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13)
자, 사랑과 평화를 사랑하는 이 기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혁명맛 씨앗을 뿌렸다는 걸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오스만과 프랑스는 군사동맹을 맺은 사이.
21세기에서 미국이 나토. 그러니까 영국, 프랑스, 독일에게 걸핏하면 ‘님들 장난함? 미군이 공짜 방패임?’이라고 일갈하고, 한국에겐 ‘캬 우리 혈맹 보소. 한미동맹 영원하자!’ 라고 외교적 제스처를 두두두 쏴주던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바로 자기들이 흘릴 피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동맹군이 약해질수록 미국이 흘릴 피가 많아짐은 당연한 일이잖나.
미국 빽만 믿고 군대를 팍팍 감축시키다 못해 빗자루를 기관총 대용으로 전차에 올려 훈련하는 나토군.
그에 반해 강산이 쪽바리, 빨갱이, 짱깨에게 3연타로 밟히는 바람에 눈이 돌아가서 징병률 97퍼센트를 찍고 전차, 전투기, 군함을 뽑아내는 대한민국 국군.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울 미국 입장에선 둘 중 누가 더 이쁘겠나?
당근빠따 한국이지.
이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프랑스가 오스만 내전에 한 숟가락 얹었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는 아리라 믿는다.
동맹국이 반으로 갈라져서 죽-, 아니지. 죽지는 않았으니 반갈살이라고 하자.
여하튼 반갈살되면 바다 건너 세계 최악의 혐성국이자 제 1 가상적국이 살아 숨 쉬는 프랑스로선 당연히 해지 결코 이득이 아니다.
나 또한 셀림의 의지와 비전을 보고 오스만이 후유증을 털어버리고 벌크업에 성공하는 순간 종전보다 두 배는 강해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한 거다.
단기적으로 반토막 난 주식이 장기적으로 300% 올라갈 거라 생각하고 타는 느낌이랄까.
따라서 객관적인 제 3자가 봤을 때, 나와 셀림 3세 간의 밀약이 있다는 걸 모른다면 프랑스가 오스만에 개입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어떠냐 내 완벽한 논리가.
열 받지? 꼴 받지? 화나지?
하지만 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에베벱 아뉜데요’ 하고 뻗대면 니들이 뭘 할 수 있냐고.
영국 놈들이 내가 오스만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면 몇 안 되는 방법뿐이다.
나와 결탁해서 리치왕이 되기로 결심한 셀림 3세를 꼬셔서 ‘사실 프랑스가 도와줬음’ 이라는 증언을 따내든가.
아니면 강령술을 배워서 죽은 예니체리에게 누가 널 죽였냐고 묻거나.
지금쯤 상여금으로 지급된 빳빳한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시칠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우디노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던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차치하고서, 세 번째 또한 제임스 본드나 킹스맨이 19세기로 트립해 사악한 영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설정의 막장 지구가 아닌 이상 요원하지.
만약에 우디노를 잡았다 치더라도 그 양반이랑 그 밑에 부하들은 이미 10년 넘게도 전에 프랑스군에서 전역한 ‘용병회사’ 사원들이라구.
프랑스 정부와는 공식적으로 아아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거야.
“저로서는 오히려 영국이··· 인위적으로 사건을 조작해 내분을 일으키지 않았나 의심이 갔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국이 오스만 산 아편을 사다가 중국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는 건 경제계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깁니다.”
“그렇습니다만.”
“한데 오스만이 이렇게 혼란하면 정상적인 교역활동이 가능할까요? 심지어 사건이 터지자마자 해군을 출동시켜 보스포로스를 봉쇄하시던데 이렇게 발 빠르게 대응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참··· 싱숭생숭합니다.”
너네 딱 말해봐. 혼란에 빠진 오스만을 기회 삼아 아편 원료 값 팍팍 후려치고, 이참에 느그들이 에게해까지 멱살 잡고 흔드려는 거지? 그렇지?
“그건 너무나 비약이 심한-”
“비약이 심하다니요. 이미 에게해 한복판에 왕립해군 전단이 떠 있는데 무슨 비약이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영국 국적자들의 신변을 우려해 취한 조치일 뿐입니다.”
“허허, 참.”
나는 허허로운 듯이 웃으며,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뺏다.
톡톡 두드리자, 한 개비가 툭하고 튀어나온다.
“특사님.”
“예, 각하.”
“그거 아십니까? 나는 영국이 그리 싫지만은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저 전제군주국들을 보더라면 배를 따버리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는데, 문명국인 영국은 아니잖습니까.”
성냥을 칙-하고 그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게다가 우리 회사에 일하는 영국인도 있고, 아시다시피 그쪽 피트 수상과 난 꽤나 말이 통한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
이런 금연가셨나. 좀 불쾌하다는 얼굴이시네. 하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아닌가.
외교관이 얼굴을 찌푸리다니, 그런 면에서 일단 10점 감점.
“특사님.”
“예.”
“20년 전. 내가 런던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여러분들이 항상 원하던 걸 손에 쥐어 드렸습니다.”
몰타.
지중해 전체를 감제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자 항구.
철 지난 기사단인지 뭔지를 내쫓고 영국인들이 몰타에 처들어가 자기네 안방처럼 뚝딱뚝딱 개조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피트와 짜웅한 내가 묵인했기 때문이다.
지브롤터에서 몰타보다 툴롱에서 몰타까지가 더 짧다.
즉, 프랑스군이 무력을 투사했다면 몰타를 그렇게 식은 죽 먹기처럼 먹기는 힘들었겠지.
“난 여러분에게 몰타를 선물했습니다. 당신들이 염원하던 지중해를 말입니다.”
그런데 니들은 이렇게 날 의심하고 헐뜯다니?
물론 내가 한 게 맞긴 한데... 그러면 안 되지 이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아.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귀국이 지금 흉금에 야심을 품은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저흴 숫제 전쟁광 취급하시는데-”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흰 어디까지나 이번 내란을 일으킨 검은 그림자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검은 그림자가 사실 영국은 아니구요?”
“이미 영국은 명명백백하게 관계 없다는 증거가 있습니다만.”
“그거야 영국인 여러분들이 조사한 결과잖습니까. 설마 그 조사 결과를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받아드리라고 하는 건 아니시라 믿겠습니다.”
특사의 얼굴이 팍팍 썩어나가는 게 참 볼만 하다.
이참에 백분토론을 도입해볼까? 그 왜, 서로 나와서 수천 명이 생중계로 보는 가운데 입으로 사회적 위신을 걸고 뜨는 막고라 말이다.
자존심 하난 오지게 쎈 우리 프랑스인들이라면 영국인 외교관 참교육하는 걸 보고자 구독료를 아끼지 않을 거 같은데.
“내가 특사님께 해줄 말은 이게 끝입니다. 우리 프랑스는 무죄이며 귀국은 지금 세계의 평화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부디 여러분의 슬기로운 선택으로 평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군요.”
뭐라 말을 주워섬기려는 특사에게 나는 꺼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어줬다.
까짓거 이렇게 속을 박박 긁었으니 선전포고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
- 우릴 의심한다고? 난 느그들이 더 의심스러운데? 그리고 자꾸 선 넘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쫄아서 니들하고 안 붙으려는 거 아니다. 적당히 해라 알겠냐?
파리로 보낸 특사가 털레털레 돌아와 말을 전하자, 웨스터민스터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기욤 드 툴롱은 친영파 아니었나? 왜 갑자기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지?’
젊은 서민원 의원들부터 나이 든 귀족원 의원들까지 모두들 고개를 갸웃하는 상황.
급소를 찌른 것도 아니고 대충 찔렀는데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프랑스 재무총감은 명백히 전쟁을 책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방위대가 대대적으로 신병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두고 볼 것도 없어요! 프랑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단 말이외다!”
주전론자들은 기욤의 반응을 호전적인 성향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보세요 의원님. 신병모집이야 우리도 인도 때문에 하고 있는 판국 아닙니까?”
“야! 그래서 진짜 전쟁하자는 거냐!?”
“그러면 개구리 새끼들한테 쫄아서 빼자고!?”
“정 군대를 보내고 싶으면 피카딜리에서 여자나 꼬시고 다니는 당신 아들이나 전쟁터로 보내시오!”
“기욤 드 툴롱이 왜 저러겠습니까? 당연히 프랑스 내부에서도 왕립해군이 자기네 동맹국 앞바다에서 왔다갔다하면 간담이 서늘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대로면 기욤은 그렇게 겁먹은 자들의 대리인으로서 우리에게 경고를 한 게로군, 아귀가 맞아 떨어져.”
유화론자들은 기욤의 반응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안온함.
적자 투성이었던 장부가 드디어 플러스로 바뀌고 브리튼 제도를 벗어나 수많은 탐험가들이 신세계를 발견하고 영토를 넓혔는가.
전쟁에 쓸 자원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얼마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
이 좋은 날들이 더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싸워서 이긴 놈이 영토고 뭐고 다 먹을 수 있는 중세시대와 달리, 국가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현대는 이긴다 해도 먹을 수 있는 파이가 한정적인 판인 것을 왜 굳이?
게다가 대영제국이 마지막으로 거대한 전쟁을 치른 지도 어언 4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유럽 열강들을 상대로 검을 맞대고 싸웠던 대부분의 병사 및 부사관은 생을 다하거나 제대한 지 오래.
유일하게 실전 경험을 가진 병력은 전성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그러니.
“긴급 국방 예산안을 편성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산안이요?”
“우린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허나 전쟁을 억제할 억지력은 어느 정도 가져야 하겠지요.”
“전쟁부는 군복 20만 벌, 군화 15만 켤레, 소총 20만 정, 대포 400문에 해당하는 군용품을 조병창에 주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 돈이면 씨-”
“재무부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지금은 재무장부보다 국방장부에 써있는 숫자가 더 중요하오.”
“추가로 해군 병력 증강 안을 통과시키겠소. 앞으로 8개월간 자체적으로 병력을 충원할 수 있게 ‘강제 징병권(Impressment)’을 부여하겠소.”
“그만! 그만! 의원님들! 대체 돈이 어디서 솟아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디긴. 중국이 있잖소.”
아편 판매를 늘립시다.
***
중국, 청나라.
“영길리 양이(洋夷)들의 무도한 행동이 도를 넘었노라.”
위대한 정복자, 선대 건륭제를 보고 자란 7대 황제 가경제는 근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 양이라는 것들은 참으로 흉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다.
아편을 그토록 팔지 말라 수십여 차례 경고했거늘, 이들은 너그러운 황은에 감사하긴커녕 오히려 비웃는 듯이 아편 수출량을 배로 늘렸다.
뭐지? 이 새끼들은?
감히 천자국인 대청에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황천길로 빨리 가고 싶다는 건가?
“따라서 황명을 내리노니 각성 순무 서리들은 수군을 차출해 양이들의 상선을 힘으로 압수하고 거기 실린 흉험한 풀을 모두 태워버리라.”
“예, 폐하.”
1812년 1월.
황제가 하사한 깃발을 달고 청나라 함대가 광저우에서 발진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중, 중국인들이 대규모 함대를 발진시켰습니다! 그 수가 100여 척에 달한답니다!”
“하!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군! 총원 전투배치 준비하도록. 국왕 폐하와 조국을 위해 이 호레이쇼 넬슨이 뭣 모르는 황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대영제국 인도-아시아 함대가 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