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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그런데 다른 곳은 안전한가? (1) (87/341)

그런데 다른 곳은 안전한가? (1)

5개월 전

1790년 2월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왕궁.

“자, 오늘 연주도 너희들의 노고 덕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들 수고 많았고, 내일부터 며칠 정도 개인정비를 위해 휴가를 줄 테니 오늘은 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숙소에 가서 푹 쉬거라.”

“““예, 살리에리 단장님!”””

연주가 끝나고 악사들은 악기들을 갈무리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죽겠다 진짜로.”

“너 지금 겨우 바이올린 좀 켰다고 그러냐? 난 첼로라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그러니까 누가 첼로 하래? 차라리 루트비히처럼 비올라나 켜지 그랬어.”

“아니 근데 카이저께서 입관하시는 날에 이래도 되는 건가?”

“우리야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 같은 악사들이 높으신 분들 생태에 관심만 가져봤자 태양에 다가간 이카루스 꼴밖에 더 돼?”

“하기야...”

카이저 요제프 2세가 입관되어 묘지에 들어간 날에 왜 연주를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높으신 분들 앞에서 공연도 끝났으니 긴장이 풀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흐...흐흐흐...히히...흐흫”

“야, 야 루트비히. 너 왜 그래? 어디 아프냐?”

기욤이라는 프랑스인을 만나고 온 뒤, 머리에 있는 어딘가가 잘못된 건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는 동료 루트비히의 모습에, 다른 악사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트비히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드디어!”

“뭐?”

“드디어 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세상의 빛을 보는구나!”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루트비히, 너 이미 퀼른 선제후님께 후원받고 있잖아. 빛이야 이미 볼만큼 보고 있구만 뭘.”

마치 기름램프 불빛에 홀려 날아다니는 나방처럼, 뭔가에 홀린 듯 말하는 루트비히의 목소리에 동료들은 의아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후원자가 보통 귀족도 아니고 무려 선제후.

그러니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지닌 대귀족 아닌가.

루트비히는 대체 누가 자신을 더 인정해 줬으면 하는 건지 동료 악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료들이 그러던 말던, 루트비히는 자신의 비올라를 마저 정리한 후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나섰다.

“거기 정지. 잠시 신원을 확인하겠소... 음, 지나가도 좋소.”

정문을 경비하고 있던 위병의 형식적인 검문마저 마친 루트비히는 비로소 뻥 뚫린 하늘을 쳐다볼 수 있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18세기 빈의 새카만 밤하늘 속에서, 머리 위로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젖을 먹다가 생겨난 길인 은하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루트비히는 꼭 모차르트, 하이든 같은 거장들이 걸어간 길이자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처럼 느껴졌다.

루트비히는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이쪼가리를 귀퉁이 하나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손으로 꺼냈다.

은은한 밤하늘의 빛이 루트비히가 손에 쥔 그 소중한 종이쪼가리를 비추고 다시 거기 써진 내용을 루트비히의 눈동자에 비추었다.

비록 프랑스어였지만 음악공부를 하느라 어느 정도 프랑스어를 익힌 루트비히는 무리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 프랑스 파리 시 그르노블 가.]

- 당신 이름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구요? 아니 이게 웬 월척ㅇ···! 큼큼, 제가 명함을 드릴 테니 혹시라도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제 명함에 써진 곳으로 찾아오세요. 제가 전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뭔가 자신이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단어를 말하긴 했지만, 확실한 건 프랑스의 재무총감이 루트비히 자신의 뒤를 봐주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니겠나.

술주정뱅이 아버지 덕에 힘들었던 루트비히, 자신의 인생에 태양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 2월의 빈이었지만, 겉옷 한 벌만으로 밤길을 걷고 있는 루트비히는 어쩐지 별로 춥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

1790년 3월 초.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빈.

“음, 나쁘지 않아.”

루트비히는 숙소 방에 있는 조그마한 거울에 몸 이곳저곳을 비추다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궁정악단장 살리에리가 상당히 넉넉하게 준 휴가 덕에, 악사들은 다들 여유롭게 중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빈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루트비히 또한 난생 두 번째로 찾은 이 거대한 도시, 빈을 요 며칠 간 눈에 담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시를 구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날이었다.

“지금이... 11시니까 빠르게 걸으면 딱 맞춰서 도착하겠어.”

루트비히는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 뒤, 숙소를 나섰다.

빈 한 가운데 자리한 대로로 나가자, 이미 수천 명에 달하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호프부르크 왕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의 국민의원들을 따라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정장을 입은 계몽주의자.

합스부르크의 쌍두독수리 깃발을 쥐고서 치안 유지를 위해 나온 기병대.

이곳저곳 기워 넣은 거적때기를 입은, 가난해 보이는 노인.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는 꼬마들.

모두들 프랑스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파리로 돌아가는 행렬 때문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오, 온다!”

곧, 저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말들이 도로를 다그닥 다그닥 밟는 소리가 들려오자 루트비히 또한 인파를 헤치고 앞줄로 나와 까치발을 서고 저 멀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신성로마제국의 기병대가 앞서고, 그 뒤로 프랑스 흉갑기병대가, 그 뒤로 재무총감과 주요 인사들이 탄 마차가 덜컹거리며 호위병들을 뒤따랐다.

그 순간.

“어, 어! 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입이 동시에 똑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웬 거적때기를 입은 부랑자들이 병사들 사이를 뚫고 나와 마차를 가로막은 것이다.

“오! 재무총감 각하! 부디 불쌍한 우리들에게 지혜를 베푸소서!”

부랑자들은 마차 앞에 무릎 꿇고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 마냥 말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서 마차를 호위하던 프랑스군은 당혹스런 얼굴로 제들끼리 몇 마디 주고받더니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장교가 마차로 가, 창문을 열고 재무총감과 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당혹스러웠다면, 오스트리아군은 당혹을 넘어 분노한 얼굴로 검집 옆에 달린 말채찍을 꺼내 부랑자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거지새끼들이! 당장 끌어내! 다른 나라의 재상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타국의 VIP를 경호하는데 갑자기 부랑자들이 튀어나와 대열이 엉망이 되다니, 오스트리아군이 상관에게 먹을 욕을 생각하면 그 분노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다음으로 펼쳐지는 제 눈앞의 광경에 다시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은 마차에서 나와, 마치 배우가 무대에 오르듯 마부가 자리한 곳에 올라 입을 열었다.

“오! 도대체 어떤 가엾은 일이 있었길래 자네들은 내 앞을 가로막는고?”

루트비히는 입을 떡-벌리곤 한 나라의 재상이, 부랑자들과 말을 주고받는, 그 믿지 못할 풍경을 눈에 찬찬히 담았다.

***

호프부르크 궁전.

“막시밀리안,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는 게냐!”

“글쎄요, ‘무슨 짓’이라니? 레오폴트 형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날 지금 바보로 아는 게야!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따위 쇼를 벌이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네놈의 쇼로 하여금 우리 제국을 산산이 부술 생각이냐!”

차기 카이저 레오폴트 대공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과 함께 퀼른 선제후이자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를 쏘아붙였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 무엇인가.

수십 개 제후국을 어설프게 엮어 만든 연합국가다.

전제정을 좋아하는 제후, 계몽주의에 감화된 제후, 과두제를 지향하는 제후 등 가지각색의 인물 수십이 모인 제국아닌가.

그런데 그런 국가의 수도에서, 자유주의니 계몽주의니 하는 불순분자들이 좋아할 얘기를 꺼내?

제국을 수십 개로 쪼개고 싶어서 발광을 하는 건가!

그러나 레오폴트의 노기 띤 얼굴에도,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형을 따라 미간을 구긴 채 입을 열었다.

“···쇼? 지금 쇼라고 하셨습니까?”

막시밀리안의 얼굴 곳곳에서 핏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작고한 카이저, 아니! 요제프 큰형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레오폴트 형님을 찾을 때! 레오폴트 형님은 대체 뭘 하셨습니까? 이탈리아에 처박혀서는 제국의 귀족들과 주교들에게 알랑방귀 뀌는 쇼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보니 배우는 제가 아니라 형님이시군요?”

“이런 미친 새끼가!”

레오폴트는 화 때문에 두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막시밀리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렇게 권력이 탐이 나십니까? 차라리 그럴 힘으로 큰형님께 힘을 보태주셨으면 귀족들 눈치를 볼 걱정도 없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막시밀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적어도! 제국에 빌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요! 당장 이 궁전 안에도 우글 거리지 않습니까!?"

"이...이...!"

당당하게 말하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레오폴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멱살을 풀고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막시밀리안? 넌 지금 제국에 있는 수많은 제후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는 거나 다름없다.”

“애초에 거대한 흐름은 제국에 빌붙어 기생하는 멍청한 귀족들이 아니라, 제국민들입니다. 옆 나라 프랑스를 보십시오! 곧, 우리 제국도 그 전철을 밟게 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전제왕권국가 프랑스가, 국왕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내쫓았다.

그보다 헐거운 신성로마제국은?

혁명이 일어나면 퇴위가 그보다 쉬웠으면 쉬웠지 어렵지는 않을 거다.

퇴위가 일어나면 무조건 빈 카이저의 제관을 차지 하겠다고 합스부르크 황실 내에서 피바람이 불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변화를 먼저 주도하면 된다. 변화를 주도해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 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루이 16세처럼, 퇴위되던지! 아니면 제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제국을 바꾸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평민들의 힘을 너무나도 과대평가 하는구나 막시밀리안.”

“기욤 그 자가 그 평민들의 힘을 보여주는 가장 큰 예이지 않습니까.”

막시밀리안은 담담한 어투로 형에게 말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제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보다 제국이 두 쪽 나는 게 먼저일 게다. ···오랜만에 형제끼리 내기나 한 번 해보지 않으련? 너 때문에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것도 제국 전역이 모두 휘말릴 전쟁.”

“썩어서 고인 물은 한 번 깨끗하게 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호프부르크 왕궁의 한 방에서, 이 궁전에서 같이 나고 자란 두 형제는 서슬 퍼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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