다 즐겼다.
팰리스의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 국외 여행 허가를 받아 영국에 다녀오기도 했었고.
‘스읍. 어떻게 챔피언스리그 16강까지 진출하긴 했는데… 결과가 아쉽단 말이지.’
내가 런던을 찾았던 때는 바로 2014-15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13-14시즌을 결국 4위로 마무리지으며 그다음 시즌 챔스 진출에 성공한 크리스탈 팰리스.
챔스 플레이오프에서 베식타시 JK를 만나 총스코어 4-1로 가볍게 그들을 꺾었고, 나아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갈라타사라이, 모나코, 크리스탈 팰리스]라는 개꿀 of 개꿀 조편성을 받아 내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강에서 예상외의 강팀을 만나고 말았으니.
‘왜 유벤투스가 조 2위냐고.’
조별 리그에서 AT 마드리드에 의해 2위로 밀려 버린 이탈리아의 최강 팀 유벤투스가 바로 그 상대였다.
심지어 14-15시즌의 유벤투스는 직전 시즌 리그에서 역대 최다 승점, 전 구단 상대 승리, 홈경기 전승 등의 기록을 양산했던 강팀이었으니.
이제 처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크리스탈 팰리스가 이겨 내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1차전 원정 경기 유벤투스 3 : 0 크리스탈 팰리스]
[2차전 홈경기 크리스탈 팰리스 1 : 0 유벤투스]
결국 최종 스코어 1 : 3으로 8강 진출 실패.
그나마 내가 홈구장을 찾았던 2차전에서는 승리를 거뒀다는 게 나름 고무적이라면 고무적인 성과였다.
게다가 그렇게 팰리스를 이기고 올라간 유벤투스가 결국 결승전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거뒀으니, 나름 졌잘싸라고 볼 수 있기도 했다.
물론 진출 실패는 여전히 실패였기에, 졌잘싸 따위에는 만족하지 못한 나였다.
특히 기존 스쿼드의 부족함을 여실히 실감하게 됐는데.
사실 유벤투스와의 16강에서도 그렇고, 조별 예선에서도 지난 시즌 EPL에서 보여 줬던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 팰리스였다.
그 원인은 신인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선수단이 리그와 챔스를 병행하면서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나도 14-15 시즌이 끝나고 쌈짓돈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즌 선우진의 픽은?! 3부 리그 MK 돈스의 델리 알리!]
-오! 델리 알리! 지난 시즌 리그1에서 베스트 11, 선수들이 뽑은 MK 돈스 올해의 선수, 풋볼리그 영플레이어 상을 수상한 친구지. 좋은 영입이야.
-그래 봐야 3부 리그 아니야?
└19세에 3부 리그를 평정한 거면 긁어 볼 만하지
└선우진의 픽을 의심한다고? 너 어디 팀 첩자야?
-그런데 우리 공미에는 더 브라위너가 있잖아. 젊은 데다가 이미 리그 최고 자원인 더 브라위너가 있는데, 굳이 추가 자원을 영입할 필요가 있을까?
└지난 시즌 못 봤어? 지금 스쿼드 뎁스로는 시즌 중반부터 선수단 체력이 다 퍼지던 거.
└게다가 지난 시즌을 보면 비엘사가 케빈을 공미가 아니라 더욱 낮은 위치의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하기 시작했단 걸 알 수 있지. 심지어 그 자리에서 케빈이 보여 준 위력은 놀라웠고. 아마 비엘사가 둘이 공존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첫 영입은 스쿼드 뎁스를 두텁게 하는 동시에, 잉글랜드 홈그로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델리 알리의 영입.
도중에 토트넘과 이적 경쟁이 붙어 이적료가 880만 파운드(125억 원)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델리 알리, 한때 잉글랜드 최고의 재능 소리를 듣던 그가 어디까지 몰락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델리 알리 말고도 현재 크리스탈 팰리스의 한쪽 윙을 담당하고 있는 ‘포스트 앙리’ 마샬의 미래 또한.
‘근본력이 부족하지, 근본력이.’
유망주를 유망주로 끝나게 하는 게 아니라 월드 클래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인 근본력.
마샬과 알리에게는 그게 부족했다.
더욱이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팰리스의 선수단에는 그런 근본력을 둘에게 주입시켜 줄 베테랑도 없었으니.
그 둘에게 제대로 된 멘탈리티를 심어 주는 것과 더불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해 줄 추가 영입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탈 팰리스의 팬들은 물론 전 세계 축구 팬들을 놀라게 한 깜짝 영입.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새로운 런던의 왕? 아니, 나는 신이 되겠다.” PSG를 떠나 팰리스로 이적! 2+1년 계약으로 확인!]
[경기력과 젊은 선수단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즐라탄의 영입! 팰리스 팬들은 이에 환호하다!]
[팰리스의 달라진 위상에 동의하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크리스탈 팰리스는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도 챔스에 진출하는 강팀. 내가 온 이상 팰리스는 빅6를 넘어 No.1으로 불리게 될 것.”]
즐라탄의 이적료는 선수의 나이가 있는 만큼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델리 알리와는 달리 즐라탄을 놓고 경쟁한 다른 팀이 없었던 덕분도 있었고.
만약 즐라탄과 PSG의 계약이 끝나는 내년까지 기다렸다면 아마 많은 경쟁이 붙었을 거다.
다만 주급만큼은 기존 PSG에서 받던 것 이상을 챙겨 줘야 했는데.
그 대신 선수단의 주급 체계를 생각해 즐라탄과 비밀 유지 계약서를 맺었다.
괜히 그가 받는 고주급을 다른 선수들에게 발설해 팰리스의 주급 체계를 불안하게 하지 말라는 것.
뭐, 아무튼… 즐라탄을 영입한 효과는 꽤 굉장했는데.
[전반기 최다 득점 구단에 등극한 크리스탈 팰리스]
[이번엔 진짜 다르다? 15-16 시즌 전반기가 끝난 지금 리그 1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크리스탈 팰리스!]
[팰리스, 아니 선우진의 기적? 구단 인수 3년차에 리그 우승 실현되나?!]
시즌이 중반을 막 넘어선 지금, 크리스탈 팰리스가 리그 테이블에서 최상단을 차지하게 된 것.
물론 마냥 즐라탄을 영입한 효과는 아니었다.
15-16시즌은 바로 ‘레스터의 동화’가 이뤄졌던 그 시즌.
그런 기적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건 레스터 시티가 대단해서도 있지만, 당시 다른 빅 클럽들이 모두 부진한 시즌을 보낸 덕도 있었다.
즉, 레스터 시티와 그 팬들에게는 미안하면서도 고맙게도 현재 크리스탈 팰리스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EPL 우승 트로피를 거머쥘 가장 적기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영국에 가 봐야지.’
팰리스의 약진 덕에 노난 <웬 이글스 데어> 팀이 한창 런던에서 촬영 중일 텐데.
오너의 권력을 활용해 거기에 내 분량을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들.”
그리고 드디어 복귀하게 된 SW 프로덕션의 회의실.
회의실 한편에 걸려 있는 올해 목표란에 적힌 ‘1억 구독자 달성’에 줄이 길게 그어져 있는 게 보였다.
스웜이 몇 주 전 총구독자 1억 명을 달성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6,700만 명의 넷플릭스 구독자 수를 한참이나 초월한 수치.
물론 1억 명의 스웜 구독자 중 3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구독자들 덕이 크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아직 서구권에서는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더 크긴 해도, 아시아권에서는 스웜이 넷플릭스보다 몇 발자국은 더욱 앞서 있는 상태.
반면 서구권에서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고.
“우선 <찬탈자>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즌 1이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어느새 시작된 회의.
그걸 듣다보니 마음 한구석에 있는 양심이 콕콕 찔려 오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받았던 엘레나의 연락이 떠올랐기 때문.
[엘레나 - 제가 작가님께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요.]
[엘레나 - 그래서… <찬탈자> 2부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죠?]
[엘레나 – 작가님 전역 소식에 한동안 출판사가 또 마비됐었다고요. 독자들이 얼마나 2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세요?]
흠흠.
내가 입대 전 1부를 완결 짓고 떠났던 <찬탈자>.
그 2부를 1부 완결 이후 21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까지도 내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
그때 장난식으로 21개월짜리 절단마공이라 했는데, 진짜 그게 실현될 줄이야.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휴가 나오면 사업 때문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고, 그 와중에 놀 건 또 놀아야 하고.’
이것저것 포상을 많이 받아 휴가를 꽤 많이 나갔다지만.
그래도 휴가 때에 일도 하고 글까지 쓰는 건 군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
더욱이 부대 내에서 글을 집필하기도 힘들었던 게…….
‘아니, 스웜이 그렇게 재밌을 줄 내가 알았나?’
내가 일병 말호봉일 때쯤 육해공 가릴 것 없이 생활관 내 TV를 통해 스웜을 구독할 수 있는 계약이 체결됐는데.
와, 내가 오너이긴 하지만 새삼 놀랍더라.
그렇게나 재밌고 훌륭한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스웜에서 쏟아질 줄이야.
개인 정비 시간 때 스웜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가 알던 작품들 말고도 새롭게 제작된 작품들이 많아 새로웠기 때문.
즉, 내가 글을 못 쓴 건 바로 지금 내 눈앞의 SW 프로덕션 직원들 때문이라는 거다.
이걸 상을 줘야 해, 벌을 줘야 해?
아무튼.
[그래서 대체 <찬탈자> 2부는 언제쯤? 전 세계 팬들의 한국 국방부를 향한 원성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렇게 나는 이번 생 최초로 ‘장기 휴재 작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