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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2화 (2/197)

< 녹안(綠眼)의 소년 (1) >

데미언(Damien).

올해 열다섯이 된 그는 왕국 남부, 텔마르크 영지의 주도(主都)인 크라벤(Kraven)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삶은 대도시 크라벤이 품고 있는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년은, ‘도시의 쓰레기장’이라 불리는 빈민가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돈 몇 푼에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싸구려 인생.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스쳐 갔던 무수히 많은 남자 중 하나였다.

이름도, 성도 몰랐다.

다만, 어머니가 말하길 그 남자의 얼굴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새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미남자였고, 더러운 뒷골목 사창가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깊은 밤 창문 너머로 전해지던 한 줌 달빛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던 사내의 금발 머리와 신비로운 올리브색 눈동자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미언은 어머니의 기억 속 사내를 꼭 빼닮은 모습으로 자라났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비쩍 마른 팔다리와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홀쭉한 볼과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을 하고서도 소년은 진흙 속의 진주처럼 빛났다.

이름 모를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할, 찬란한 금발 머리와 아름다운 녹안(綠眼) 때문이었다.

빈민가의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아이들 틈에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색을 하고서도 홀로 반짝였던 데미언.

소년의 어머니는 자식의 그러한 특별함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늘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그녀는 평생을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더럽고 추악한 욕망이 모여드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평생을 악착같이 버텨온 사람이었다.

벼려 놓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살아있는 그녀의 본능이 말했다.

그녀의 아들이 지닌 그 ‘분수에 맞지 않는’ 특별함이, 언젠가 큰 화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나이 어리고 예쁘장한 남자아이에게 환장하는 더러운 욕망을 지닌 자들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추잡한 위협으로부터 하나뿐인 자식을 지키려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아들의 풍성했던 금발을 면도칼로 남김없이 밀어버리고, 새하얀 얼굴에 일부러 검댕을 묻혀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흙먼지가 잔뜩 묻어 옷인지 걸레짝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남루한 옷을 입혔다.

그렇게, 크라벤의 빈민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진흙 속 진주의 빛이 가려졌다.

그 진주가 더 크게 자라날 때까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

“데미언이라...”

새로 얻게 된 이름을 입안에서 천천히 되뇌며, 나는 말로 다 이르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된 소년의 기억이 지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억이 이어졌다고 한들 감정마저 물 흐르듯 이어질 순 없는 법.

“머리론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론 도통 이 상황이 와닿질 않네. 후우...”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서른여덟 살의 술배 나온 노총각 아저씨와 게임 속 판타지 세상을 살아가던 나이 열다섯의 어린 소년.

살아가던 세상과 인종, 나이와 직업 등 모든 것이 지독히도 다른 두 개의 삶.

그 사이의 간극(間隙)이 생각 이상으로 크고 넓었기에,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아... 진짜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다, 별일이 다 있어.”

황망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마른세수를 해보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나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담긴 옛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멍청하게 앉아만 있기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맞을 터였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지?”

막상 시작하려니 머릿속에 너무 생각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이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는 개발자였던 내가 직접 만들고 설계한 세상이었다.

그 얘기인즉, 이곳 세상의 법칙과 역사와 기타 등등의 각종 비밀을 내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 게임의 주요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원작 내용까지 모두 꿰뚫고 있으니까.’

완벽한 게임 제작을 위해 게임의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를 어림잡아 스무 번은 독파한 나였다.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원체 많으니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목표도 많을 수밖에.

하지만...

“...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문제지.”

내 머릿속엔 이 세상을 뒤흔들 어마어마한 지식과 계획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열다섯 소년 데미언은 돈 없고 빽 없는 빈민가 출신의 가난뱅이 고아에 불과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대단하고 완벽한 계획이 세워져 있다고 한들, 현실에서 이룰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주먹을 꼭 쥔 채로 각오를 다졌다.

“그래, 욕심내지 말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차분하게 해나가는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고 싶거든, 실현 가능한 작은 목표부터 이뤄나가는 버릇을 들이라고.

거,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한테 아주 딱 필요한 말을 해주셨네.

“그래,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일단 이 냄새 나는 창고에서 나가는 것부터 하자.”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닫혀있는 창고 문을 향해 손을 뻗는데...

끼이익- 쾅!

“야, 이 새끼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처자고 있어?!”

“?!”

***

내가 있던 창고의 문을 부서질 듯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지르는 한 남자.

그는 자그마한 키에 볼품없는 얼굴을 지닌 젊은 사내였다.

“해가 중천인데 이제야 기어 나와? 네가 아직 덜 맞았지? 엉?”

원래의 나라면 저 남자가 누군지 몰랐을 거다.

하지만 열다섯 소년 데미언의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은 지금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크라벤 용병 길드 사무소의 접수 담당 직원, 좀머(Sommer).’

올해로 스물다섯이 된 그는 이제 겨우 열다섯인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문제는, 그가 용병 길드 사무소의 막내이자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데미언을 매일 같이 괴롭히는 질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 다른 직원들이나 길드 사무소에 드나드는 용병들에겐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이 어린 데미언에게만 폭행과 폭언을 퍼붓는 놈이지.’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의 찌질이.

그것이, 머릿속에 남은 데미언의 기억을 토대로 분석한 좀머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평가였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좀머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다른 사람들 출근하기 전까지 청소 다 끝내 놓으라고! 근데 이제야 기어 나와? 늦잠이라도 처 잤냐? 어?”

안 그래도 못생긴 좀머의 얼굴이 짜증으로 잔뜩 구겨져 있다.

뒤이어 잔뜩 힘주어 들어 올린 오른손!

꼴을 보아하니 평소처럼 내 뺨을 후려치려는 심산인가 본데...

‘어림 없다, 이 새끼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늘 보던 그 데미언이 아니란다.

뭐, 겉으로 보기엔 똑같겠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다르다 이거야!

‘... 내가 인마, 죽기 전엔 비록 똥배 나오고 술담배에 찌든 아저씨였지만 젊었을 땐 복싱도 배우고 동네에서 한주먹 했었다고!’

전형적인 아저씨의 허세였지만, 눈앞의 좀머는 그런 허세를 부릴만한 상대였다.

딱 봐도 싸움 더럽게 못 하게 생긴 관상이거든.

‘하, 데미언 이 자식은 이딴 놈한테 맨날 맞고 산 거야?’

하긴 뭐, 아직은 어린 애니까 어른이 괴롭히면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 위로 들어 올려졌던 좀머의 오른손이 내 뺨을 향해 날아온다.

‘느리다, 느려!’

코웃음이 날 정도로 어설픈 손짓이었다.

저따위 허술한 공격 따윈 가볍게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다.

그 후에 가볍게 전진 스탭을 밟으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텅 비어 있는 옆구리에 주먹을 꽂으...

철썩-!

“어흑!”

고개가 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눈앞에 별이 보였다.

맞았다.

그것도 정통으로.

털썩-!

턱에도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걸 맞았다고?

‘아니, 시발... 이딴 것도 못 피해?’

분명 머리로는 피했는데, 몸이 그걸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단순히 따라가지 못한 수준이 아니었다.

‘허, 이게 무슨... 뭐야, 스턴이라도 걸린 거야?’

충격적이게도,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얌전히 선 채로 좀머의 손찌검에 일격을 허용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동안 이 자식한테 무기력하게 당했던 경험 때문에!’

영혼은 바뀌었으나, 그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인 데미언의 육체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발생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 몸 자체가 너무 허약해. 손이 날아오는 걸 뻔히 보고도 반응하질 못하잖아!’

이해 못 할 사정은 아니었다.

데미언은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난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는커녕 굶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삶을 살았다.

그런 녀석의 몸이 제대로 성장했을 리 만무했다.

근육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팔다리와 옷 위로도 갈비뼈의 형체가 보일 정도의 얇은 몸통.

한마디로 ‘매가리 없는’ 몸뚱이 그 자체였던 것.

몸 상태가 이 모양이니, 좀머의 그 어설픈 손짓도 보고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던 거다.

“아으...”

얼얼한 뺨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머리 위로 좀머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 이 새끼 봐라? 고작 그거 맞았다고 주저앉아? 엄살 그만 부리고 빨리 일어나 새끼야!”

탁! 탁! 탁! 탁!

대뜸 뺨을 후려갈기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좀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내 머리를 들고 있던 종이뭉치로 계속 때리기 시작했다.

종이뭉치가 꽤 두툼했기에 아프기도 아팠지만, 무엇보다 맞은 부위가 머리였기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니, 이 개새끼가 근데...!’

뺨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머리까지 건드려?

다른 곳도 아니고 남자의 자존심인 머리를?

‘으아아... 참자, 참아!’

하지만,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난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양아치의 폭력에도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자고로 성질내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

지금의 내겐 훗날을 기약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빡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바짝 엎드려 있자.’

확 들이받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나는 한껏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너무 피곤해서 조금 늦게 일어났습니다!”

“피곤? 시발, 네가 뭘 했다고 피곤해? 기껏해야 바닥에 걸레질이나 몇 번 한 주제에.”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

“어? 그리고 이 새끼야, 어디서 윗사람이랑 얘기하는데 눈을 똑바로 뜨고 꼬나 봐? 눈 안 깔아? 어?”

이제는 하다하다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지랄을 하기 시작하는 좀머.

하지만...

“허, 이 새끼 봐라? 야, 내 말 씹냐? 눈 안 깔아?! 눈, 깔, 아!!!”

“...”

이번만큼은 그의 지랄에 장단을 맞춰 줄 수가 없었다.

왜냐고?

‘... 이건 또 뭐야?’

씩씩거리는 좀머의 머리 위에 나타난 ‘무언가’가, 나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 녹안(綠眼)의 소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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