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선우진은 갑질이 싫다
CM E&M 센터 꼭대기 층인 18층 대회의실.
들어가자마자 박정후 부회장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부회장님.”
이제는 부사장이 아니라 부회장이 된 박 부회장과의 만남.
내가 군대에 있는 사이, CM의 후계 구도는 더욱 공고해졌는데.
재계에서는 물론이고 CM 내부에서도 박 부회장이 차기 회장이 될 것으로 기정사실화됐다고 한다.
덕분에 가끔씩 박 부회장에게서 오던 소개팅(을 빙자한 선 자리) 문의도 사라지게 됐는데.
“조카분이 미국으로 떠나셨다면서요?”
“네.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다던데… 속 깊은 아이예요.”
후계 구도에 있어서 박 부회장의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던 회장 손녀가 경쟁을 포기하고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
듣기로는 재벌가 금지옥엽치고는 꽤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라 지분 승계를 통한 경쟁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며 밝혔다고 한다.
그냥 적당히 잘 먹고 잘살 만큼만 떼 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뭐, 나도 주워들은 거라 사실인지는 잘 모른다.
물론 지금 박 부회장의 반응을 보면 그게 사실에 가까웠던 것 같지만.
여하튼.
소개팅시켜 줄 사람이 저 멀리 떠나 버린 데다가, 이제 박 부회장의 입장에서도 굳이 나와 조카를 맺어 줄 이유가 사라졌으니.
가끔 사업 관련으로 박 부회장과 연락할 때마다 넌지시 물어오던 소개팅 제안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지더라.
“아, 축하 인사가 늦었네요. 부회장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뭘요. 명칭만 바뀌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제가 전역을 축하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흠.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면 전역 선물 좀 챙겨 주세요.”
“네?”
“갖고 계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지분 있잖아요. 잘 쳐 드릴 테니, 저한테 통째로 넘기시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10년 전에 드림웍스에서 독립된 회사로, 2006년도에 드림웍스가 재정난으로 바이어컴에 인수되면서 그때부터는 이름만 같지 독립적인 회사였다.
그런 회사의 지분을 박 부회장에게 물은 건 CM이 드림웍스의 설립 당시 3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을 드림웍스에 투자했었고, 드림웍스가 드림웍스 스튜디오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으로 분사되기 전 주식을 무려 480만 주나 받았기 때문인데.
어제자 종가 기준으로 총 1억 4,000만 달러에 달하는 수량이었다.
‘애니메이션 쪽은… 회사를 사들이는 게 확실히 낫다 느꼈지.’
마냥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는 스웜과 써밋 엔터였지만.
사실 내가 군대에 있는 사이 부침도 한번 겪었었다.
그게 바로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거였는데.
스웜의 오리지널 콘텐츠에 영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추가하자는 의견이 있어 그걸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팀을 꾸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폭망.
개봉 성적도 시원찮았고, 스웜 내 자체적인 시청률 분석에서도 그리 신통치 못했다.
제작비를 간신히 회수했었을 정도.
물론 그래도 제작비를 건진 게 어디냐마는, 스웜과 써밋 엔터의 첫 애니메이션 도전이라는 어그로를 받고도 그 정도 성적인 거였으니…….
거기에 그간의 성공 신화를 생각하면 폭망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패 원인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있어서 부족했던 제작 노하우.
기존 업계에서 활동하는 제작 인력들을 대거 고용하긴 했지만, 일선에서 일하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한 것일 뿐 관리직들은 몇 명 고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에서 쌓아 올린 써밋 엔터만의 노하우가 있어 어느 정도 호환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비슷해 보이면서도 생각보다 다른 점이 많았던 영화와 애니메이션이더라.
여하튼.
그렇게 내린 결론이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인수하자는 것.
픽사나 일루미네이션, 소니 픽처스처럼 메이저 스튜디오들을 모회사로 두고 있는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와는 달리,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은 모회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쿵푸팬더나 드래곤 길들이기, 마다가스카 시리즈들을 제외하면 연이은 흥행 실패로 재정이 휘청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드림웍스’라는 타이틀의 상징성도 있었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드림웍스의 상표권 자체도 드림웍스 스튜디오가 아니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소유더라.
드림웍스 스튜디오는 매번 라이센싱 계약을 새로 맺고 있다고.
‘아무튼 박 부회장은 적당한 가격에 지분을 넘길 것 같네…….’
실무자들끼리 대화를 나눠 봐야 알겠지만.
박 부회장의 태도를 보면 정도 이상으로 비싸게 받는다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군대에 들어가 있던 1년 9개월 사이 스웜과 CM 엔터의 관계도 꽤나 돈독해졌는데.
CM 엔터에서 그렇게 바랐지만 매번 실패했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소비 시장 구축을 스웜이 성공적으로 이뤄 낸 덕분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던 자체적 해외시장 구축이라는 미련을 버리고, 로우 리스크 미들 리턴을 택한 것.
CM 엔터를 통해 공급받는 양질의 작품들이 스웜 구독자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좋아, 우리도 만족하고 있는 협력 관계였다.
물론 갑을 관계에서 어느 쪽이 갑인지는 명확하긴 하지만서도.
내가 어디 가서 갑질하고 그런 사람은 아닌지라, CM 측에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전 세계와 비교하면 조막만 하기 그지없는 한국 문화 콘텐츠 업계에서 갑질해 봤자 어따 쓰겠나.
그 시간에 디즈니나 워너, 유니버설 같은 애들 목 딸 생각을 해야지.
아무튼.
“야, 너 뭐야. 온다고 얘기 좀 해 주지.”
“뭐야. 형도 왔었어요?”
“당연히 오지. 나 몇 달 전에 개봉한 영화 CM이랑 했던 거인 거 몰라?”
“아… 그랬나?”
“아, 그랬나? 아오, 소속사 오너라는 놈이 소속 배우 작품에 관심을 이렇게 안 가져서야.”
“몰라요. 내가 오너지, 대표인가? 그리고 안 그래도 주위에 시커먼 남정네투성인데 형 작품 내가 뭐하러 찾아봐. 그 시간에 프로듀스 119 봐야 하는데.”
박 부회장하고 얘기가 끝나자 내게 다가오는 강주원.
사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CM 그룹에서 정기적으로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하는 파티였는데.
나한테도 매번 초대는 왔었지만 한 번도 참석은 안 했던 것을 오늘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 참석한 것이었다.
부회장 된 거 축하도 할 겸.
드림웍스 애니매이션 얘기도 꺼낼 겸.
그리고…….
“아무튼, 일단 여기 좀 봐 봐요. 동영상 좀 찍게.”
“어? 어, 뭐야?”
“뭐야, 이러지 말고 배우다운 얼굴 좀 해 봐요.”
다른 거 홍보도 좀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짧게 30초 정도 동영상을 찍었다.
나와 강주원을 시작으로 주위 모습을 살짝.
“우진아, 그런데 여기 사진 촬영 안 될 텐데…….”
“그래요? 누가 그래요?”
“어? 어… 음. 그러게? 딱히 누가 안 된다 한 적은 없기는 한데… 아무래도 박 부회장님 눈치도 보이고 하니까……? 그리도 다른 연예인들도 있고.”
“에이. 연예인들이야 허락받은 사람만 찍으면 되는 거고. 부회장님이 쩨쩨하게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하겠어요? 저 아줌마 얼굴은 깐깐하게 생겼어도 의외로 마음 넓어요.”
“…응? 아줌……? 깐깐?”
내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강주원을 뒤로 하고.
톡, 톡- 토독-
방금 찍은 영상을 변환 완료 후 업로드했다.
내 계정의 첫 게시물.
그걸 본 강주원이 놀라 물었다.
“뭐야? 너 SNS 없지 않았어? 이번에 만든 거야? 나도 주소 알려 줘. 페북? 인스타?”
“아, 주원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트렌드 진짜 느리네. 요즘 누가 페북이랑 인스타를 써요?”
“……?”
“틱톡 몰라요? 틱톡?”
이거 참.
강주원 이 사람, 이렇게 해서 빠르게 급변하는 요즘 세상에 대체 어떻게 적응하려고.
어떻게 아직도 틱톡을 모른단 말인가.
지금 시점으로 무려 서비스 출범 8시간이나 된 틱톡을.
안 되겠다. 소속사 오너로서 소속 배우가 이렇게 뒤쳐지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었다.
“일단 빨리 앱 스토어 들어가서 다운받으세요. 계정도 바로 만들고.”
내 말에 바삐 손가락을 움직이는 강주원.
“어? 이거 네가 갖고 있는 회사에서 나온 거야?”
“네. 오늘 출범했어요.”
“뭐야. 진짜로 이게 나만 모르는 요즘 유행인가 싶었네.”
“조만간 그렇게 될 거니 미리 계정 만드세요. 오너 지시 사항임.”
“와아. 이거 갑질 아니야, 갑질?”
“아, 억울하면 신고하시든가.”
내 말에 작게 뭐라 궁시렁대는 강주원.
그걸 보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TV에서나 봤던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박 부회장의 별명 중 하나가 코리안 메디치라는데, 한국 문화 콘텐츠 업계의 큰손인 만큼 저렇게 유명인사들하고 친분도 많았다.
유명 가수들도 있고, 배우들도 있고, 프로듀서들도 있고.
뭐 어디 회사 대표들도 몇 보였다.
그런데 내가 관심 있는 쪽은 회사 대표들은 아니었고.
“형, 여기 온 사람들이랑 친해요?”
“뭐, 친한 사람도 있고,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들도 있고. 흐흐. 그런데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나 엄청 주목받네. 박 부회장님 파티 올 때마다 쟁쟁한 사람들 하도 많이 와서 이런 적 없었는데. 야, 나 계정 다 만들었다. 팔로우 해 줘.”
“아, 저는 아무나 맞팔 안 해 줘서. 아시죠? 셀럽들은 원래 그러는 거.”
“뭐? 야!”
장난이고, 맞팔 해 줬다.
그것도 내 5번째 팔로우 대상인 강주원이다.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참고로 앞선 4명의 팔로우 대상들은 메시, 호날두, 즐라탄, 일론 머스크까지 이렇게 넷.
메시와 호날두는 따로 선수 두 명과 마케팅 계약을 맺은 거였고.
즐라탄도 즐라탄을 비롯한 팰리스 선수단 전체와 맺은 계약의 일부라는 것뿐이지, 비슷했다.
머스크는… 따로 말도 안 해 줬는데 어떻게 안 건지 서비스 출범 30분 만에 가입했다고 연락이 오더라.
참 대단한 놈이다.
여하튼.
“형, 가서 저 사람들 소개 좀 해 줘요. 그리고 이따가 틱톡 계정 만들라고 말도 좀 해 주고.”
틱톡의 마케팅 전략은 원래처럼 스타 홍보를 통한 인지도 상승.
물론 예전에 틱톡이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글거리는 춤 + 뭣 같은 배경음악의 유튜브 광고는 하지 않을 거다.
나도 그때 유튜브를 이용하다 보게 된 그 틱톡 광고 때문에 제대로 불호가 생겨 회귀하기 전까지도 틱톡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전 세계적인 틱톡 열풍과는 다르게, 국내에서는 10대들을 제외하고 틱톡 이용자들이 적었던 이유가 바로 그 광고 때문일 거다.
이번에는 그런 병크 짓이 없도록 제대로 된 홍보를 할 생각이었다.
즉, 오늘 파티에 온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연예인들이 많이 온대서 자체 홍보를 뛰러 온 거다.
“그거 해 주면 뭐 떨어지는 거 있냐?”
“으음. 소속사 오너의 미움을 사 출연 제의가 뚝 끊기는 일이 없다?”
“아오. 내가 재계약을 안 했어야 했는데.”
“장난이고. 챔스 티켓 드림. 제 옆자리라 VIP석.”
“어? 진짜?”
“아시죠? 다음 주에 홈에서 경기 있는 거. 원하면 챔스 말고 리그 경기 티켓도 주고.”
내 말에 눈에 띄게 좋아하는 강주원.
이 형도 축구 사랑은 참 알아 줘야 한다.
게다가 내 구단이라고 팰리스를 응원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나보다 더한 이글스(팰리스의 팬)가 되었는데.
즐라탄 만나서 같이 공 차 보는 게 인생 소원이란다.
저번에 안 그래도 나 휴가 나올 때 한번 자기 소원 들어주면 안 되냐고 넌지시 물어보는데.
후, 큰맘 썼다.
즐라탄한테 언제 시간 한번 나냐 물어봐야지.
‘나만 한 오너도 없어.’
내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인정 받고 또 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