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38화 (338/341)

해가 지는 제국 (2)

대영제국 남부, 이스트본(Eastbourne)

“엥. 이게 뭐지.”

“왜? 뭐 월척이라도 걸렸어?”

“아니. 손맛이 물고기는 아니야. 무슨 쓰레기 같은데?”

“야야. 천천히 올려. 낚싯줄 상한다.”

에드워드는 친구의 조언대로 낚싯줄을 천천히 감아올렸다.

혹시라도 낚싯대나 줄이 상하면 가뜩이나 기운 가세에 부담을 주는 일 아니겠나.

줄이 핑핑-하면서 감겨 올라오는 잠시, 친구는 적적함을 깨고 싶은지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왜?”

“요새 안 팍팍하냐?”

“뭐가.”

“해군이 너네 삼촌 끌고갔다며.”

“···대신 내가 돈 벌잖아. 다음 인도행 화물선에 잡부로 타고 임금은 미리 가불해서 받으면 그래도 풀칠은 할 수 있겠지.”

“너 혼자 두 가족을 먹여 살린다고? 너 그러다 탈 나 임마.”

“야야 됐고 비켜. 낚시바늘에 어디 뚫리기 싫으면.”

촤라락-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올라오고, 끝에 걸린 쓰레기가 발밑에 툭 떨어졌다.

“뭐야 유리병? 주둥이에 고리가 걸렸었나.”

“안에 든 건 뭐지?”

에드워드는 무릎을 굽혀 유리병에 꽂힌 코르크 마개를 따고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탈탈 털어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뭐야. 이거 10실링짜리 은화?”

“이건 쪽지인가?”

은화 한 닢과 쪽지 한 장.

에드워드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 은환가?”

“생긴 건 똑같은데? 여기 선왕 폐하도 그려져 있잖아.”

“그럼 뭐 진짜라고 치자. 빵 한 덩이는 살 수 있겠네.”

“그럼 그 쪽지는? 너 알파벳은 대충 알잖아.”

“한번 봐야지.”

에드워드가 쪽지를 펼치자, 런던의 지식인들이 깔겨 쓰는 필기체가 아니라 또박또박 알아보기 쉽게 쓴 알파벳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영국 국민 여러분. 제 마지막 회사가 브리튼 제도에서 발을 뺀 지도 어언 반년이 다 되어 가니 실로 오랜만이라 할 수 있겠군요.]

“···뭐야 이거.”

“왜?”

“좀 있어 봐. 다 읽고 얘기해줄게.”

[···요새 한참 쌀쌀해지는 환절기인데, 여러분들의 건강이 염려됩니다. 브리튼 제도는 또 날씨가 왔다갔다 변화무쌍하니 더더욱 건강에 유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신변잡기로 점철된 서문.

어디 교회에서 목사나 사제가 예배 전에 떠들 법한 말.

[이렇게 안부만을 묻고 좋은 일로만 찾아뵐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전 오늘 여러분께 몇 가지 아픈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온화하기 짝이 없던 필자는 참 애석하다는 듯 갑자기 글의 성격을 비틀어버렸다.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대영제국 왕립 해군 지중해 함대는 우리 자유연합군 해군에게 전멸당했습니다.]

“···뭐?”

“야. 뭔데 그래? 나한테도 좀 얘기해줘.”

[왕립 해군 지중해 함대 사령관은 전사하였으며, 여러분들이 천혜의 요새로 삼았던 지브롤터에는 스페인 공화국의 삼색기와 프랑스 공화국의 삼색기가 나란히 걸렸습니다.

스페인 왕국은 지리멸렬하게 무너져 우리 자유연합군으로부터 도주 중이며, 지브롤터의 함락으로 영국군은 스페인에서의 영향력을 거세당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제 레드코트가 지배하는 곳은 포르투갈뿐입니다···.]

그럴 리 없다. 왕립 해군은 옛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박살내고 네덜란드의 대함대도 박살 낸 최강 아닌가.

그런 왕립 해군이 겨우 개구리 해군에게 박살났다고?

[물론, 우리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툴롱 함대 기함이었던 기욤 텔이 저 바다 밑에 가라앉았고 숱한 수병들과 해군육전대 대원들이 삼색기에 싸여 앵발리드에 잠들었으며, 파리와 전국은 그들의 거룩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기 위해 일제히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제 앵발리드 앞에 놓인 비석에 영원토록 새겨져 후대에 기록될 것이며, 슬픔에 잠긴 가족들에겐 마땅한 연금과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 혹시 여러분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포츠머스와 노퍽을 나선 왕립 해군이 아스라져간 사실을 모르고 계셨는지?

눈과 귀가 멀쩡하게 달린 여러분께서 만일 몰랐다면, 누가 여러분의 눈과 귀를 가렸을까요?

누구긴 누구야, 바로 대영제국 국왕과 웨스터민스터지요. 정부가 바로 여러분의 눈과 귀를 가린 겁니다. 지중해에서 일어난 참패를 묻기 위해서.

아마 정부 고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 지금 나라가 어수선한데 굳이 이렇게 흉흉한 사실을 퍼트릴 이유가 없다! 민생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혹은

아, 지금 나라가 어수선한데 굳이 이렇게 흉흉한 사실을 퍼트릴 이유가 없다! 40년 만에 얻은 내각을 4개월 만에 잃을 순 없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제 입장에서는 전자도, 후자도, 둘 다여도 이해할 수 없지만.]

쪽지를 쓴 필자는 비웃듯 말하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 이번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누굽니까? 아, 누군가는 우리 프랑스 공화국을 원인이라고 찍을 수도 있겠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딱 까놓고 말해봅시다. 우리 프랑스가 뭘 잘못했습니까? 우리 국왕이 일 좆같이 해서 우리가 갈아엎겠다는데 왜 이해당사자도 아닌 남들이 지랄지랄 염병을 하시냐 이 말이에요.

우리 프랑스가 독립국이지 어디 괴뢰국입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지지고 볶고 물고 빨든 시민권이 없는 외국은 그냥 놔둬야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혹시 사촌이 땅 사면 그 땅에 소금을 뿌리고픈 이상한 성벽이 있으신가?

여러분. 누가 전쟁을 일으킨 겁니까? 자기 집을 자기가 알아서 고치겠다는 사람이 잘못한 겁니까, 아니면 집을 고친다고 연장을 가져와서 대뜸 위협하는 미친 이웃이 잘못한 겁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모시는 위정자들이 우릴 마녀와 마법사로 몰고 태워죽이려 드는 한, 우리 공화국은 마지막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싸울 겁니다.

우린 이미 강력한 프로이센군과 신성로마제국군, 스페인 왕국군을 쳐부쉈으며 이제 다음으론 지중해를 완전히 우리의 호수로 만들기 위해 이집트를 정복할 것입니다.

우린 그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발. 뭘 두려워하지 말란 거야.”

[왜 여러분들이 우리와 싸워야 합니까? 왜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총부리를 겨눠야 하고, 왜 영국 선원과 프랑스 선원이 서로 함포를 쏴야 합니까?

왜 영국 상선은 프랑스 해군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항해하고, 프랑스 상선은 영국 해군의 눈에 띄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까?

왜 포츠머스 출신의 ‘윌리엄’이 툴루즈 출신의 ‘기욤’에게 살의를 품지 않으면 안 됩니까?

상대가 프랑스인이니까?

개구리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이 세상에 누가 영국인, 프랑스인, 프로이센인, 신성로마제국인, 러시아인, 스페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골라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우린 모두 우연에 의해 태어난 자들입니다. 부모도, 태어난 곳도, 심지어는 천성까지도.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 기막힌 우연이 겹쳐 일어난 존재가 바로 우리일진데, 과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쓰는 언어가, 인종이 다르다는 우연만으로 서로 혐오하고 죽이려 드는 게 맞습니까?

그게 맞다면, 누가 맞다고 했습니까. 신이십니까? 아니면 배불뚝이 정치인입니까?]

···.

[난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암요! 사업가한테 고객만큼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남의 피로 제 배를 불리는 이들 뿐입니다. 자신은 조금의 위험조차 감수하지 않으면서, 세치 혀로 남을 꼬여내 죽게 만들곤 그들의 죽음을 달달한 과실로 바꾸어 따먹는 이들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족에게 친지에게 친우에게 죽음을 강요한 이들은 과연 여러분에게 어떤 보상을 해줬습니까?

애초에 여러분에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쥐꼬리만 한 월급을 올려달라고 피켓을 들고 나왔다고 납탄을 쏘는 이들에게 왜 복종하고 머리를 조아리십니까?

밤에 길을 걷다가 갑자기 몸에 포송줄을 묶어 ‘자원입대’시키는 이들에게 왜 항명하고 반항하지 않으십니까?

사람은 그 자체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아닐지 몰라도 우린 그렇게 배웁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그렇게 대할 겁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저들이 여러분들을 두려워하게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면.”

“뭐? 갑자기 뭔 소리야?”

그 순간.

“어이! 거기! 당장 그거 이리 내놔라!”

“앗.”

경관이 달려와 쪽지를 낚아채곤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앞으로 이런 건 그냥 무시해라."

"아... 예에."

경관이 저 멀리 사라지고, 에드워드는 친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당 10실링인데, 한번 산책 겸 해안가 좀 슥 훑어볼까?"

"좋지!"

경찰들 사정 따위 알빤가. 주우면 꽁돈이 되는데?

***

“통하겠습니까?”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까짓거 잘 되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시궁창에 처박을 수 있고, 염전여론까지도 부를 수 있고.

잘 안되면 딱히 현상에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안 할 이유가 있나.

“그렇긴 하지만. 은화가 좀 아깝지 않나 해서.”

“아. 그 10실링짜리?”

“그렇습니다 통령.”

탈레랑의 말에 통령은 피식 웃으면서 한참 결재하던 서류에 마저 사인을 했다.

“그거 진짜는 한 30프로고 나머지는 짜가입니다.”

“···예?”

“다 짜가면 사람들이 주워봤자 버릴 거 아녜요. 다 진짜면 너무 아깝고. 그래서 대충 섞어서 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적당히 가챠, 그러니까 뽑기 하는 마음으로 막 주워가지 않을까요?”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통령은.”

“켈켈켈. 제가 35억 리브르를 어떻게 갚았는데요?”

***

스페인, 마드리드.

“사령관님. 포르투갈로 퇴각하셔야 합니다.”

“마드리드를 버리는 순간, 이 전역은 끝이야. 우리가 여길 탈환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희생이 걸리겠나?”

존 무어 중장은 수척해진 얼굴로 군사용 지도를 들여다보며 손을 저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브롤터가 없으면 해군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리스본이 있지 않나. 안전한 후방인 리스본에서 육로로 보급품을 수송하면 아직 할만해.”

“각하! 이미 식수가 바닥났습니다! 장병들이 빗물을 받아 연명하는데, 이제 건기라 빗물조차 내리지 않습니다!”

“···.”

중장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폴레옹은, 그는 어디에 있지?”

“저희 급수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계속 서진 중입니다.”

“미친 거 같습니다. 진격 속도가 말이 안 됩니다.”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포르투갈로 가는 길이 닫히면 끝입니다.”

“···좋아. 퇴각하지.”

토해내듯 말한 그는 건조한 사령부 안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난 곧 해임되겠지. 안 그런가?”

““···.””

“다음으로 누가 내 자리에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말아주게.”

“어떤 조언 말씀이십니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 괴물 같은 놈에 대해.”

***

대영제국령 인도, 뱅골.

“드디어 이 빌어먹을 땅에서 유럽으로 영전하시는군요!”

“영전일지 죽을 자리인지는 모를 일이지. 존 무어 장군이 머리가 딸리는 분은 아니셨잖나.”

아서 웰즐리 준장은 명령문을 고이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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