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00화 (312/341)

잘 어울리는 이웃 (5)

평소라면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과 산책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채워질 시간.

인구 3만의 소도시, 트리어에는 일상의 편안함 대신 긴장감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

“이거 비싼 피아노인데...”

“죽으면 피아노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어?”

- 콰직.

도끼가 그랜드 피아노를 후려갈기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쪼개진 틈새로 모래를 채워 넣고 다리를 부러뜨렸다.

쿵! 하고 쓰러진 피아노가 훌륭하게 길 한복판을 막아서는 바리케이드가 되었다.

“화약! 탄약 받아 가세요!”

“인당 10발씩, 더 필요하면 시청으로 와서 받아 가시오.”

시청 앞에서 무기와 탄약이 배분되고, 군경력이 있는 유지들은 한데 모여 어느 곳에 방어를 집중해야 하고 어느 곳을 요충지로 삼을지 의논했다.

“부상자들이 나올 텐데... 어디로 옮길 예정입니까?”

“프랑스군 군의관들이 10번가에 있는 저택을 야전 병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부상자들과 노약자들은 거기로 옮기도록 합시다.”

“좋소. 아무리 쓰레기라 해도 프랑스인들이 돌보는 부상자들에게 해코지는 못 하겠지.”

“예? 프, 프랑스군은 개입해주지 않는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윗니와 아랫니를 서로 부딪혀 딱딱-소리를 내던 한 앳된 청년은 두려움이 깃든 얼굴로 말했다.

“지, 진압군이 이번에 대포까지 끌고 왔다던데 프랑스군도 없으면... 어, 어떻게 하죠?”

“이봐. 젊은 친구.”

“예, 예?”

“신사답게 행동해.”

중절모를 푹 눌러쓴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저 멀리 줄지어 이동하는 인파를 가리켰다.

갓난쟁이 아이를 안은 부인,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는 노파. 소풍 가듯 노래를 부르며 착착 걸어가는 뭣 모르는 꼬마애들.

“눈앞에 상대하기 막강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무기를 내려놓으면 저 사람들이 어떻게 될 거 같나?”

“···진압군도 같은 제국민 아닙니까. 도 넘는 해코지는 안할-”

“하하!”

노인은 담배를 하나 물고 크게 웃었다.

“이봐 젊은 친구. 저들이 도를 넘었으니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

“그건... 맞죠.”

“작정하고 사기 치는 놈에게 뭣 모르는 사람이 홀려 재산을 탕진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주변 사람들도 피해자를 위로해주고 두둔해주고 사기꾼을 욕하지 않나?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니 말 일세.”

노인은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말을 더했다.

“하지만 사기꾼에게, 그것도 똑같은 사기꾼에게 두 번이나 속아 넘어가면, 우린 그걸 더 이상 불쌍한 피해자가 아니라 병신이라고 부르지. 젊은 친구. 자넨 병신인가?”

“······.”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군. 병신은 아니고 머저리로 하지. 어떤가 젊은 머저리 친구?”

“···그러는 어르신은 뭐, 항상 떳떳하게 사셨나 봅니다?”

“아니? 난 병신인데.”

“예?”

젊은이는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올해로 일흔이야. 그 좆같은 징발을 몇 번 당했을 거 같나?”

“그을쎄요...”

“나도 몰라!”

노인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하도 많이 당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단 말이야.”

“예에...”

“어디 보자. 내가 자네보다 어렸을 때니까... 한 60년 됐나? 그때 처음 정부가 세간살이를 뜯어갔지. 어딜 공격한다더라? 이탈리아였나, 불가리아였나.”

50년 전, 40년 전엔 어디 바다 건너 군대를 보낸다고.

30년 전엔 이슬람 이교도들을 친다고.

20년 전엔 프랑스를 친다고.

1년 전엔 같은 말 쓰는 사람끼리 총부리를 겨누겠다고.

노인은 높은 하늘 어드메를 바라보며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었다.

“감정이란 건 말이야. 마모돼.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너무 많이 당하면 나중엔 그러려니하고 넘기게 된단 말이지.”

“···.”

“이 늙은이가 얼마나 살아온 거 같나? 내 속은 이미 닳고 닳은 지 오래일세.”

“···그러면 뭐 때문에 나오신 겁니까? 그냥 집에 있으셔도 되잖습니까.”

“왜긴. 자네들 때문이지.”

노인은 담배를 계속 쥔 채 남는 손가락으로 젊은이를 가리켰다.

“자식한테 돈 한 푼, 빵 한 조각 더 남겨주고 싶고 고생 덜하게 하고픈 게 늙은이들 마음이야.”

하물며.

“손자 손녀처럼 느껴지는 젊은 친구들이, 나 같은 대접을 받길 원하는 노친네가 있겠는가? 난 오늘이 기회라고 생각하네. 내 다음 세대들이 인간답게 살 기회 말이야.”

“···그 기회를 확실히 잡으려면 더더욱 프랑스군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프랑스인들은 외지인이잖나.”

노인은 다 탄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구둣발로 꺼트렸다.

“우릴 도우러 와준 외지인들에게 대신 죽어달라고까지 말하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나?”

그들도 누군가의 손자일 텐데 말이다.

***

“으, 으아아...”

한스는 허리춤에 찬 화약통을 열고 총구에 들이밀었지만,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화약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주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탄환을 넣어야 하나? 인당 화약은 10발 치라고 했는데 주워야 하는 거 아닌가?

생전 처음 겪는 전장의 소음과 냄새와 광경에 한스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짝!

찰진 소리와 함께 홱-하고 고개가 돌아갔다. 아프다.

“병신아! 주울 생각하지 말고 장전해!”

“예, 예!”

한스는 뺨에서 전해지는 얼얼한 통증을 참고 허리춤에서 탄환 주머니를 찾으려 손을 뻗었다.

없다. 손에 쥐어지는 게 없다.

탄환 주머니는 언제 총알이나 파편에 스쳤는지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얼 타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한테 빌려!”

“누, 누구...”

“엎드리라고!”

뺨이 한번 더 돌아갔다. 이번엔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펑펑 터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머리를 장악한 까닭이었다.

한스는 명령대로 죽은 동료의 허리춤에서 탄환 주머니를 빼내기 위해 몸을 엎드린 채 슬금슬금 포복으로 나아갔다.

- 팍!

총알이 건물 벽에 튀기는 바람에 생긴 파편이 땅에 다시 한번 튀기면서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엎드리지 않았다면 복부에 파편이 박혔으리라.

맞아서 빨개진 한스의 뺨에 더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일까. 죽은 자에게 다가간 한스의 손은 어느새인가 바닥을 짚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어르신. 어르신...”

어깨를 흔들어보았다. 대답도, 움직임도 없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맞담배를 나누던 노인의 가슴팍에선 동전만 한 구멍이 나 있었고, 거기선 70년 동안 노인의 심장을 뛰게 만들던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찰박거리는 건 자신의 뺨에서 흐른 피가 아니라, 노인의 따듯한 피였다.

끔찍해하며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 타다당!!

저 공포스러운 소리. 아마 진압군이 일제사격을 한 것이리라.

바리케이드에 따다닥!-하며 총알이 달라붙었다. 열심히 채워 넣었던 모래가 사르륵-하며 조금씩 틈으로 새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스는 아까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탄환 주머니에서 납탄 하나를 꺼내 총알을 쟀다.

바리케이드 위로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저 멀리, 한스가 수없이 지나다녔던 거리. 그곳에 적이 있다.

무기를 들었다. 가늠좌에, 가늠쇠에 적을 담는다.

묵직한 반동이 어깨를 때린다.

맞았나? 맞췄나? 잘 모르겠다.

그런 걸 확인하면 죽는다. 두더지처럼 머리를 냉큼 숙여야 한다.

뺨을 몇 대 얻어맞았지만 한스는 멍청이가 아니다.

한스가 저 전쟁 기계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시가전, 방어자의 유리함 때문.

바리케이드 뒤가 아니라면 이미 다진 고기가 됐을 거다.

다시 총알을 잰다. 쏜다.

옆에 있는 아저씨들이 하나씩 쓰러진다. 건물 안에서 커튼을 치고 몸을 덜덜 떨던 몇몇 이웃들이 두려움을 깨고 나와 신음을 흘리는 동료를 질질 끌고 후방으로 향했다.

또다시 총알을 잰다. 쏜다.

총신이 너무 뜨거워졌나? 겨울임에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옆에 미리 쌓아놓은 눈뭉치에 쥐고 있던 총을 던지고, 어르신이 들고 있던 총을 꼬나쥐었다.

탄은 이미 장전돼있다. 어르신은... 쏘지 않았나? 어르신에겐 저기 있는 적들도 누군가의 손자나 다름없다고 여겨진 건가?

모르겠다. 그런 걸 신경 쓰기에 한스는 너무 피곤했다.

- 탕!

지속되는 전장의 긴장 때문에 동공이 확장된 탓일까. 이번에는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적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도.

- 쾅!!!

“억.”

몸이 날아간다. 허공을 난다. 왜 날지? 그 단단한 바리케이드는 왜 박살이 난 거지?

아. 포탄이구나.

그 무서운 총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굉음과 충격은 한스와 시민군이 의지하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아아악! 내 팔!! 내 팔!!!”

“5중대, 돌격 앞으로!”

“신성하신 합스부르크에 영광있으라!”

“씨..발...롬들... 영광은 니미.”

한스는 쓰러졌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행히도 충격만 받았지 어디 사지가 날아간 건 아닌 거 같다.

이제 막 일어서는 한스의 어깨를, 누군가 잡고 부축했다.

“이봐, 이봐! 살아있나?”

“예, 예... 그런 거 같습니다.”

“퇴각해야 해. 시청까지 물러나서 농성한다.”

시청... 시청이라. 저 압도적인 폭력에 시청이 버틸 수 있나?

···시청이 무너지면 거기서 더 물러날 곳이 있나?

한스의 어지러운 머리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전장의 피로 때문도 아니고 감정의 소모도 아니고, 다시 한번 커다란 충격이 그가 서 있는 거리를 강타했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한스를 떠받치고 있었던 남성도, 한스도 자리에 다시 허물어졌다.

저 멀리 손에 무언갈 쥐고 던지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류탄.

포탄보단 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찢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번엔 더 이상 엄폐물이 없다. 뒤로 뛰지 않으면 죽는다.

돌아서서 뛰었다. 한 대여섯 발자국 갔나? 힘이 풀린다. 고개를 내려 다리를 보니 어디서 손가락보다 좀 큰 나뭇조각이 박혀있다.

다리가 화끈거린다. 바닥에 데구르르 굴러온 수류탄 심지가 치지직-하고 거의 다 타들어 갔다.

죽는다.

그 순간 누가 목덜미를 잡아채 뒤로 끌었다.

격발된 수류탄 파편이 아슬아슬하게 한스의 신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Hé, jeune. Ça va?”

“헉, 허억, 헉.”

“음... 괜찮다? 당신?”

“괜, 괜찮, 괜찮습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된다. 우리. 국민방위대. 왔다.”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웃는 푸른 군복의 군인 뒤로, 매캐한 화약 연기 사이로 은은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

“···모두 모였나?”

“예 장군님.”

기껏해야 2개 대대, 2천 명을 조금 넘는 수.

하지만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부터, 부사관에 이르기까지. 전부 전쟁터를 경험해본 정예들이다.

“제군들. 제군들. 우리 프랑스군을 부르는 명칭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랑다르메(Grande Armée, 대육군)라던가, 개구리라던가 뭐, 그런 거.”

프랑수아 마티유는 집결한 장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군들. 본관은 그 어떠한 별명보다 ‘국민방위대’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의 덕목이 바로 드러나는 이름이 바로 ‘국민방위대’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걸 자랑스러워했다.

아미앵에서 왕당파와 맞서싸운 부사관도.

코르시카에서 러시아군과 맞서 싸운 장교도.

마티유도.

군문에 들어선 이후 단 한 번도 회의감에 찬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마티유는 오늘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처음으로 회의감과 죄책감에 몸서리칠 거 같았다.

“···제군들. 지금 우리 앞에는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모를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제국군은 시청을 향해 진격하면서, 잡은 포로들은 반역죄란 명목으로 즉결처분하기 시작했다.

아예 다시는 칼을 거꾸로 쥐지 못하게 공포를 각인시키려는 듯.

당장 영국인들도 아일랜드인들이 들고 일어나자 해병대를 투입해 다 죽여버렸잖나.

이 시대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민을 지킨다는 모토를 가진 국민방위대(la Garde nationale)의 앞에서 사람을 죽여버리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 아니었다.

“귀관들과 본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전우이자 군인이며 군인의 본분은 바로 선량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공화국의 이념은, 본분은 자유와 평등과 인류애를 좇는 것이다.”

쓰는 말이 달라도, 민족이 달라도 프랑스군의 주둔지 밖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은 악인(惡人)이 아니었다.

오히려 힘없는 소시민들이었지.

“제군들. 오늘 나는 감히 여러분께, 그리고 나 자신에게 부탁하고 싶다.

오늘, 이름 모를 선량한 외국인을 위해 함께 싸워줄 수 있겠는가? 죽어줄 수 있겠는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삼색기가 드높이 하늘을 찔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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