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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3화 (3/197)

< 녹안(綠眼)의 소년 (2) >

[스킬 ‘창조주의 눈’을 사용합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내 정면에 선 좀머의 머리 위에서 ‘그것’이 나타났다.

팟-!

『 좀머 / Lv. 2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사무원

고유 특성:

- 없음

보유 스킬:

- 없음

보유 아이템:

- 싸구려 깃털 펜(일반 등급) 』

그것은, 푸르스름한 색깔을 띤 반투명의 화면이었다.

마치 지난 생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때마다 보았던 팝업 광고창과도 같은 모습.

‘이게 대체...?!’

그 묘한 기시감에 눈을 끔벅이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어어? 잠깐, 이거 혹시... 그건가?!’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단어.

게임은 물론이고 다양한 장르의 웹소설 속에 왕왕 등장해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난이도를 현격히 줄여주는 그것.

상태창, 아니...

갓.태.창!

‘그래, 빙의물엔 상태창이 나와 줘야지! 으하하하!’

스킬 ‘창조주의 눈’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내 앞에 나타난 상태창을 보며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연고 하나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험한 세상의 등불이 되어줄 감사한 기적이 등장한 것이다.

“이, 이, 이 새끼가? 이, 인마! 눈 안 깔아! 눈 깔라니까!!!”

그 와중에 상태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오해한 좀머가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엔 자신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던 내가 안 하던 행동을 하자 놀란 모양이었다.

‘뭐 이런 쫄보 새끼가...’

좀머의 과민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래 뭐, 눈 까는 것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어차피 이딴 짓거리 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이 새끼야.’

상태창이라는 놀라운 이능(異能)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양아치 좀머를 대하는 마음이 전과 달리 한껏 푸근해진 나였다.

냉큼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뒤, 거듭 허리를 꺾으며 흥분한 좀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순간적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느라... 잠깐 정신을 놨나 봅니다. 잘못했습니다!”

“...!”

지극히 공손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것일까?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좀머가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며 내게 말한다.

“크흠, 큼! 이 새끼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아무튼! 빨리 튀어나와서 일 시작해! 곧 길드장님 출근 시간이라고!”

“옙! 알겠습니다!”

***

세상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였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데미언은 혼자가 되었다.

떠난 어미를 그리워할 새도 없이, 당장 오늘을 살아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열두 살의 고아 소년.

그런 소년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왜인지 낯이 익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근육질에 덩치가 컸고, 얼굴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어색한 손길로 어미 잃은 소년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준 사내.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거친 느낌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 따라와라.”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을 데리고 길을 나선 사내는 용병 길드 사무소로 향했고, 그곳에 어린 데미언을 맡겼다.

알다시피 용병 길드 사무소는 부모 잃은 고아를 맡아 길러주는 일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용병 길드 측에선 별말 없이 데미언을 받아주었고, 건물 뒤편에 딸린 허름한 창고에서 소년이 지내도록 허락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데미언의 어머니를 자주 찾았던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데미언을 맡아주는 대가로 사내가 용병 길드 측에 꽤 많은 돈을 냈다는 것 역시 그로부터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

“거참... 순정파 아저씨였네.”

본디 내 것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나의 것이 되어버린 데미언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이제 한 달 차.

오늘도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창고로 돌아와 허름한 이부자리에 눈을 감고 누웠다.

처음엔 창고에서 나는 냄새가 심해 잠도 오지 않았었는데, 한 달 내내 여기서 살다 보니 이젠 적응이 됐는지 포근하기까지 했다.

“참, 사람 적응력이라는 게 무섭네.”

지난 한 달간, 나는 크라벤 용병 길드 사무소의 막내 직원 데미언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창고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 기억을 토대로 지난 삶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머릿속엔 생생히 남아 있으나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 일들.

그 기억을 되새기며 소년 데미언의 삶에 더욱 깊이 몰입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복기한 것은 데미언이 용병 길드 사무소에 살게 된 과정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린 데미언은 몰랐겠지만, 지난 생에서 살 만큼 살아봤던 나는 그 몇 안 되는 기억만으로도 중년 사내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마도 그 아저씨는, 데미언의 어머니를 마음에 두었던 거겠지.’

그녀가 죽은 이후 제 자식도 아닌 데미언을 찾아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살 곳을 구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데미언을 용병 길드에 맡긴 뒤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 일하다 죽었겠지, 아마도.’

근육질에 커다란 덩치, 얼굴 가득한 크고 작은 상처.

더불어 도시 내의 수많은 곳 중 용병 길드에 어린아이를 맡겼다는 사실로 나는 그의 직업을 추측할 수 있었다.

중년 사내는 십중팔구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용병이었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하며 목숨값을 받는 이들.

비록 창녀와 손님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데미언의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 중년의 용병은 그녀의 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했다.

“... 먼 훗날에 저 세상 가서 뵙게 되면 그때라도 감사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름 모를 아저씨.”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기억 속에 선연히 남아 있는 나의 은인(恩人)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크흠, 아무튼. 이걸로 데미언이 용병 길드 창고에서 살게 된 이유는 확실히 알겠네.”

그렇게 크라벤 용병 길드에서 먹고 자며 일한 것이 벌써 3년째.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가 되었던 열두 살 꼬마는 이제 열다섯 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이만 몇 살 더 먹었을 뿐 또래보다 작은 키, 깡마른 팔다리와 힘없이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하아, 빨리 자자. 1분이라도 더 자야 내일 일어나기 편하지.”

열다섯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관록(?)을 지닌 단단한 영혼이 소년의 육신에 깃들었다는 사실이었다.

***

다음날 아침.

“아... 홉! 여... 흐으윽, 어어얼!”

오늘도 새벽닭이 우는 시간에 맞춰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정해진 루틴에 맞춰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뭐 그리 대단한 운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팔굽혀 펴기와 스쿼트, 달리기 정도가 내가 하는 것의 전부였다.

하지만 데미언은 내가 빙의(?)하기 전까진 생전 운동이란 걸 해본 적 없던 나약한 소년.

팔굽혀펴기 열 개를 채우는데 꼬박 2주가 걸렸고, 달리기 몇 분 뛰고 구토를 했을 정도이니 데미언의 몸이 얼마나 저질(?)이었는지 알만했다.

“허윽...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 같아선 몸이 아주 녹초가 될 정도로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조절해서, 길드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해야 했다.

“흐아아... 자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시작해볼까?”

용병 길드 사무소 막내 업무의 시작은 청소였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고, 물을 담은 양동이에 걸레를 빨아가며 건물 곳곳의 먼지를 닦아낸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하다 보니 학창시절에 하던 기억이 되살아나 익숙하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해도 이놈의 청소가 끝이 나질 않는다는 것.

이유야 뻔했다.

내가 쉬는 꼴을 보면 큰일이 날 것처럼 생지랄(?)을 떠는 좀비... 아니, 좀머 새끼 때문이었다.

“야! 야, 이 새끼야! 저기 먼지 묻은 거 안 보여? 빨리 튀어가서 닦아!”

“눈깔은 장식이냐? 여기서도 더러운 게 뻔히 보이는 데 저게 안 보인다고?”

“청소 대충 할 생각 마 이 새끼야! 남들은 고아 새끼라고 불쌍해서 대충 넘어가 줄지 몰라도 나는 공사 구분이 분명한 사람이야, 제대로 하라고!”

길드 의뢰 접수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좀머가 애지중지하는 싸구려 깃털 펜을 전설의 보검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휘두르며 내게 개소리를 해댄다.

‘이 미친 새끼가... 방금 여기 한참 동안 걸레질한 거 봤으면서!’

무슨 군대 훈련소에서 청소 상태 가지고 갑질하는 조교도 아니고.

손님들 앞에선 사근사근 입안의 혀처럼 구는 놈이 보는 사람만 없으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냉큼 대답했다.

“예, 선배님! 알겠습니다!”

좀머가 나를 괴롭히려고 억지를 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더 밝게 행동했다.

‘여기서 뭐라고 말대꾸하면 그거 핑계로 생지랄을 하겠지.’

말 같지도 않은 트집을 잡으며 억지로 시비를 거는 건 남 괴롭히는 걸 즐기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었다.

그 시커먼 속이 뻔히 보이는데 멍청하게 당할 수야 없지.

“에이, 시발... 재수 없는 고아 새끼.”

등 뒤에서 좀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개가 짖을 때마다 사람이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크흠... 저 새끼는 이제 신경 쓰고, 내 상태나 한 번 더 확인해볼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자, 곧바로 눈앞에 나의 현재 능력치를 보여주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팟-!

『 데미언 / Lv. 1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청소부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보유 아이템:

- 손때 묻은 빗자루(일반 등급)

- 낡은 대걸레(일반 등급) 』

그야말로 처참한 능력치였다.

직업(클래스)은 청소부, 레벨은 찌질이 좀머보다도 낮은 1의 최약체였고,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라고는 청소할 때 쓰는 빗자루와 대걸레가 전부.

초라하다는 표현조차도 과분할 지경인 지금의 나였다.

사람은커녕 시장 바닥에 쏘다니는 똥개 한 마리도 못 때려잡을 비루한 스펙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상태창을 통해 상대의 레벨과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스킬 ‘창조주의 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나저나 고유 특성 창조주... 이건 대체 뭐냐.’

내가 지닌 고유 특성을 알게 된 지도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딱히 더 알게 된 정보가 없었다.

‘레벨 변화가 없어서 그런가? 알아낸 게 없으니 답답하네.’

‘창조주(創造主)’라는 단어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내가 이 <로스트 킹덤>을 창조한 게임 개발자이기에 주어진 특성 같았다.

더불어 내가 지닌 유일한 스킬인 ‘창조주의 눈’ 역시 이 고유 특성과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창조주... 뭔가 대단한 특성 같기는 한데 말이지.’

이런 무시무시한 이름의 특성이 그저 말뿐일 리가 있겠는가?

뭔진 몰라도 분명 엄청난 능력이 주어질 터!

하지만...

“... 진정하자, 진정해. 레벨 1따리 허접에 어울리는 겸손함을 지녀야지.”

붕붕 들뜨던 마음을 냉철한 자기 분석으로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지금의 나는 떨어지는 낙엽에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도 방심하지 않고 긴장해야 하는 레벨 1따리의 뉴비 신세.

조바심을 버리고, 공든 탑을 조금씩 쌓아 올리듯 꾸준하고 성실하게 힘을 길러야 했다.

“문제는, 이 되먹지 않은 몸으로 깔짝깔짝 운동해서 어느 세월에 레벨을 올리냐는 건데...”

기본 바탕이 워낙 형편없으니 남들보다 낫긴커녕 그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다.

건물 공사로 비유한다면 땅 다지는 지반 공사에만 한세월이 걸리는 꼴이랄까?

“... 몸 만드는 건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기술(?)부터 배워야겠다. 그게 더 빠르겠어.”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았다.

팔굽혀펴기 열 개 하는데 2주나 걸리는 저질 몸을 믿느니, 어떻게든 다른 살길을 찾아보는 게 옳았다.

다행히도, 나에겐 다른 이들은 절대 따라 하지 못할 비장의 한 수가 존재했다.

“내가 만든 걸 이렇게 게임 속에 들어와서 직접 써먹게 될 줄은 몰랐네. 인생이란 게 참...”

돈 없고 빽 없는 빈민가의 가난뱅이 고아 소년의 고된 가시밭길 인생을 단숨에 화려한 꽃길로 바꾸어 줄 마법(魔法)의 이름.

바로, ‘히든 피스(Hidden Piece)’였다.

< 녹안(綠眼)의 소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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