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8)
런던에 도착한 이후, 이삭의 민족 일행은 세 개로 갈라져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기 꼬마야, 너 혹시 이 공장에서 일하니?”
“네, 그런데요?”
“아니, 몇 살인데 벌써 이런 위험한 곳에서 일하니?”
“어···, 네 살을 두 번 먹었으니까··· 이제 여덟 살이요!!”
“······어이가 없네 진짜.”
왕립 조병창 및 공장이 즐비한 덴마크 가에서 노동자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시장을 조사하는 부사장, 플로리앙.
“각하, 이번에 각하와 함께 따라온 일행 중 솜씨 좋은 장인이 많다고 하던데 사실이옵니까?”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습니까? 이런, 이런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흘리고 다니는 거람. 혹시 뭐, 관심 있으시다면 제가 살짝 귀뜸만 해드릴까요?”
정치인 및 귀족들과 사교-사실 사교라기보다는 장사치가 이빨을 털고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지만-를 맡은 사장, 기욤 드 툴롱.
“이건 무슨 가죽으로 만든 것이오?”
“예, 그건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무소 가죽입니다. 상등품 중에서도 특상이지요!”
“오호? 아프리카 무소라, 듣기에는 나쁘지 않군. 지금 주문하면 얼마정도 걸리오?”
통 크게 런던 한복판에 있는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 만든 ‘이삭의 민족 명품관’에서 기욤이 물어다 준 고객들에게 연신 미소를 지으며 제 자식과도 같은 물건들을 팔아치우는 장인들과 뵈머.
그리고 이 셋 중 가장 즐거운 사람들은 당연 장인들과 뵈머였다.
“···50 파운드면 이게 리브르로 얼마지?”
“이보게 뵈머, 날 데려와줘서 정말 고맙네! 이제 좀 살 것 같으이!”
“허허, 이게 다 각하의 은혜 아니겠나.”
가죽 한 장, 보석 하나, 매듭 한 땀까지 모두 피와 땀, 그리고 정성을 들여 만든 자식과 같은 물건들이 장식장에 처박힌 채 썩어가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던 장인들의 참담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장인들과 뵈머는 자신들이 만든 어여쁜 아이들이 품격 있는 주인들을 만나 팔려나가는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데...
“음, 배치가 안 좋네요.”
“···예?”
스물도 채 안된 나이에 재무총감을 달게 된 젊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가방과 시계가 전시된 곳을 기존 위치에서 바꿉시다. 매장 안쪽에서 카운터 쪽으로. 아, 그리고 카운터 앞에는 전신거울을 하나 놓아주십시오. 참고로 매장 곳곳에 거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의와 상의가 있는 매대를 분리하고 중간에 가벽을 설치해 빙 돌아가게 만들어주십시오. 돌아가는 루트에는 눈에 잘 띠는 악세사리를 배치합시다. 보석 목걸이라던가.”
“가발과 가방은 매장 가장 안쪽으로 옮기죠.”
“좀 더 고급진 분위기로 매장을 꾸며봅시다. 아예 베르사유 느낌이 물씬 나는 가구나 장식을 배치하시죠.”
기욤 드 툴롱은 뒷짐을 진 채로, 드넓은 가게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뵈머와 장인들에게 말했다.
“그... 각하? 이렇게 매장 구조를 바꾸자고 하시는 게 무슨 연유 때문이신지요?”
“간단합니다. 손님들이 머무르는 시간을 늘려야 하거든요.”
“그, 그렇습니까?”
뵈머는 사장의 설명을 들었지만, 대체 왜 그래야하는지, 대체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당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기욤은 그런 뵈머의 모습을 보곤, 싱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뵈머 씨.”
“예, 각하.”
“매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우리 제품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요?”
“예,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은 물건에 노출이 되면 될수록 그 물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보기에는 단점이 너무 많아 별로라고 생각했던 물건도, 여러 번 스쳐가며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장점을 찾게 된답니다.”
마케팅의 아버지, 킹갓더제너럴 필립 코틀러 선생님께서 전 세계 경영학도에게 남긴 말씀이시다.
뭐, 저 말 이후에 책에는 심리학적으로 무슨 설명이 덧붙었던 거 같지만, 원래 원리보다는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나를 배우는 학부생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 잊어버렸다.
“자, 그러면 뵈머 씨. 우리 고객들이 사가는 것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뭐죠?”
“옷 입니다.”
“그렇습니다. 옷이지요. 그러면 그 고객 분들이 옷을 사기 위해 매장 안쪽까지 오는 과정에서 무엇을 보게 될 까요.”
“각하 말씀대로 매장을 바꾼다면 악세사리겠지요?”
“번쩍번쩍 빛나는 값비싼 보석들, 딱 보기에도 영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식 가죽 제품들. 사람들 눈을 현혹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대형마트에서 식료품 코너를 끝에 배치하고, 그 중간에 의류코너를 배치하는 이유가 뭘까. 바로 스쳐지나가는 주부들을 공략하는 거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지만, 여러 번 물건을 사러 의류코너를 왔다갔다할수록 옷이나 신발 같은 게 눈에 밟히기 십상이거든.
“으음...”
“뵈머 씨. 고객님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죠.
자, 옷을 사고 나왔습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아까 보고 지나갔던 보석과 가방들이 다시 눈에 밟힙니다.
우리 고객님들께서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 아까 산 옷에 저런 목걸이를 차면 꽤 잘 어울리겠는데?
어, 이 가방은 아까 봤던 옷하고 꽤 어울릴지도?
사람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적어도 한 번은 하기 마련입니다. 그걸 생각이라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가져가는 사람이 백 명 중에 적어도 몇 명은 있겠죠. 안 그렇습니까?”
나는 초롱초롱한 얼굴로 연신 ‘오...오...’를 내뱉는 뵈머 씨를 향해 이어 말했다.
“자, 우리의 고객님 입장에서 또 이어서 생각해봅시다. 이제 다 사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차례입니다.
어, 그런데 카운터 옆에 뭐가 있네? 이게 뭐지? 시계와 악세사리네? 생각해보니까 방금 사려고 한 옷과 잘 어울리는 거 같네? 잠깐, 여기 보석이랑 가방까지 합하면...?
고객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스쳐지나온 보석과 가방 쪽을 바라봅니다. 거기서 멈추는 사람도 물론 있겠죠.
그런데 거기서 안 멈추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뵈머는 놀라웠다.
첫 번째는 겨우 스물한 살짜리 젊디젊은 청년이 꺼낸 말이라는 데서,
두 번째는 이 젊은이의 비상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돈을 갈퀴로 쏟아서 제 주머니에 채워 넣을 생각뿐인 괴물 같아서.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 적어도 이 분 뒤만 쫄래쫄래 좇아가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뵈머는 몇 달 전, 이삭의 민족 정문을 두드렸던 자신의 선택에 뼈저리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뵈머를 깨운 건, 방금까지 들었던 젊은 목소리였다.
“아, 그리고 뵈머 씨. 한 가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예, 각하. 무엇인지요?”
나는 날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뵈머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는 손님들에게 소문 하나만 내주시지요.”
“소문··· 말이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샬럿 공주에게 연심을 품은 탓에 상사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젊은 청년이 있다고.”
“···각하, 연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공주에 상사병에 이게 무슨 말인지? 방금까지 매장을 뜯어고치자고 했던 이유는 이제 알겠지만 대관절 왜 그런 요사스런 소문을 퍼트리라는 건가.
“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되실 텐데요 뭐.”
아, 그러고 보니.
“영어권에서는 25주년을 실버 쥬빌리라고 부른다지요? 은에 어울리는 보석은 뭐가 있을지 미리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욤 드 툴롱은 마지막까지 뵈머에게 이상한 말만을 남긴 채, 가게를 나섰다.
***
1792년 11월 2일.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과 이삭의 민족이 영국 땅을 밟은 지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시기.
그레이트브리튼의 심장인 런던 상류사회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작 부인, 그거 들으셨습니까?”
“그거라니? 무슨 말씀이시지요?”
“글쎄, 어디 젊은 청년이 상사병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거예요.”
“어머나 세상에, 누구에게 연심을 품었는데요?”
“놀라지 마세요, 부인. 무려 샬럿 공주랍니다.”
“······샬럿 공주? 아니, 더 어여쁜 어거스타 공주가 있는데 왜 평범하기 그지없는 샬럿을 사랑한답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사랑에 빠지는데 조건은 없다고 하지 않나요.”
“어머머, 로맨틱해라!!”
차와 디저트를 즐기는 부인들의 다과회에서도.
“이보게. 자네 그거 들었는가? 한 얼간이가 상사병에 빠져 죽을 고비라더군!”
“허, 퍽이나 답답한 놈이군요. 남자가 됐으면 남자답게 부딪혀야지 왜 방 안에서 누워있답니까?”
“그 상사병의 대상이 샬럿 공주라고 하네.”
“···공주라, 누워있을 만도 하군요.”
“흥! 나 같았으면 말일세, 바로 버킹엄으로 달려가 공주전하 알현하기를 청하겠네. 요즘 젊은이들은 말이야, 아주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뭐, 백작님께 낭만이 있을지언정, 사격솜씨는 없으신 듯합니다. 하하!”
말을 타고 사슴사냥을 나선 모임에서도.
“이봐, 공주께서 구혼을 받으셨다는데? 아주 소문이 자자해!”
“어이, 형씨.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공주님이 어디 시집가면 자네 기계를 누가 대신 돌려주기라도 한다던가? 쓸데없는 거에 힘 좀 쏟지 말게.”
“쯧. 이런 거라도 안 주워섬기면 이 퍽퍽한 세상에서 무슨 낙으로 사나?”
5분 동안 흑빵 한 덩이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다시 일터로 나갈 노동자들까지.
남녀노소, 계급,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베스트셀러가 되기 십상인 풋풋한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로 인해, 런던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이게 다 주재 영국 프랑스대사가 전해준 얘기를 토대로 짠 내 계획대로였다.
“샬럿 공주는 현 국왕 조지 3세의 넷째 아이이자 맏딸인데, 어릴 적부터 둘째 딸인 어거스타 공주와 비교를 많이 당했습니다.”
“비교라. 어떤 비교말이십니까?”
“일단 외모지요. 샬럿 공주가 어디 못난 외모는 아니지만 영국인 모두가 알아주는 어거스타 공주의 미모에 비하면 솔직히 평범한 탓에 많이들 비교하더군요.”
“그 외에는 또 따로 없습니까?”
“성격에서도 비교를 많이 당했습니다. 샬럿 공주는 상당히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고, 어거스타 공주는 상당히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던 탓에...”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대사.”
“무얼요, 총감께서 찾으셨는데 당연히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줍음이 많고, 동생에 비해 비교를 많이 당한 스물 중반의 아가씨. 그리고 그런 아가씨를 사랑해 상사병에 걸린 젊은 청년.
어우 달달해, 이 썩는다 썩어.
“이보시오. 총감! 왜 우리 아들 녀석을 저잣거리에서 이야깃거리로 만든단 말이오!”
“이야깃거리라니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떠도는 이야기 말이오! 샬럿 공주와의 혼담이라면 당연히 당신이 들은 내 아들 놈 이야기 아니오! 이걸 어떻게 할 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와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씩씩거리는 귀족 나리를 향하여, 뵈머 씨에게 받은 반지케이스를 내밀어주었다.
“···이게 뭐요?”
“아드님께서 샬럿 공주께 고백할 때 쓸 반지입니다. 한 번 열어보시죠.”
“무슨...”
“어허, 열어보시라니까.”
반지케이스가 열리고, 새하얀 은과 그 위에 올려져있는 새빨간 루비가 그 아름다운 자체를 드러냈다.
“25주년은 실버 쥬빌리라지요. 마침 샬럿 공주가 올해로 스물다섯이니 딱 맞습니다 그려.”
상사병에 걸린 청년이 고심 끝에 골라 가져다주는 자신의 25살 기념 반지.
그게 어디꺼다? 이삭의 민족거다!
성공하던 실패하던 마케팅은 제대로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