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1)
“시민 루이 오귀스트?”
“그렇습니다, 폐하. 앞으로 세상은 바뀌게 될 겁니다. 시민들이 직접 세상일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할 테니까요. 왕과 영주들의 시대는 지고 이제는 시민들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증거라도 있는가?”
“이미 폐하께서 그 ‘증거’들에게 시달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음...”
“이미 예견된 변화고, 다가올 미래입니다. 폐하께서 왕위를 계속 손에 쥐신 채, 절대왕권을 휘두르려 하신다면 필연적으로 ‘증거’들과 부딪히시게 될 겁니다.”
루이는 내 말에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재무총감은,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길 듯 싶은가?”
“글쎄요. 싸움 몇 번은 폐하께서 이기실지 몰라도, 전쟁은 시민들이 이기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끝은 그리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이라. 만약 내가 ‘시민 루이 오귀스트’가 되면 그 싸움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폐하께서는 이제 시민과 함께 구태의연한 자들과 싸우시겠지요. 프랑스인의 친구, 시민 루이 오귀스트가 되어서.”
“···.”
내 말에 왕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떨어지는 태양에 계속 붙어서 떨어지실 지, 아니면 뜨는 태양 옆에서 그 태양을 하늘 높이 밀어 올리는데 동참하실 지는 폐하의 마음입니다.”
아니면 그냥 오를레앙인지 뭔지 폐하께서 말한 그 역적한테 엿이나 먹인다고 생각하십시오. 나는 덧붙였다.
묵묵부답이던 왕은 내가 덧붙인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뭐요. 그것도 싫으시면 예비 듀라한 되실 준비나 착실히 하시던가.
***
“···시민 루이, 시민 루이 오귀스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침실에서, 자리에 누운 루이 16세는 스물도 안 된 애송이 재무총감이 남기고 간 한 문장을 계속 복기하고 있었다.
처음 왕이 되던 날, 온 문무백관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던 날.
그 날이 루이에게는, 왕이 된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행복한 적이 없었으니까.
루이 오귀스트는 고조부 루이 14세 같은 늠름한 군왕이 되고 싶었다. 프랑스를 이끌고 유럽을 구석구석 누비며 적을 토벌하고, 강력한 힘으로 만백성을 다스리며 군림하고 싶었다.
만백성이 편히 살며 자신의 이름을 높이 칭송해주길 바랬다.
“···다 헛된 망상이었을 뿐이지.”
화려하게 장식된 침대의 천장을 보면서 루이 16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민...루이 오귀스트...”
그는 다시 애송이 재무총감이 남긴 말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이 어두워지자, 루이의 머릿속에서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재무총감이 입을 놀리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앞으로 세상은 바뀌게 될 겁니다, 폐하. 시민들이 직접 세상일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할 테니까요. 왕과 영주들의 시대는 지고 이제는 시민들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 ···증거라도 있는가?
- 이미 폐하께서 그 ‘증거’들에게 시달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민들의 시대라...시민의 시대...”
한참을 되뇌이던 루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창가 앞에 섰다.
한밤중의 베르사유 궁전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런 고요함이, 루이 16세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 루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오직 루이 한 사람이 남은 듯한 고요함이 ‘당신 말고 대신 결정해줄 사람은 없다’-며 그에게 말하는 듯 했다.
“···내가 생각해도 우유부단의 극치구만. 그래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잘된 일일수도.”
낮의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에 대신 떠오른 밝은 달을 바라보며 루이는 말했다.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이 아니라면, 차라리 은은하게 빛나는 달이 나으리라.
겸사겸사 오를레앙 그 놈한테 엿도 먹여주고.
***
“오를레앙 공이 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왕과 대면을 끝낸 나는 숙소로 돌아가 시에예스 사제님에게 물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오를레앙 공이 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사제님?”
내 질문에 시에예스 사제님은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재무총감이라는 친구가 그 사람을 모르면 쓰나.”
아니이이이 제가 어디 싸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매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숫자놀음하거나 의회에서 드잡이질만 하는데 모를 수도 있죠, 거참.
“오를레앙 공은 우리 계몽주의자들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한 분이시네. 파리에서 바스티유를 함락시키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다 오를레앙 공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덕이야.”
“그으래요오?”
흠, 마리 앙투아네트랑 루이 16세한테 들은 대로면 거의 그 뭐랄까, 씹새끼?
수준인 거 같던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나?”
“아뇨. 그냥 어디서 몇 번 들었는데 뭐하는 사람인지 좀 궁금하더라구요.”
“···자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겐가?”
“아아아아니 사제님까지 왜이러십니까? 제가 언제 이상한 짓을 한 적 있다구요!?”
“얼씨구?”
“무울론 중간에 조금 역경과 고난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죠, 계책! 계책을 쓴 것뿐입니다.”
“···.”
나 원 참.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저런 눈을 하루에도 열 번씩 마주치는 거람.
“아무튼 사제님 말씀대로라면 꽤나 훌륭하신 분이겠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시에예스 사제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그러면 왕실 쪽이 거짓말을 한 거거나 오를레앙이라는 인간이 가면을 아주 잘 쓰고 행동하는 거 둘 중 하나네.
지금 왕실이 나에게 오를레앙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있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오를레앙이 가면을 썼다면?
애초에 왕위 계승이 가능한 왕족이 혁명세력을 지원해준다면 그건 십중팔구는 왕위찬탈이 목적일 테니 심증은 충분하고, 왕이 말한 것처럼 용병대를 오를레앙이 주도해서 데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종합해보면 아직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오를레앙이라는 놈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설이 납득할 만하네.
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오를레앙 이 새끼는 거의 38선 위에 있는 북괴썅간나새끼들이나 마찬가지네. 화전양면전술 수준이 아아아주 대단하셔.
이제 확실한 물증만 있으면 되겠는데 말이지.
***
다음날 아침.
베르사유 궁전, 전쟁의 방.
“짐은 국민의회가 선출한 재무총감, 귀하 기욤 드 툴롱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바이며 지금까지 재무총감이 실시한 모든 정책 또한 승인하는 바네. 자네도 이제 짐에게 정식으로 임명받은 프랑스 왕국의 정식 재무총감이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폐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쟁의 방으로 호출된 내가 말에 루이 16세는 손을 입에 가져다대고 큼큼-하더니 입을 열었다.
“거···자네는 예법도 모르나? 아니지, 애초에 예법을 따지는 자라면 짐의 면전에 대고 옥좌 뒤에 숨었니 뭐니, 그런 망측한 말도 안했겠군.”
“제가 저잣거리에서 노동자들한테 빵 팔던 사업가 출신이라 말입니다. 그러려니 해주십시오, 폐하.”
“아닐세. 능구렁이마냥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네처럼 속에 담긴 말 다 꺼내주는 게 더 나은 듯 하이.”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순둥순둥 해지셨대.
루이 16세는 이어서 말했다.
“왕이 자리에서 내려오려는데 재상이 임시직이면 예법에 어긋나지 않나. 그래서 그런 거네.”
“···예?”
“못 들은 겐가? 짐은 자네 말대로 자리에서 내려가고자 하네.”
아니, 내 말을 들은 지 한나절 밖에 안됐는데?
황당한 표정의 나와 달리 루이는 후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짐은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네. 애초에 짐은 군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이야. 차라리 재무총감, 자네 말대로 ‘시민 루이 오귀스트’가 더 어울리지.”
그래, 이제 의회에 가서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면 되는 겐가? 왕은 씨익 웃으면서 덧붙였다.
어, 음. 아뇨?
“···왜 그런가?”
“아직 오를레앙에게 엿을 못 먹이지 않았습니까.”
“···자네, 그거 진심으로 한 말이었나?”
“사업하는 사람이 한 입으로 두말하면 망합니다, 폐하.”
루이는 어디 한 번 더 말해보라는 듯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를레앙 엿 먹이기_1.16립버전.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전 교회가 재산을 가진 게 저어엉말 아니꼽습니다, 폐하. 세상에 돈 한 푼, 빵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는 놈들이 십일조니 뭐니 하면서 재화를 제 배때지 가득 채운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래서 전 곧 의회에 교회와 성직자들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할 예정입니다. 물론 교회 쪽에서 반발이 어마어마할 테지요. 심하면 이탈리 아에 있는 교황이 열 받아서 날뛸 수도 있습니다.”
“아, 짐보고 자네를 지지해 달라는 겐가?”
네 맞아용! 잘 아시는군요!
아무래도 일이 일이다 보니, 왕비 한명의 지지만으로는 조금 불안한 감이 있단 말이지. 그런데 왕도 같이 지지해준다? 수구세력의 구심점이 될 사람이 지지해준다면 바로 통과나 마찬가지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왕이 가진 군사력 중 베르사유에 주둔하고 있는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연대를 국민방위대에 이임시켜 주십시오.”
루이는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평정을 찾고 말했다.
“···조금 거북하지만 알겠네.”
“그리고 어제 제게 오를레앙이 플랑드르 용병대로 베르사유를 치라고 폐하를 부추겼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그 물증이 될 만한 물건, 가지고 계신지요.”
“···있네. 그 놈은 태우라고 했네만 그 놈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좋아, 아아아주 좋아! 피스가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구만.
“좋습니다. 물증은 폐하가 직접 가지고 계십시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오를레앙에게 왕위를 건네기 직전에, 파리가 모르게 교회의 재산 환수와 왕의 군사력 제한을 동시에 통과시켜야 합니다.”
“왕의 팔다리는 모두 잘라놓고 오를레앙에게 왕좌를 건네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가 그렇게 탐욕스러운 자라면 아마 폐하께서 고통 받는 정도의 배는 고통 받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오를레앙이 왕이 된 이후 허튼 짓을 하면...”
“물증이 있으니 오를레앙의 숨통까지 끊어버릴 수 있겠군.”
루이는 입꼬리를 귀까지 올린 채 크게 웃었다.
“좋네, 재무총감! 그 탐욕스런 놈한테 엿 한번 먹여보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