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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잠자는 사자들 (4) (174/341)

잠자는 사자들 (4)

“당분간 프랑스에 돌아가 있어야겠습니다. 플로리앙 씨는 이삭의 민족 지사를, 마이어 씨는 그동안 프라이스 세부법인을 맡아 관리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장난감 사업은 일단 유보합시다. 지금 당면한 과제부터 끝내고 다시 시작하죠. 혹시 유출 될지도 모르니 시험 삼아 만든 건 다 프랑스로 가져가야겠습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왜! 왜! 선물 아니었습니까?! 오늘 밤에 전우들과 약속을 잡아놨단 말입니다!”

“나중에 다시 드릴 테니 어서 주세요.”

“흑흑,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음··· 하디 대위에게는 줬다 빼앗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지금 당장 본진으로 적 뮤탈리스크가 들이친다는데 천진난만하게 앞마당을 예쁘게 가꾸고 있을 사람은 없다.

내가 프랑스 칼레 행 배에 오른 지도 이제 근 3시간 무렵.

저 멀리에서 프랑스 땅. 칼레의 실루엣이 내 눈동자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삼색기를 단 화물선 따위가 이따금씩 내가 탄 배를 스쳐지나갔다.

“미라보 의장님이 쓰러졌다-라.”

나는 그렇게 뇌까리고는, 안주머니에서 하얗고 긴 막대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뭐랄까. 텁텁한 군고구마를 마실 거 하나 없이 꾸역꾸역 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꽉 막혀버린 머리를 이걸로라도 환기시키지 않으면 지금 당장 목이 막혀 죽어버릴 거 같거든.

분명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갈 때만 하더라도 자유를 얻은 도비의 심정과 함께 산뜻한 마음으로 출발했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프랑스로 돌아가는 내 어깨 위에는 거대한 짐덩어리가 두 개나 얹어져 있었다.

- 영국 군함에 깃발만 삼색기로 바꿔달고 러시아 놈들을 깨부숴라.

- 지금 국민의회에서 평원파와 산악파 둘 사이를 중재해주던 미라보가 쓰러졌다.

그 잘나신 절대왕정 빠순이 차르가 군함을 몰고 지중해로 쳐들어오신다니.

이번에 한 번 호되게 박살을 내준다면 앞으로 최소 10년 최대 20년은 그 못된 아가리를 내게 들이밀지는 못하겠지.

나폴레옹 형님, 그리고 넬... 뭐시기 함대장님. 믿습니다. 흑흑.

다만. 내부가 문제다.

내가 역사를 좀··· 많이 비틀지 않았나.

본래 저 하늘 위에서 새 집을 분양 받았을 루이 오귀스트는 지금도 튈르리 궁에서 거주하고 있고, 단두대로 사람 목을 썰어댔을 공포의 로베스피에르도 아직까지 사람 목을 자르지 않은 현실이다.

물론 시에예스나 로베스피에르나 다들 이런 내 생각을 알 턱은 없다. 그 사람들에게 ‘국민공회’니 ‘공포정치’니 하는 건 현실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겁이 난다. 내가 없으면 원 역사대로 서로 죽고 죽이는 수라도가 펼쳐질까봐.

십 년 지기 친구도 사소한 갈등으로 갈라서는 게 바로 인간관계 아닌가.

뭔가 건덕지가 있다면 순식간에 활활 타오를 인화물질 같은 사람들이다. 불씨가 될 만한 게 있다면 미리미리 밖으로 치워놔야지.

그런데 미라보 의장이 쓰러졌다.

국회 내에서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를 중재해주던 미라보 의장이.

아마도 다시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는 내가 또 중재역을 맡아야 될 거다. 부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별 일 없었으면 좋으련만.

“거, 인생 한 번 지랄 맞네.”

다시 한 번 내가 깨야 할 퀘스트를 복기하자 욕지거리가 나온다.

“항구요, 항구!! 모두 내리시오!”

선원들이 소리치고 배가 쿵-소리를 내며 정박하자. 나는 이제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는 바다에 퐁당 던져놓고, 짐을 챙겨 갑판에서 부두로 내려갔다.

“칼레 마차 승강장이 어디더라.”

그러나 내가 직접 마차 승강장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좀··· 반가우면서도 보기 싫은 그런 얼굴이 마중을 나왔거든.

“각하! 이 라부아지에가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아, 예.”

“그 영국 촌 동네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기껏해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같은 잡대 출신들뿐인 곳 아닙니까.”

“···시덥잖은 소리 말고 마차로나 안내해 주십쇼.”

“아이고, 배를 타고 오시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실례했습니다!”

“······.”

당신이랑 말을 하면··· 말이야. 정말 그냥, 좀 힘들어.

라부아지에는 내 손에서 짐을 억지로 받아들더니 자기가 세워놓은 마차로 나를 데려갔다.

마차가 있는 곳에 다 도착하자, 라부아지에는 촐싹거리며 내게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각하! 이 라부아지에가 얼마나 각하를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절 왜 기다리셨는데요?”

“왜긴요! 이 놀라운 발명품을 보여드리려고 왔지요!”

나는 그저 라부아지에를 아래에서 위로 슥-훑어볼 뿐이었다.

“발명품이 어디 있는데요?”

“저 말고, 이 마차를 보십시오, 각하!”

“마차가 왜···.”

라부아지에가 위풍당당하게 손으로 가리키는 마차를 보자, 나는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뭘 타고 오신 겁니까?”

“이 라부아지에와 퀴뇨 선생이 고안해낸 최첨단 운송수단, ‘L&C 자동증기마차 1호’입니다! 어서 타시지요!”

말 대신 거대한 증기 솥을 얹은 마차.

아니, 말이 없으니 마차가 아닌가.

라부아지에는 그 운전석에 앉아 내게 계속 어서 앉으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그가 잡은 건 고삐가 아닌, 핸들이었다.

***

베르사유.

전직 조폐국장, 현직 재무총감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퀭해진 눈으로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포브스>에서 동양의 참선인지 뭔지를 하면 내면이 안정된다길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봤지만 머리를 비우면 비울수록 온통 머리에 떠오르는 건 한 젊은 남자의 얼굴뿐이었다.

기욤 드 툴롱.

고얀 놈 같으니.

이 콩도르세가 기욤 그 녀석의 보람차고 밝은 앞날을 위해 얼마나 후원해줬는가.

막, 막, 그 뭐냐. 삼부회에도 대표로 자기를 뽑아주고, 재무총감 시절에도 든든하게 조력해주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제퍼슨까지 소개해줬는데!

기욤 이 녀석이 콩도르세에게 준 건 이 저주받아 마땅할 베르사유의 텁텁하기 그지 없는 재무총감실이었다.

그리고 이··· 듣기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은 행정회의도.

“로베스피에르, 우리 의원들이 담론을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어기 브르타뉴와 북 피레네 시골 짝에는 글은커녕 철자조차 떼지 못한 아이들과 성인들이 수두룩하네. 하루라도 빨리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전국에 학교를 보급하는 게 급선무 아닌가 싶네만.”

“의무교육이라, 좋습니다! 좋고말고요. 온 프랑스인들이 모두 식자가 되는 것만큼 봉건 세력을 확실히 날려버릴 수 있는 무기도 없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로서는 그걸 감당할 재정은 대체 어디서 충당할 건지, 시에예스 당수의 고견을 묻고 싶군요?”

“재정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네. 그렇게 어영부영 넘기다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 법률이 한두 개인가? 그 뭐냐, 이번에 상공회의소에서 낸 아이디어 중에 ‘앗시냐’인지 뭔지 하는 채권을 발행한다면···.”

“미치겠군. 시에예스, 문제는 경제입니다. 경제!! 전쟁이 끝난 지 2년 밖에 안 된 나라에서 무슨 채권을 발행하겠다는 겁니까!? 노동자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한참동안 입씨름을 한 로베스피에르 산악파 당수는 이 자리에 나온 또 다른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콩도르세 재무총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예? 아... 그으을쎄요.”

재무총감 콩도르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길게 말을 내뺐다.

‘젠장, 미라보. 평소에 건강관리 좀 하지 그랬나. 일평생 숫자나 보고 산 내가 대체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라는 건가!!’

미라보는··· 그래. 미라보는 이 두 사람을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시키는 게 가능하겠지.

그런데 콩도르세는? 20년 간 조폐국에 틀어박혀서 주화나 만지작거린 사람에게 능수능란한 정치질을 원하면 그건 양심에 털 났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콩도르세 재무총감. 대답해주시지요.”

제기랄. 무슨 말이라도 안 하면 죽일 기세군.

콩도르세는 목도 풀 겸, 로베스피에르의 말에 왠지 모르게 서늘해진 목을 손으로 몇 번 만져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채권 발행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에마뉘엘! 재무부도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젠장할. 막시! 그렇다고 2700만 프랑스인들 중 9할을 일자무식으로 만들 수는 없잖나! 우린 프랑스 혁명왕국이지, 파리혁명왕국이 아니란 말일세!”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남들이 듣기에는 두 사람의 말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 의견이었다.

예전이라면 서로 언성이 격해질 무렵, 기욤이나 미라보가 나서서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깨줬을 텐데.

“그러니까 안 된다니까!”

“아니, 자네 개혁 안 할 건가!?”

하지만 콩도르세가 할 수 있는 건 베르사유 궁전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열심히 분석하는 것 뿐이었다.

한참 동안 콩도르세가 바로크 양식의 미학에 대해 깨달음을 얻을 무렵,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으아악!! 말 없는 마차다!! 마법사다!!

- 괴물이다!! 근위대!! 근위대!!

- 국무회의장이 어딥니까!

- 전, 전쟁의 방에 있습니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서 다행입니다.”

그가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

“기욤 군, 와줘서 정말 고맙네! 고마워!”

“왜, 왜 달라붙으세요. 그보다... 많이 후덕해지신 거 같은데.”

“온종일 이 다락방에 처박혀서 서류에 감자튀김만 먹으니까 이렇게 되지! 자네 탓이야 자네 탓!”

흐음. 난 분명 콩도르세 국장님더러 많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보다 5년 만기 채권을 파는데··· 회수한 채권을 폐기하지 않고··· 다시 파시겠다?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십니까, 시에예스 사제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우리 당 재정고문 중 하나가 그러면 재정을 충당할 수 있을 거라 말하던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새끼 당장 자르십쇼. 별 미친 새끼를 다보겠네.”

“···그렇게 심각한 건가?”

“어디보자··· 한 3년 쯤 기다리면 리브르 액면가가 십 분지 일로 떨어지겠군요. 아마 초대형 인플레이션이 올 겁니다. 사람들이 100 리브르 짜리 지폐를 화장실 갈 때 들고 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으시죠?”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네.”

“사제님. 세상에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고, 실상은 사기에 불과합니다.”

“···내 유념하겠네.”

“큼큼. 내가 뭐랬습니까, 시에예스 당수.”

나는 고개를 돌려 로베스피에르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시에예스 사제님의 말도 틀린 건 아닙니다. 교육이야 말로 백년대계니까요. 빨리 시작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총감. 그러나···.”

“그래요. 현실이 여의치 않죠. 그래도 우리 다 혁명동지 아닙니까.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다혈질이었군요.”

다들 ‘못 살겠다! 왕 목 한 번 잘라보자!’라며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답게 빠꾸가 없어요 증말.

이러다간 내가··· 제명에 못 살겠다. 진짜로.

지금 러시아가 쳐들어와서 다행인가 싶다. 이렇게 삐걱거릴 때 단결할 건덕지를 주니 말이야.

물론 내 말을 들은 국무회의는··· 뒤집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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