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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 (249/341)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1)

“비서실! 비서실! 오늘 당직 누구야!?”

“전데 무슨 일이십니까?”

“다과, 다과 준비해! 있는 거 다 꺼내와!”

“예? 이 시간에요?”

“어서! 머뭇거릴 틈이 없다!”

오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덕에 비서실과 탕비실은 포탄에 얻어맞은 것처럼 분주해졌다.

“일단 간단하게 다과를 준비했습니다만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허허, 늙으면 뭐든 잘 먹습디다.”

“그,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혹시 미라보 의장하고 혈연관계가 있으신지...?”

“아니오. 그분과 따로 연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연이 없는데도 사람이 저렇게 비슷하게 생길 수가 있구나.

여하튼 자신을 스페인 왕실궁정화가라 소개한 고야라는 고객님의 주문 내역은 간단했다.

- 증기자동차 20대를 인도해달라.

정말, 정말 시기 좋게 찾아온 주문이다. 영국에 진출하기 전 시험 삼아 런던에서 운용해보려던 물량과 딱 맞아떨어진다.

이러면 영국 시장을 포기해도 당장 위험은 없겠어.

물론 새로 다른 시장을 개척해야겠지만 그거야 감수해야지 뭐. 어차피 이 세상에 나라가 영국만 있는 건 아니잖은가.

“저야 그렇게 사주신다면 좋지요. 대금은 어떻게 지불 하시겠습니까?”

“삼분 지 일은 금과 은으로 지불 하겠습니다.”

“그러면 삼분 지 이는...?”

고야는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말씀드리기 부끄러우나, 제 그림 스무 점으로 치러도 되겠습니까?”

“그림... 말이십니까?”

“제가 운이 좋게도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재주를 타고나 궁정화가라는 직업으로 먹고살고 있습니다.

스무 점으로 안 된다면 서른 점을 그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각하.”

고야는 안 그래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허리를 더욱 굽히며 내게 부탁했다.

하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이렇게 저자세로 말씀하시니 너무 불편하다.

아직 내 머릿속 논리회로에는 대한민국산 유교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단 말이야.

나는 고야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앉은 자리 깊숙이 몸을 기댔다.

쓰읍. 대금의 삼 분의 이를 그림으로 지불하겠다, 라.

대당 1만 리브르짜리 자동차 20대 중 14대 값을 그림으로 지불하는 거니까 자동차 한 대에 그림 1.4장인가.

두 장을 받든 세 장을 받든 1만 리브르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건 아무리 봐도 손해다.

하지만 저 어르신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20장도 30장도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그려야 맞출 수 있는 분량.

자기가 털 수 있는 전재산을 털어넣었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프란시스코 고야라, 고야... 언뜻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만약 저 사람이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래하는 게 맞다.

그 누구였나, 램브란트? 그 사람 습작이 경매에서 150억에 팔렸다고 했는데 그런 게 스무 점이면 말도 안 되는 개이득이지.

하지만 아니라면? 사실 고야라는 사람이 미술계의 갈락티코, 무적함대 소속이 아니라, 미술계에 숱하게 존재했던 드토보도모탄 소속이라면?

그건 쪽박이다.

학창 시절 들어본 화가가 고흐, 다빈치, 피카소, 김홍도에서 끝난 내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란 말이야.

역시 이럴 땐 카페인이 필요하다.

난 내 앞에 놓인 커피를 원샷 때리고 빨리 내 대뇌피질로 카페인이 퍼지길 바라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좋아.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구만.

지금 영국행 배편이 끊겨 창고에 박혀있는 내 소중한 자동차들은 어차피 사가는 사람이 없으면 저대로 처박혀서 유지비는 유지비대로 빨아먹으며 썩어갈 예정이다.

파리 말고 다른 도시에도 사업을 시작하면 안 되냐고? 이 버스 노선이라는 게 생각처럼 바로바로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구가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 인구분포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어느 길로 가야 저 20톤 넘는 차가 원활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지.

충분한 현지답사 없이는 아마 24시간 안에 교통사고 내고 사업 철수 행이다.

그러니 최선은 해외 공급처를 찾아, 프랑스 국내 내수가 돌아갈 때까지 생산 라인을 손해 없이 유지하는 거다.

대당 1만 리브르라는 거액이 들어가는 비싼 놈 아니랄까 봐 팔아먹는 난이도도 어렵구만.

“고야 씨. 그림이라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그림. 그림이라... 한 가지 여쭤보지요.”

“무엇이든지요.”

“왜 이 자동차를 20대씩이나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 과시용이라면 한 대여도 충분하실 텐데.”

“···질문을 질문으로 되묻는 꼴입니다만, 각하께선 우리 스페인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프랑스와 비슷한 가톨릭 국가다. 이 정도?”

“그렇군요.”

고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열었다.

“스페인은 괴물의 국가입니다.”

“예?”

“성직자, 귀족, 영주라는 괴물들이 지배하는 국가가 바로 스페인입니다.”

엥, 그거 완전 20년 전 프랑스 아닌가?

“그렇습니다. 옛 프랑스와 비슷하지요. 그러나 구체제란 이름의 잠에서 깨어난 지금의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박한 평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봉건제라는 수면제 아래서 길들어져, 잠에서 깨려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 계몽주의자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직접 그분들의 눈을 틔워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불행히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수차례 스페인 전국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보았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습니다.”

풍파에 수많이 깎여나간 꿈. 그러나 그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예순의 노인은 초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영주와 사제의 말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든 간에 항상 옳고, 거역할 수 없는 말이니 평민들은 감히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그마한 장원 밖을 결코 나가보려 하지 않지요.

장원이라는 좁아터진 곳이, 성경이라는 소책자가, 간간히 오고가는 보따리상이 그들이 가진 세상의 전부입니다.”

전 이 물건으로 그들의 눈을 틔워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넓은 세상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얼마나 놀랍고 굉장한 세상을 그들이 살고 있는지.”

“···겨우 신기한 기물을 보여준다고 사람들이 달라질까요?”

“모르지요. 달라질지 달라지지 않을지.

그러나 얼마나 미약하든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바뀌게 된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잭팟이냐, 아니면 쪽박이냐.

나는 고민 끝에 어르신을 바라보고 입을 열 수 있었다.

***

“아, 그러니까 본토가 아니고-”

“예. 부왕령, 어떻게 보면 식민지 출신이죠.”

“이야 식민지 출신이면 안 그래도 좆같은 군생활이 더 좆같을텐데 용케 대위까지는 갔구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산 마르틴 대위는 커피를 홀짝이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래 그래. 난 대위 달고도 개뿔 나아지는 게 없어서 때려쳤지만, 젊은 친구는 할 수 있을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식민지 출신이랍시고 무시하는 꼰대들 때문에 정 못 해먹겠으면 파리로 오게.

내 이름 니콜라 우디노를 걸고서, 특채로 우리 보안팀에 꽂아주지. 이래 보여도 우리 회사 월급하고 복지가 꽤 달달하다고.”

“하하, 기억해놓죠.”

- 그러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오. 얘기가 끝나셨나 봅니다.”

“그래, 대위. 앞으로 또 만날 일이 있으면 좋겠구만.”

산 마르틴은 그 험상궂은 얼굴로 잘 지어지지도 않는 미소를 짓는 우디노에게 고개를 살짝 꾸벅인 뒤, 서둘러 문을 나서는 고야를 부축했다.

“선생님, 제가 잡아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대위.”

“일은 어떻게 잘되셨습니까?”

“감사하게도 이 늙은이가 그린 그림을 받아주셨네.”

“오오! 그러면 이제 정말 우리 스페인도 프랑스처럼 될 수 있는 겁니까?”

“그야 모르지.”

“예?”

고야는 마차 뒷좌석에 오르며 그리 말했다.

“선물이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름지기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야 하는 법.

민중들이 긴 잠에서 깨게 되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그저 신기한 기물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 될지. 그건 절대적으로 민중들에게 달려있네.”

그의 굳은 얼굴을 청명한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

“아,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야.”

영국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았지만, 천만다행으로 스페인에서 수요가 생긴 덕에 나는 오랜만에 두 발을 뻗고 소파 위에 누울 수 있었다.

발주는 앞으로 5달 동안 차례차례 한 대씩 스페인 마드리드로 운송될 예정이었고, 세부일정이나 계획이야 내가 굳이 손 안 대도 알아서 굴러갈 터.

나는 정말 늘어지게 쉴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노곤노곤하니, 이대로 낮잠 한숨 때리면 되겠다.”

어우 하품이 막 나오네.

잠이 온다.

잠이 온다.

잠이...

- 쾅! 쾅! 쾅!

- 야! 문 열어!!

“오. 시발. 하느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나 뒈졌을 때 심판했으면 됐잖아. 왜 자꾸 이렇게 날 못살게 구는데.

- 마! 니 퍼득 안 나오나!

나는 이를 북북 갈며 소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데 문을 왜 이제야 열어!?”

“어우 시끄러. 여기가 무슨 화개장턴 줄 알아?”

“화개장터는 뭔 말인지 모르겠고! 너! 딱 말해라.”

나폴레옹은 내게 검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니, 내 동생 노처녀 만들 거냐?”

“···누구? 폴린?”

“그럼 걔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아니. 결혼은 솔직히 너무 이르지 않아? 나야 서른셋이지만 걘 스물넷이라고!”

“말 잘했다! 스물넷이면 노처녀지! 이 빙시새끼야!”

아니 스물넷이 어떻게 노처녀야.

“마, 됐고. 딱 하나만 말해 봐라. 니 내 동생이랑 결혼할 거야 안 할 거야?”

“글쎄?”

“그으으을쎄에에?”

“아니. 아니. 생각해봐. 걔는 이제 스물넷이라고. 9살 차이나는 아저씨인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지. 안 그래?”

어어. 지휘봉은 왜 휘두르고 그래. 그거 그렇게 쓰라고 만든 거 맞아?

“하아. 야, 너 오늘 일정 없지.”

“아니. 매우 중요한 일정이 있는데.”

낮잠, 씨에스타 몰라? 문화 상대성이 떨어지시네. 하기야 그래야 본래 역사에서도 외교를 개판낸 나폴레옹이지.

“내가 니 일정도 파악 못 했을 거 같나? 없는 거 다 아니까 따라 나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정보사령부가 좆으로 보이디?”

“···이거 사적감찰이야! 사적감찰이라고!”

“닥치고 니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한 번 물어보자고.”

“이런 미친! 권총은 왜 꺼내!?”

나는 결국 우리가 학생 때 많이 가던 클럽으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어, 오랜만."

"히야! 바쁘신 몸께서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구만! 오랜만일세!"

"아니, 댁들은 왜 여기있어?"

"왜긴? 친우의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그루시가 가만있을 수야 없지 않나."

"내 머리가 어디가 어때서?!"

"건장한 프랑스인 남성이 아리따운 숙녀를 해가 다 지나가도록 독수공방시키는 게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증거 아니겠나. 자, 이 에마누엘 드 그루시와 프랑수아 마티유가 자네의 그 뒤틀린 생각을 교정해주겠네."

이, 이, 미친 전근대인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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