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선전포고 (4) (110/341)

선전포고 (4)

1791년 3월.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포츠담 상수시 궁전.

“······폴란드를 나눠 가지는 대가로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라고? 짐이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재상?”

“예, 폐하. 그렇사옵니다.”

“으음...”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재상의 말에 낮은 신음을 내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물론 그 덕에 안 그래도 퉁퉁한 턱이 두 개가 되긴 했지만.

“영국은 어쩌고 우리 프로이센에게 그런 제안을 한단 말인가.”

“러시아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영국은 이번 일에 중립을 지킬 예정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제 놈들이 이곳저곳에 귀가 닳도록 말하고 다닌 ‘유럽의 중재자 영국’이라는 이름은 어쩌고, 폴란드를 쪼개는 일에 눈을 감아주겠단 말인가?”

“아무래도 러시아라는 거대 우호국을 겨우 폴란드 하나로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싶사옵니다만.”

“쯧. 하여간 영국 놈들이란... 속이 새까만 건 알아줘야겠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계속해서 러시아인들의 제안의 요모조모를 곱씹기 시작했다.

폴란드라는 단어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재상.”

“예, 폐하.”

“짐이 왕위에 오른 지가, 오늘로 얼마나 되었나.”

“예, 올해로 5년째이옵니다.”

“5년이라...”

왕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도 시내에서는 선왕을 기리고 있는가?”

“예? 아. 예, 그렇사옵니다.”

재상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대수롭게 물어보느냐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렇겠지. 짐이 괜한 걸 물어봤군.”

재상의 모습에, 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군대의 나라 프로이센, 군인의 나라 프로이센, 정복의 나라 프로이센.

그 명성에 알맞은 국민들답게, 프로이센 인들은 선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밑에서 무궁한 정복과 복속의 영광을 누려왔다.

5년이 지났는데도, 프로이센 인들은 아직까지도 죽은 선왕을 그리워하고 있음은 물론이요, 자신이 선왕같이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에 실망하는 신민들도 섭섭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폴란드라, 폴란드...”

왕은 작게 읊조렸다.

선대왕이자 프로이센 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불후의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이 생전 눈독을 들이던 고토, 폴란드.

물론 고토...라고 말하기에는 단 한 번도 프로이센에 속한 적이 없긴 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어찌 되었든 젖과 꿀이 흐르고, 기름진 땅이라는 건 사실이라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나.

그리고 만약, 그 폴란드의 정복을.

인간이길 포기한 초인, 선왕 프리드리히 대왕조차 이루어내지 못한 폴란드 정복을 자신이 마친다면, 프로이센 인들은 자신에게 무한한 충성과 존경을 보낼 터.

왕의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리며 온몸을 향해 피를 짜내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다시 재상을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재상, 최고전쟁대학 교장인 묄렌도르프(Wichard Joachim Heinrich von Möllendorf) 장군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불러와주게. 아무래도 군인들의 말을 들어봐야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겠어.”

“예, 폐하.”

***

1791년 3월 25일.

프랑스왕국, 파리.

프랑스는 매우 기묘한 상태에 처해있었다.

이게 왕국인지 공화국인지 모를 무언가 제 3의 상태.

본래라면 오를레앙의 사망과 함께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 3세, 그러니까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어야 하지만...

뭐, 오를레앙이 보통 똥을 싸질러 놓은 것도 아니고, 왕세자가 별 일 없이 즉위할 수 있었을 리가. 오히려 즉위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왕세자의 즉위에 제동이 걸리니 당연히 국왕은 없고, 그렇다고 국정을 놓을 수는 없으니까 국민의회가 임시로 행정부를 겸해 국정을 수행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나는 부르고뉴 지방의 1791년 하반기 예산안 113페이지의 마지막에 도장을 쿵-하고 찍으며 말했다.

“다음 분 들어오시랍니다.”

재무부에서 나온 직원이 바로 문 너머를 향해 소리치자,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무총감님 안녕하십니까! 왕립 아카데미에서 나왔습니다. 다음 분기 예산안인데, 한 번 읽어보시고 도장 찍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구랑 다르게 에너지가 넘치시네. 이리주세요.”

“예, 각하! 여기 있습니다.”

거...드럽게 두껍네.

“이거 몇 페이지짜리입니까?”

“예! 총 513페이지입니다!”

나는 눈앞이 아찔한 나머지, 눈을 감고 말았다.

이게 다 숫자와 글. 그것도 내 시신경을 실시간으로 해치는 조그만 활자들 때문이야. 보고서는 원래 함초롬돋움 체, 12포인트. 글줄 간격 160퍼센트가 국룰인 것을, 이 사문난적들이 내 눈에 테러를 가하고 있어.

아니. 그래도 혹시 몰라. 왕립 아카데미잖아? 똑똑한 분들이 계시는 곳 아닌가. 보는 사람의 시신경에 대한 고려는 해주겠지.

“왕립 아카데미면, 발명 쪽이죠?”

“예! 그렇습니다, 각하!”

“······그러면 설계도라거나, 그림 같은 게 많겠네요?”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젠장, 내 살다 살다 꼬꼬마 시절을 넘어,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림이 많은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요! 전부 상세하게 글과 숫자로 적어 냈습니다!”

“······.”

눈앞에 서있는 남자의 한 마디에, 방금 전까지 희망찼던 내 세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후우. 그래도 일단 펴 보긴 해야겠지.

“아, 젠장.”

나는 목젖까지 차오르는 욕을 겨우겨우 다시 삼켰다.

“······이보세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이게 보이긴 하십니까?”

“예? 하지만 총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원자재 소모를 줄이고 세금 낭비를 유의하라고.”

“그래도 사람 눈에 보이게 끔은 쓰셔야 제가 알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슨 몽골인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봅니까. 다시 가져가서 써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각하.”

시무룩한 얼굴이 된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재무부 직원을 향해 말했다.

“방금이 끝 맞죠?”

“아니요. 오늘 미라보 의장님께서 방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미치겠네.”

덜컹.

얼마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땅딸막한 미라보 의장이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총감, 잘 지냈나?”

“제 눈 밑 시꺼먼 거 안 보이십니까?”

“이 친구 왜 이리 공격적이람. 여기, 자네가 오늘 연설할 내용이네. 탈레랑 의원과 시에예스 의원이 함께 쓴 내용이야.”

“아니. 왜 맨날 저보고 하라고 하십니까?”

“왜긴? 프랑스 국민들이 원하는 건 나, 가브리엘 리케 미라보 같은 뚱땡이가 아니라. 젊고 훤칠한 기욤 총감 자네이니 그렇지.”

국민의회 의장, 미라보 의원은 별 소릴 다한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도 정도가 있지, 정부 발표를 죄다 제가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제가 국민의회 의원이면 모르겠지만 전 재무총감입니다, 재무총감! 왜 저한테 의원들 일까지 떠맡기는 겁니까? 이거 고용노동법 위반인 거 모르십니까!?”

저기요, 사장님. 전 재무총감으로 계약했지, 입법부 의원이 아니거든요? 왜 회계직한테 마케팅까지 하라고 하십니까?

정식 업무 외에 타 업무까지 돌려서 뽕을 뽑으려고 하다니, 이거 완전 블랙기업 뺨치거든요?

격하게 몸을 뒤틀며 말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미라보 의장은 내 손에 억지로 대본을 쥐어주며 말했다.

“고용노동법은 또 무슨 해괴망측한 법인가? 어서 광장에 올라나 가게. 이러다가 <포브스> 선정 파리의 명물로 손꼽히는 기욤 총감의 연설 시간에 늦겠어.”

“······사드 이 인간 돌아가면 반으로 쪼개버려야지.”

“참고로 기사의 내용 때문에 언론인을 탄압한다면 그건 언론법 위반이네.”

“······.”

“자네가 제출한 법 아니었나? 잡지를 함부로 탄압하면 안 된다고. 설마 법을 만든 사람이 그 법을 어길 작정은 아니겠지? 어서 광장으로 올라나 가게, 파리의 명물.”

“예, 예. 갑니다, 가요.”

젠장, 내 미래의 권력으로부터 내 소중한 잡지사를 지키려고 한 법이 오히려 내 목을 조일 줄이야.

나는 입을 삐쭉 내밀고 주섬주섬 외투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

“““기욤! 기욤! 기욤!”””

수천 명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이 모습. 정말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구만. 대체 연예인들은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가 있지?

“예, 안녕하십니까. 프랑스 시민 여러분.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다들 저녁식사는 맛있게 하셨는지요.”

“““예!”””

“씁. 드시는 김에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를 드셨더라면 더 맛있게 즐기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저로서는 조금 안타깝군요.”

“““우우우!”””

“농담입니다, 농담. 하여간에 농담 한 번 하면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드시니, 원. 자꾸 그러시면 저 앞으로 딱딱하게 할 말만 하고 내려갑니다?”

“““우우우!!!”””

“하여간 이 사람들 참 고약하시다니까.”

음. 좋아. 다들 피식피식 웃는 게, 오늘도 광대 기욤의 만담은 성공적이군.

나는 큼큼-하는 소리와 함께, 몇 번 목을 가다듬고 연설문을 꺼내 읽어 내려갔다.

“오늘. 베르사유에 있는 국민의회와 저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그리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방위대는, 프랑스 인민 전체에 대한 행복과 권리에 대해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권리. 자연이 주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우리의 권리에 대해 선언합니다.”

“프랑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이번 선언에 의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며,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이 모든 정치적 목적과 위험에 앞서 굳건히 제 자리를 수호하는 것을 감시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시민들의 요구가 단순하고 명확하게 관철되기 위해, 우리 모두는 헌법의 유지와 모두의 행복에 이바지 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국민의회는, 지고의 존재 앞에. 그 존재의 비호 아래, 다음과 같은 사람과 시민의 권리를 승인하고 또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회적 차별은 공공의 해가 되는 행동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다.

모든 정치적 결사는 존중받는다.

자유와 재산과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해 저항할 권리는 존중받는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타인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다.

모든 시민은,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스스로 대표자가 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지위를 가질 때, 필요한 것은 오직 덕, 지성, 그리고 재능뿐이다. 신분은 필요하지 않다.

헌법에 의한 것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다.

법은 미리 전 국민에게 공표하지 않는 한, 합법적으로 제정되거나 명백한 법리가 아닌 이상, 개인에게 형벌을 내릴 수 없다.

법원의 정식 선고 이전까지, 모든 피고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가진다.

모든 사람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한,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

국민방위대와 경찰은 국민들의 권리를 위해 설립된 것이며, 특정한 개인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공공의 선을 위해, 조세는 불가결하다. 다만, 조세는 평등하고 공평하게 모두에게 징수한다.

모든 시민들은 조세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스스로, 아니면 대표자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시민들은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대한 정보와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헌법에도 종속될 이유가 없다.

소유권은 신성한 것이다. 그 누구도 개인의 소유권을 감히 침탈할 수 없다.

기원후 1791년 3월 25일.

사람들은 다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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