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4화 (4/197)

< 녹안(綠眼)의 소년 (3) >

‘히든 피스(Hidden Piece)’란 무엇인가?

게임에서 말하는 히든 피스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말 그대로 게임 속에 ‘숨겨진(Hidden)’ 직업이나 아이템, 스킬 등을 의미한다.

보통 히든 피스는 정석적인 플레이 방식으로는 얻을 수가 없고, 특별하고 변칙적인 플레이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었다.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는 비밀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거나, 꼬박 몇 시간을 투자해 지루한 단순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그런 막대한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히든 피스가 지닌 어마어마한 가치 때문이었다.

특히나 <로스트 킹덤> 속의 히든 피스들은 그중 하나만 얻어도 게임의 전체적인 난이도를 뚝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로스트 킹덤>의 게임 개발진들은 굳이 왜 작품의 밸런스를 해칠 정도의 위험 요소를 만들어 게임 속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 개발진의 리더였던 나는,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 애초에 정식 출시용으로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랬다.

<로스트 킹덤> 속 히든 피스들은, 게임의 정식 콘텐츠로 만든 게 아니라 그냥 게임 개발진 내부에서만 쓸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개발 단계에서 우리끼리만 장난삼아 갖고 놀다가, 게임 정식 출시 전에 삭제하려고 했던 것.

문제는, 그 삭제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인데...

‘...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문제였던 게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네?’

이런 걸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이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는 히든 피스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 얘기인즉,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독차지할 수 있다는 얘기지.’

하나만 있어도 게임의 밸런스를 크게 뒤흔들 수 있는 규격 외의 보물들.

히든 피스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년 데미언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동네 적응도 어느 정도 했으니...”

슬슬, ‘보물찾기’를 시작해봐야겠다.

***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여기 바닥 더러운 거 싹 다 치워놓고 퇴근해라. 내 말 알아들었냐?”

“네, 알겠습니다.”

“입만 털지 말고 이 새끼야. 내일 아침에 제대로 확인할 테니까, 농땡이 피울 생각하지 마.”

언제나 그렇듯, 한껏 재수 없는 말투로 사무소 청소를 지시하며 퇴근하는 좀머.

그 때려주고 싶은 못생긴 면상(?)을 향해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걱정마십쇼!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하이고, 지랄하네. 재수 없는 고아 새끼가 어디서 감히 선배니 뭐니 들러붙고... 아, 됐다. 관두자.”

그냥 가도 될 것을 꼭 마지막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좀머였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의 경험으로 좀머의 양아치 기질에 충분히 적응한 나는 이제 그런 말을 듣고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후우... 바닥이 더럽긴 하네, 진짜.”

좀머를 마지막으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퇴근한 용병 길드 사무소.

자고로 용병 길드란 돈벌이를 찾는 험상궂은 용병들과 그런 용병들에게 잘 보여서 어떻게든 업계에 발 좀 걸쳐볼까 싶은 동네 불량배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들락거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대개 그런 이들은 고급스러운 비단옷에 깔끔한 구두보단 피와 먼지가 엉겨 붙은 갑옷 차림에 흙먼지투성이의 더러운 부츠를 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필 비가 내려가지고... 젠장!”

아침까진 깨끗했던 바닥이 사람들이 묻히고 들어온 진흙으로 개판이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길드 막내인 나의 퇴근은 좀 더 늦춰지게 되었다.

“하긴 뭐, 애초에 여기서 살고 있으니 퇴근이랄 것도 없는 건가? 허허...”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이놈의 회사(?) 지박령 팔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 얼른 끝내고 움직여야지.”

물에 흠뻑 적신 대걸레 자루를 힘껏 움켜쥐며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

“엉? 데미언이냐?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크라벤 도시 서편에 자리 잡은 커다란 시장의 가장 번화한 골목.

그곳에서 슬슬 가게 문 닫을 준비를 하던 무기상점 ‘크라벤 아머(Kraven Armor)’의 주인 한스가 낯익은 얼굴의 소년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아... 하아...! 사장님, 아직 문 안 닫으셨죠?”

어지간히 급히 달려온 것인지, 허리를 꺾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금발의 소년.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성실한 막내, 데미언을 보며 한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크흠, 이제 해 떨어질 시간 되어서 슬슬 문 닫으려고 하긴 했다만... 우리 데미언이 왔으니, 장사를 좀 더 해야겠지? 하하!”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하아-!”

“허이고, 숨넘어가겠다 이 녀석아! 숨부터 고르고 천천히 말해라. 어디 도망 안 갈 테니까. 하하하!”

시장 상인들에게 데미언의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못 먹어 비쩍 마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잘생긴 얼굴에 반짝이는 금발을 지닌 소년이 밝은 인사성까지 갖췄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예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

하지만 시장 상인들에겐 그것 말고도 데미언을 예뻐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데미언이 용병 길드라는 중요 거래처(?)와의 연결 고리라는 점이었다.

특히나 무기상인 한스의 경우 용병 길드가 자신의 최대 고객 중 하나였기에 데미언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허헛! 갑자기 뭔 일이 있길래... 뭐, 길드장님이 급하게 주문을 하신 게냐? 뭐가 필요하냐? 화살? 아니면 투척용 단검? 하하! 마침 오늘 아침에 좋은 물건이 들어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후우...”

가까스로 가쁜 숨을 진정시킨 데미언이 굽혀졌던 어깨를 펴며 한스에게 말했다.

“오늘은 길드 일 때문에 온 게 아니고요, 제가 쓸 물건 좀 사려고요.”

“으응? 데미언 네가?”

데미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스.

지난 3년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무기상을 찾아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간 데미언이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쓰려 물건을 사간 적은 없었다.

애초에 한스의 가게는 창칼과 갑옷 따위를 파는 무기상이었기에, 청소 등의 잡무를 하는 어린 소년이 들려 뭔가를 살만한 곳이 아니긴 했다.

“아니, 데미언, 네가 쓰려고 한다니? 대체... 뭘 사려는 거냐?”

“검이요.”

“검?!”

놀라 묻는 한스를 보며, 데미언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검술을 배우려고요.”

“어허...”

데미언이 검술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들은 한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눈앞의 소년이 혹시라도 용병이 되려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 순진한 녀석이 결국 헛바람이 들어서... 저 앙상한 몸으로 그 험한 일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스는 무기상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직업상 용병들을 자주 만나는 사람이기에, 한스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거칠고 힘들며, 위험한지 잘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생각하기에 용병이란 직업과 눈앞의 깡마른 소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데미언. 이 아저씨가 너를 아들처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그 용병 일이라는 게 말이다,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멋있기만 한 게 아니야. 엄청 고되고, 위험하고, 또...”

하지만 그런 한스의 생각을 눈치챈 데미언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

“저, 영업용으로 조금씩 검술을 배워보려고요.”

“여... 영업용?”

“예. 제가 명색이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그래도 칼 잡는 방법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찾아오는 손님들이랑 말도 더 잘 통하죠.”

내 설명을 들은 한스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편다.

“아, 그런 거야? 아이고, 난 또 데미언 네가 용병이 되겠느니 어쩌니 그런 헛바람 들어간 소리를 할까 봐 걱정했다. 하하하!”

“어휴, 제가 이렇게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어떻게 용병이 되겠어요? 지금 하는 일이 저한테는 딱이에요.”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인석아!”

내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두른 한스가 자신 있게 말한다.

“자자, 안으로 들어가자. 이 아저씨가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주마! 돈은 딱 반값만 받으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안 그러냐? 하하하!”

“옙, 감사합니다.”

***

가게 안으로 들어온 한스가 나를 제일 구석에 있는 진열대 앞으로 안내했다.

“자, 데미언! 이쪽에서 하나 골라봐라. 여기 있는 것들이 좀 오래되긴 했어도, 아주 못 쓸 물건들은 아니거든. 하핫!”

좋은 물건들은 가게 입구 쪽에 있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리로?

“흐음...”

눈앞의 물건들을 살피며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깊은 탄식.

‘... 내 이럴 줄 알았다.’

갑자기 물건을 반값으로 준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 이거, 그냥 안 팔리는 물건들이네.’

물건 위에 내려앉아 있는 뽀얀 먼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스가 보여준 물건들은 모두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악성 재고 상품이었다.

‘그럼 그렇지, 장사꾼 말은 믿는 게 아니지.’

먼지 쌓인 물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갑자기 한스가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잉? 아, 하하하하! 요 며칠 공기가 영 안 좋더니 뭔 놈의 먼지가 이렇게... 후! 후후! 후우우우!”

입바람을 열심히 불어보지만, 몇 년 묵은 먼지가 그렇게 쉽게 떨어질 리 없었다.

하도 입바람을 세게 불어서 어지러운지 조금 휘청거리는 한스.

그 모습을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저씨 말처럼 진짜 오래된 물건들이긴 한가 보네요. 먼지가 무슨...”

“에이! 이거 먼지만 좀 쌓였다뿐이지 완전 새거야, 새거! 이봐, 날이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급하게 검 하나를 집어 든 한스가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 검날에 가져다 대었다.

투둑-!

“자, 자자! 봤지? 검 가져다 대자마자 머리카락 끊어지는 거!”

“... 그거 그냥 아저씨가 힘줘서 끊어낸 거잖아요. 저도 눈 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검의 손잡이와 검날 부근의 결합이 헐겁다던가, 손잡이에 감은 가죽이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슬슬 삭아서 부서지고 있다던가...

왜 이 물건들이 안 팔리고 여태까지 가게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지 알만했다.

“... 혹시, 저희 길드에 넘겨주시는 물건도 다 상태가 이런 건 아니죠? 그럼 완전 계약 위반인데...”

길드와의 계약을 걸고넘어지는 내 말에 놀란 한스가 펄쩍 뛰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잇! 그게 무슨 소리냐, 데미언! 이 아저씨 섭섭하다! 너희 길드에 납품하는 물건은 내가 하나하나 꼼꼼하 검수해서 넘기는 거야! 여기 있는 것들은 몇 년 전에 내가 근처 상단 망했을 때 헐값으로 받아온 거라 상태가 이런... 헙!”

결국, 말이 길어지다 제 발등을 찍고만 한스였다.

“흐음, 망한 상단에게 헐값으로 받아온 물건이라... 그런 걸 저한테 팔려고 하신 거군요? 아까는 아들 같으니 뭐니 하시더니만... 하긴, 아들 같은 거지 제가 진짜 아저씨 아들은 아니니까요.”

“그, 데미언! 그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선물로 주신다고 넙죽 받으려고 했던 저도 참 나쁜 놈이죠. 제가 진짜 아들도 아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 저, 내 말 좀 들어 봐라 데미언!”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저씨. 정당하게 물건값 치를 테니까, 이제 좀 쓸 만한 걸 보여주세요.”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내 모습에 당황한 한스가 진땀을 흘렸다.

‘거, 아저씨. 말로만 하지 말고 물질적인 성의를 좀 보여달라고!’

그런 내 속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잽싸게 가게 입구 쪽으로 달려가 무기 진열대를 뒤적거리던 한스가 뭔가를 들고 다급히 돌아왔다.

“자자, 데미언! 이건 진짜다. 너도 방금 봤지? 가게 앞쪽 진열대에서 꺼내온 거?”

“흠, 어디...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그래, 그래. 자, 마음껏 살펴봐!”

아까와는 달리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 한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시퍼렇게 날이 잘 살아있는,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 녹안(綠眼)의 소년 (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