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 (4)
1814년 6월.
런던.
“제국 상무부에서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무역흑자가 곧 적자로 돌아설 거 같습니다.”
“안정되었던 곡물가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불온한 움직임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관측된다는 경시청 보고입니다.”
“우어어어!! 우어어억!!”
대영제국 재무부는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제국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며 아찔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제국과 프랑스가 이 정도로 밀접하게 얽혀있었나?’
20년.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되어 새로운 세대를 열기 충분한 시간.
그 시간 동안 이루어진 ‘번영’은 어디까지나 세계에서 두 손가락에 드는 강대국 간의 평화로 이루어진 성이었다.
단 한 번, 전쟁의 나팔이 울려 퍼지면 무너질 여리고 성 말이다.
제국의 식량을 책임져주던 프랑스가 중지를 치켜들자, 상무부는 러시아 제국과 미합중국에 식량 구매 의사를 타진했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햣하! 공화국 해군 등장!”
“한 척도 남기지 마라! 다 소각시켜!!”
“키아아아아악!!!”
러시아 제국 해군은 미친 듯이 달려드는 루카스 제독 휘하 프랑스 공화국 호위함들에게서 상선을 지키기엔 너무 약해 빠졌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항한 곡물 상선들은 북해에 나오는 족족 바다 속 깊은 곳에 수장됐다.
“해군경! 지금 뭐하고 있소! 당장 왕립해군을 출항시키란 말이야!!”
도버와 노퍽의 건선거에서 평상시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보존처리 해놨던 전열함들과 보조함들이 재생되어 실전 배치됐다.
- 삐이익! 삐이이익!
“거기 당신! 지금 뭐하고 있지!”
“예? 집 가는 길이었는데요?”
“넌 지금부터 HMS 노팅턴의 승조원이다. 얌전히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갑판장님! 저놈이 도망갑니다!”
“뭐하나! 당장 올가미를 던져!”
“키아아악!!”
자발적으로 모병에 임한 충성스러운 수병들 덕에 순식간에 재생된 왕립 해군 군함들은 북해로 나아가 공화국 해군 군함들과 대치했다.
“스파시바! 스파시바! 덕분에 살았습니다!”
“걱정마시오. 이제 여러분들은 왕립 해군의 보호 아래 있소.”
러시아 국적의 상선들은 이제 비교적 안전히 브리튼 제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으나.
“해군경!”
“예에. 이번엔 또 뭡니까.”
“지금,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해군 예산이 왜 전 분기 대비 3배나 상승한 거요!?”
“···당연히 보존처리 해놨던 함선들을 재취역시켰으니 그만큼 운용비가 늘어나겠지요?”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식량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나 저러나 사람은 밥이 필요하다.
하지만 브리튼 제도의 경작지로는 대영제국 신민들의 배를 배불리 해 줄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밥을 어디선가 사와야 한다.
밥을 사오려면 북해에 전단을 둥둥 띄워 프랑스 샤락선들이 러시아 상선에 접근하지 못 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니 군함을 재취역 시켜 새 호위함대를 꾸리고, 북해 제해권을 굳힌다.
당연히 돈 먹는 하마, 아니. 코끼리인 군함을 대거 재생시켰으니 그만큼 장부에 빵꾸가 뚫린다.
그렇다고 함대를 빼면 밥이 안 온다.
“이렇게 된 이상 긴축재정은 불가피합니다.”
“정부를 준전시 상태로 전환하고 정부 지출이 나가는 곳에 전부 감사 돌려.”
“왕립학회는 어떻게 할까요.”
“신문에 영향력 있는 유명 학자 제외하고 연구비 다 삭감시켜. 지금 그런 곳에 낭비할 돈 따위 없다. 혹여 왕립학회가 디폴트라도 선언하면 왕실과 대영제국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애초에 그럴 일 없게 하자고.”
덕분에 어떤 젊은 과학자의 ‘전기’에 관한 연구는 중단되었다.
언제 과실이 열릴지 모르는 씨앗에 물을 뿌리기에 세상의 법칙이란 너무 냉정했다.
“경상수지와 더불어 증시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니미럴. 일단 대마(大馬)는 내버려 두게. 바로 대마에 손 대면 공포가 조성될 수도 있어. 자잘한 기업이나 사업체부터 조정하자고.”
“알겠습니다.”
괜히 대영제국이 세상을 수백년 동안 호령했겠는가.
세계 최초로 회계사 자격시험을 만들고 회계사를 양성한 영국은 기민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해당 기업은 거래가 중지됐다 이 말입니다.”
“아니 아니. 잠시만. 그러니까 내가 주식이 있는데 못 판다 이거요?”
“뭐. 그렇죠.”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저희도 위쪽에서 시켜서 하는 거라 잘 모릅니다. 여하튼 해당 종목은 거래 중지고, 혹시 급전이 필요하시면 재무부에 해당 주식을 급매하시는 것도-”
“가격이 장의 삼분지 일이잖아!!”
“쯧쯧. 그러게 건실한 주식을 사야지, 넌 커서 저런 개잡주는 사면 안 된다. 알았지?”
“넹 아부지.”
대중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증시를 묶고 여기저기 보수공사와 납땜질을 한다.
“이 정도면 됐겠지.”
“저흰 할 만큼 했습니다.”
“감사 쪽 친구들은 오늘 다 퇴근시키게. 며칠째 쪽잠만 잤으니 오늘은 편히 재우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몇몇은 나 좀 보지.”
대영제국 재무부 건물에서 재무장관실을 제외한 모든 방의 불이 꺼졌다.
“기욤의 동태는?”
“희끄무레합니다. 그 인간이 뭘 할지 예측이 안 갑니다.”
“후. 그 돈귀신이 제국의 경제에 무슨 농간을 부릴지 두렵군 그래.”
“···아무리 똑똑해도 한 사람이 한 국가를 흔드는 건 어느 정도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세 번이나 갈아버린 놈이야. 그런 놈에게 방심하는 순간 배에 칼이 박히는 걸세.”
“그렇긴 합니다만, 기욤이 뭐 수십 년 전부터 대영제국에 독을 뿌린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해주길 바래야겠군. ”
그들의 말마따나, 보이지 않는 손은 일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쉴 새 없이 카운트다운 중인 폭탄과 함께.
***
양측의 경제제재 한 달째.
프랑스군은 서쪽으로는 영국령 하노버를, 동쪽으로는 베를린 앞을 점령한 채 방어선을 구축했다.
“파리에서 좀 아껴 쓰라는군.”
“내친김에 독일 전선군을 재정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도 그래. 몇 달째 강행군 중이긴 하지.”
나폴레옹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 그는 쿨하게 참호를 파고 함락시킨 요새를 점검하며 저 멀리에서 발에 땀나게 뛰어오는 러시아군을 방어할 준비를 끝냈다.
“다부.”
“예, 사령관.”
“이제 여긴 자네가 맡지. 믿어도 되겠나?”
“동기를 못 믿으면 누굴 믿으려고 하십니까?”
“좋아. 러시아 놈들이 뭘 하든 그냥 앉아서 지키도록. 금방 끝내고 돌아오지.”
대신 그는 참모들과 함께 자동차에 올라 철도가 연결된 트리어로, 그리고 트리어에서 기차에 올라 저 멀리 프랑스 서남부 툴루즈까지 내달렸다.
그러니까, 스페인 전선군 사령부말이다.
“받들어- 총!”
“인사는 나중에 받지. 쉬셰?”
“예, 사령관님.”
“잠시 내가 지휘를 맡아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좋아.”
나폴레옹은 삼각모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제군들. 곧, 영국이 우리에게 선전포고할 거다.”
“““!!!”””
부동자세를 취하던 모두가 잠시 눈자위를 움찔-하고 떨었다.
“이는 파리에 있는 내 친구에게 직접 받아보고, 또 해군 쪽 인사가 말해준 거니 신뢰해도 좋다.
영국과 우리 공화국은 현재 경제를 전쟁터 삼아 싸우고 있고, 곧 다음 전쟁터로 바다를 전장으로 삼아 싸울 것이고, 마지막에는-”
우리 육군과 싸울 것이다.
나폴레옹이 덧붙였다.
“우리 육군은 따라서 영국 레드코트가 거점으로 삼을 만한 모든 곳에 총공격을 개시한다. 타임 테이블은 우리 해군이 저놈들 함대를 부숴버릴 시간, 거기에 맞춰서 진행할 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일하게 프랑스군 군복 대신 다른 군복을 입은 이에게 물었다.
“호세 산마르틴 장군.”
“소령입니다. 각하.”
“계급은 소령이나 스페인 공화국의 총사령관이면 영관이 아니라 장군 대우를 해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소.”
“하하.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사령관께선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좀 어려운 건데. 괜찮겠소?”
“군인으로서 인민을 위해 못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좋소. 쉬셰 장군과 함께 스페인 동부로 진격해 앞으로 한 달 내로 지브롤터 앞까지 주파하시오. 무조건 우리 해군이 도버를 불태우기 전에 도착해야 하오.”
지브롤터.
대영제국이 가진 지중해의 뚜껑을 닫는다.
나폴레옹의 다음 수가 착착 놓아지고 있었다.
***
1814년 7월.
“썩을 놈들.”
“무슨 일인데요 삼촌?”
“프랑스 놈들이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켰다는군.”
대영제국 왕립 해군 소장, 앤드류 코크란 존스톤(Andrew Cochrane-Johnstone)은 조카의 질문에 그리 답한 뒤 홍차를 홀짝였다.
“바르셀로나면... 스페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 아니에요?”
“그렇지.”
“스페인 왕은 뭐한데요?”
“그놈? 그놈은 있으나마나 한 금치산자야. 프로이센을 깨부순 보나파르트의 적수는 한참 못 되지.”
“보나파르트?”
“그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다. 땅개 놈들 말론 지략이 꽤 대단하다더군.”
“오호.”
“흠. 그나저나 슬슬 시간이 됐는데.”
존스톤 제독은 신문을 덮고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우체통 좀 보고 오마.”
“예에.”
“너도 이제 좀 밖에 나가서 일 좀 하려무나. 집에서 노닥거리지만 말고.”
“예에예에.”
쯧쯔. 한량 같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조카건만, 저 아이의 나태는 삼촌도 혀를 차게끔 만들었다.
존스톤은 쿠키를 입에 쑤셔 넣는 조카를 뒤로하고 저택을 나와 우체통을 살펴보았다.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배당금이 와야 하는데.”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건만.
그 순간, 존스톤 제독의 손에 무언가 종이 쪼가리가 잡혔다.
옳다거니, 이번엔 배당금을 현금이 아니라 어음으로 주었구나!
우체통에서 종이 쪼가리를 빼내니, 아니나 다를까 밀랍으로 봉인한 편지 봉투였다.
- 투둑.
밀랍을 뜯고 안을 쭉 읽어내려가자...
“···뭐야 이거.”
[···최근 시국이 어지러운 관계로, 기존에 주주분들께 배당해 드린 배당금은 당분간 계약서 9조 82항 별도 특약에 의거 하여 지급유예될 예정입니다. -이삭의 민족 드림-]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돈! 내 도오온!! 이 망할 개구리 새끼가 내 돈을 들고 튀어!!?”
그는 눈을 까뒤집으며 편지도 까뒤집었다. 혹시 뒷장에 ‘언제까지’ 유예하겠다고 쓰여있을 수도 있잖나.
하지만 그런 건 애초에 있을 리 없었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가 아니고, 애초에 없었다.
“이 좆같은! 개구리! 새끼가! 내! 통수를! 때려!!?”
망할 애널리스트인지 아날리스트인지 똥구멍 같은 새끼들. 뭐? 가장 안전한 투자처?
런던 금융가를 향해 휘하 함대 수병들을 무장시켜 진격해야-
그렇게 한바탕 욕을 쏟아내고 숱하게 금융쟁이 놈들 머리에 권총을 대고 당기는 상상을 한 존스톤 제독의 머리가 점차 차갑게 식었다.
‘이거. 지금 팔아야 한다. 안 그러면 물린다.’
식은땀이 송글송글 솟아나 뺨을 타고 내려왔다.
다행히도 존스톤 제독의 저택은 런던으로부터 지척.
그는 뛰다시피 저택으로 돌아가 하릴없이 소파에 누워 쿠키나 까먹는 조카를 강제로 기상시켰다.
“왜, 왜 갑자기 지랄이에요 삼촌!?”
“됐고. 이거 싸악다 가져다 증권거래소에 팔아라!”
“뭐야 이거. 이삭의 민족? 이거 사기도 힘든 우량주 아녜요? 주식하는 친구들이 매물 없다고 그러던데.”
“이젠 아니야! 그러니까 당장 가서 다 팔아버려!”
“아니 왜 삼촌이 안 가시고-”
“파릇파릇한 너 놔두고 이 삼촌이 늙은 몸을 끌고 가리?”
“예에. 예에. 알았다구요오.”
조카는 삼촌이 바리바리 건넨 주식증서를 들고 증권거래소까지 내달려, 아직 사람들이 몰리지 않은 지금 팔아치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 여기 팔겠소! 팔겠다고!”
“히히힣! 히힣!! 이건 꿈이야. 꿈이고 말고. 내가 파산일 리가 없잖아?”
“이 개씨발 개구리 새끼야! 내 돈 내놔아아!!”
“휘그당 개새끼들아! 갑자기 왜 프랑스는 들쑤시는데!! 으아아악!!!”
이렇게 인외마경이 되어버린 증권거래소를 지켜보던 조카는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이거, 돈이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