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발전 (2)
낭랑 33세 기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가지 앙증맞은 장난, -예를 들어 나폴레옹과 서로 짜고 점심 내기 카드 놀이에서 그루시를 지게 만든다던지-를 빼곤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
이렇게 올바른 삶을 살아온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관대하며 올곧은 사람으로 자라났으니...
내가 이 빌어 처먹을 씹새끼들이 홀짝이는 커피잔들을 엎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총감.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영 안 좋으신데요? 혹여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으시다던가···.”
“아뇨, 괜찮습니다. 저어엉말로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핫핫핫, 이 사람의 괜한 우려였나보군요!”
사람 참 좋아 보인다. 하기야 저렇게 사교성 좋고 모난 데 없는 사람이니 미라보가 죽은 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겠지.
“총감, 커피 좋아하십니까? 아. 아니면 커피보단 차 쪽?”
“커피면 괜찮습니다.”
“바로 대령하지요!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하하하!”
브릿소는 얼굴 가득히 웃음꽃을 피우며 내 몫의 커피를 따라오겠노라 말한 뒤 자리를 비웠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나와 저번 일로 일면식이 생긴 사업가들이 앉은 응접실 안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우디노와 40인의 척탄병이 난입해 응접실에 있는 모두를 베어버렸다!
-같은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디노가 있으면 몰라도, 지금은 없거든.
사장이란 사람은 이렇게 뭐 빠지게 돌아다니는데, 부하란 양반은 따땃한 지중해 햇살을 맞으며 뱃놀이 중이라니. 천지가 곡할 노릇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휴가를 결재해줬단 말인가. 아마도 모시는 사장이 굉장히 멍청한 놈인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게 나야, 둠빠 둠빠 두비두바.
이럴 줄 알았다면 툴롱으로 휴가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씁쓸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굵고 아름다운 참나무 몽둥이가 없으면 이빨을 털어야지.
“거, 각설하고. 댁들이, 아니. 여러분들이 왜 여기있는지 육하원칙에 근거하여 싹 말해보시죠.”
내 말에 다들 쭈뼛쭈뼛 눈치만 본다. 아저씨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립니다.
역시 사람이란 아가리로 훈육 시키려고 하면 꼭 두 번 말하게 한다니까.
그러나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햇님과 바람의 전래동화를 잘 알고 있는 난, 온화하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 씨팔, 당신들 입 없어?! 왜 여기있냐고!!”
- 쾅!
어이쿠, 나도 모르게 힘을 실어 후려친 탁자가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그, 그러니까. 신, 신년 인사를 드릴 겸 겸사겸사···.”
“선생님. 카드 놀이 안 해보셨어요? 구라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모르시냐고.”
고요하다.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 그러나 괜찮다. 니들이 날리는 눈초리보다 내 가슴 속에 끓는 좆같음이 더 크거든.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실크로 만든 고급 중절모에 정장. 조금씩 희게 샌 턱수염까지. 누가 봐도 나 부르주아요, 하는 테가 역력하다.
“그러는 각하께선 왜 오셨습니까?”
“허?”
이야 이건 또 참신한 질문이네. 아주 여기 있는 1분 1초마다 새로운 좆같음을 선물해주고 계셔.
“저희가 이렇게 행차한 걸 보는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 나라는 명백한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 아닙니까? 자유 시민이 다른 자유 시민들과 함께 또 다른 자유 시민의 집을 찾았는데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있느냔 말입니다.”
이거 보소. 나름 짱구를 굴리셨구만.
“만약 저희가 정치인을 만났다고 그리 헐뜯으시는 거라면, 총감께서도 결코 그 말에서 자유로워지실 수 없으십니다. 각하께서는 지금 행정부 수반이 아니라, 저와 같은 일개 시민일 뿐이니 말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캬 새끼. 아가리 터는 거 보게. 당신들도 내가 원체 좆같은가봐?
틀린 말은 없다. 나는 지금 재무총감도 아니고, 임시 총리도 아니고, 재상도 아닌 시민일 뿐.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언제 당신들 ‘여기 왔다’고 뭐라 했습니까?”
“방금 전 그것이 뭐라 하신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니까?”
“저는요. 당신들이 어딜 싸돌아다니든 좆도 신경 안 써요.
고등법원에 가서 판사랑 와인 까고 노가리를 까든, 산악파 코르들리에 클럽에 가셔서 당원 가입을 하시든, 좆도 신경 안 쓴다고.”
나는 두 손을 올려 턱을 괴며 말했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들이 ‘왜’ 왔냐는 겁니다. ‘어딜’ 간 게 아니라.”
“······큼.”
“으흠흠.”
“방금 전까지 날 쏘아붙이던 프랑스 남아의 기개는 다 어디 가시고 잔기침만 하십니까? 다들?”
“···저희가 온 목적을 각하께 꼭 알려드려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말씀 잘하셨네!”
그 말 그대로 내일 조간신문에 내드리면 될까요?
나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누가 봐도 로비하러 온 것 같아 방문 목적을 물어보니. 그들이 말하길 ‘그게 님 알 빠임?’ 이라고 하더라! 고맙습니다. 내일 판매부수 달달하게 나오겠네요.”
싫지? 그러니까 말해. 니들 뭐하러 왔어?
“그러는 총감 당신도··· 윽!”
내게 삿대질을 하며 일어선 배불뚝이는, 옆 사람이 옆구리를 찌르며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억지로 분을 삭히고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옆구리를 찔러 뚱땡이를 앉힌 건, 예의 그 부르주아 티 팍팍 나는 중년.
역시 이 팍팍한 인외마경 18, 19세기에 사업하는 사람답게 눈치가 빠르다.
내 논리, 그러니까 ‘니들 딱 봐도 로비하러 왔지? 왜 목적 안 말해? 너 찔려?’를 내게 시전한다 한들. 나는 엄연히 ‘전직 재무총감’이다.
브릿소 저 양반하고 잠깐이지만 같은 베르사유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은 사이라고. 날 그걸로 공격해봤자, 나는 ‘엥? 저는 전 동료 잘 지내나 궁금해서 밥 한 끼 먹으러 간 건데용?’하면 게임 끝.
“사실대로 말해드리면 신문 얘기는 없던 걸로 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저도 정직한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서.”
“좋습니다. 총감께서 짐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희는 헌법에서 말하는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정치 주체로서 저희의 담론을 정치인에게 전달하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호오.”
말 하나 하나에서 저어얼대 책잡히지 않겠다는 용의가 팍팍 흘러나오는구만.
그렇게 내가 오랜만에 입근육을 좀 풀어놔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 덜컥.
“자, 자! 이 브릿소가 직접 내린 특제 커피가 왔습니다! ···아, 한참 분위기 좋을 때 제가 끼어들었나요? 하하하!”
문을 열고 나타난 브릿소는 커피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로 이미 인사치레는 한 것 같고, 그러면 이제 서로 만담이나 하시지요. 다들 이 브릿소를 찾아온 이유가 있으실 것 아닙니까.”
브릿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년 남자가 나서려 했지만, 그보다 빠른 건 나였다.
꼬우면 나이 좀 덜 먹고 오셨어야지. 속도가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어? 난 아직 팔팔하다고.
“음! 총감님, 어떤 주젭니까?”
“한 가지 제의 드리고 싶은 건이 있습니다. ‘반독점법’이라고, 경제법인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아니. 제게 이렇게 쉬는 날까지 일을 시키려 드십니까? 이 브릿소도 사람입니다, 사람.”
“저번 전쟁 끝나고 전후처리할 때 저 많이 굴려보셨으니 저도 한 번쯤 의장님을 굴려봐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끙. 그래서 그 ‘반독점법’이라는 것의 골자가 뭡니까?”
트러스트들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떠오른다. 딱 키워드만 듣기만 했는데도 뭔가 좆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오지?
“담합, 적대적 인수합병, 물리력 동원 등 시장을 어지럽히는 악덕 기업을 국가가 제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법입니다.”
“뭐, 뭐요! 이봐! 당신 미쳤어!!?”
이젠 총감이라고도 안 부르네. 섭하게. 크헤헤헤.
갑작스런 일갈에 눈이 땡그래진 브릿소는 곧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이거, 총감님의 생각과 저 분들의 생각에 꽤나 괴리감이 있는 것 같군요?”
“정부에 의한 시장 통제라니요! 의장 각하! 지금 기욤 드 툴롱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려 들고 있습니다!”
트러스트 중의 하나가 거의 대노(大怒)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 우리 프랑스에서 시장은 통제하다뇨! 자유로운 시장, 규제 없는 시장을 주창하던 애덤 스미스 선생께서 보신다면 코웃음을 치실 겝니다!”
“이건 자유와 민주에 대한 관제 쿠데타나 다름없습니다!”
캬, 아주 화끈해! 조금만 찔렀는데 아주 몸을 뒤틀고 난리가 났구만.
대경실색한 트러스트들이 빼액!-하는 말을 줄기차게 듣던 브릿소는 손을 들고 날 쳐다보았다.
“이제 반론을 들어볼 차례인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요.”
“의, 의장 각하!”
“그만. 이 브릿소가 방금 전까지 여러분의 말을 들었듯. 전 헌법 초안에 서명을 한 사람 중 하나로서 민주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의견을 청취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여윽시 죽은 미라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구만. 산 기욤이 이렇게 덕을 보다니.
“시장이란, 애덤 스미스가 얘기했듯 무궁한 발전과 혁신을 낳는 황금알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함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니까요. 따라서 시장이 규제로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더 많은 혁신이 일어나고 그 혁신이 더 큰 효율성과 부를 가져오는 건 필연입니다.
그러나 일부 생각이 혼탁하고, 버릇이 잘못 든 자들이 그러한 자유시장을 악용하여, 경쟁이 아니라 담합 등의 헛짓거리를 한다면.
그때부터 시장은 자유로운 경쟁의 장, 혁신의 장이 아닌, 가지고 있는 몽둥이가 더 큰 사람이 이기는 뒷골목이 되는 것입니다.
시장이 그렇게 뒷골목 깡패소굴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아까부터 자유주의 훼손이니, 민주주의 훼손이니 하시는데. 그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은 누구입니까? 바로 시민입니다. 그 시민이 피해를 보는데, 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브릿소는 내 말이 끝나자, 이제 저쪽을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그리고 무한 경쟁의 논리에 따라 그런 시민들은 어디까지나 경쟁에서 도태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몇몇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 또한 어떻게 생각하면 개개인의 성공에 대한 열망의 촉진제가 되어줄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거, 댁은 댁 가족이 공장 기계에 손 썰리면 분노가 아니라, ‘아, 나도 성공해야겠다!’하는 마음이 듭니까? 이거 완전 싸이코패스네.”
“뭐야?! 지금 싸워보자는 거요!”
“왜? 싸우시게? 당신 사병 있어? 우리 회사 부장하고 사원들이 칼 하나는 기깔나게 쓰는데 한 번 보여줘?”
“이건 협박이요!”
“뭔 협박이야 경쟁이지. 내가 뭐 당신 배때지에 칼침 놓겠다고 했어?”
“그럼 그게 협박이지 뭐요?”
“칼 차고 수염 기른 무서운 아저씨들이 댁네 공장 앞에서 진치고 있으면, 일용직 노동자들이 과연 당신네 공장을 들어갈까? 아, 겸사 겸사 옆에다가 간판도 하나 걸어놔야 겠군. ‘이삭의 민족 공장에 가면 월급이 따블! 이딴 곳 말고 이삭의 민족에 취직하세요!’.”
“하! 어디 한 번 해보시오! 경찰을 불러서 해결하면 되겠지!”
새끼. 걸렸다.
“브릿소 의장님. 들으셨습니까?”
“뭘 말이지요, 총감?”
“전 법을 어기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제가 알기론 이 프랑스 땅에 칼 차고 다니면 안 된다는 법은 없는 걸로 알고, 남의 회사 앞에 구인 문구를 걸어놓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요.”
“전 결코 법을 어기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압력을 행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경찰을 부르겠다네요?
캬. 방금 전까지 시장논리니, 자본주의의 논리니 하면서 국가가 시장에 힘을 행사하는 걸 꺼려 하던 사람들이, 제들 목에 칼도 아니고 가시 하나 박힐 뻔하니 태도가 변하는 거 보십쇼.”
“아,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런 논리가 되는 거요!”
“왜? 이 논리가 싫어? 그러면 당신 파리 시민들의 논리에 따라 바스티유 한 번 당해보고 싶은 거요?”
떠벌 떠벌거리던 입이 단숨에 닫혔다.
역시 바스티유란 단어는 위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