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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화 (11/197)

< 크라벤의 천재 검사 (5) >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맞닥뜨린 최대, 최악의 위기였다.

고작 레벨 6의 능력치로 그 세 배에 달하는 레벨 18의 베테랑 용병과 맞붙어야 한다니.

심지어 상대는 검을 쥐고 있는데, 나는 고작 부서진 의자 다리를 무기랍시고 들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만 실수해도 의자 다리와 함께 내 머리통도 날아가 버릴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이었던 것!

‘... 집중하자, 데미언! 못하면 그냥 여기서 뒈지는 거야!’

그야말로 충무공께서 난중일기에 언급하셨다던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의 정신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허나 그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일까?

완전하게 싸움에 집중한 나는 ‘크라벤의 천재 검사’란 별명에 어울리는 기적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휘우웅! 티잉!

휘잉! 태에엥!

휘우우웅! 탱!

검성의 유산에서 기인한 초인적인 집중력의 도움으로, 흐릿했던 검의 움직임이 점차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증명하듯, 나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빌로트의 검을 모조리 쳐내며 가히 ‘우주 방어’를 선보이고 있었다.

티잉! 태엥! 탱! 태에엥! 타아아앙!

“와아아! 미쳤다 진짜로!”

“엄청나다! 저 녀석 나무 막대기를 들고 진짜 칼을 다 막아내고 있어!”

“저, 저게 가능한 건가?!”

“인마, 가능하니까 지금 하고 있지!”

“워어...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이거 꿈 아냐?”

“현실 맞아 이 자식아! 똑바로 눈 뜨고 보라고!”

“워메, 데미언이 싸움 잘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건 그냥 미쳤잖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대결에 잔뜩 흥분한 구경꾼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건장한 근육질의 사내와 작은 체구의 말라깽이 소년이 막상막하로 싸운다?

“데미언! 힘내라!”

“이 녀석아, 꼭 이겨야 해!”

“데미언! 데미언!”

“너 이 자식 내가 응원한다! 이기면 먹고 싶은 거 뭐든 사줄 테니까 꼭 이겨라!”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 그 광경에, 사람들은 빌로트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나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광경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나의 상태는 그렇게 좋지 못했으니...

“후아! 흡! 커흑! 으아아아!”

태앵! 팅! 태에에에엥!!!

빌로트의 공격 하나하나를 막아낼 때마다 나는 쇠몽둥이를 받아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손을 넘어 팔 전체가 울리는 듯한 느낌!

‘으아아아아! 이런 식이면 의자 다리보다 내 팔이 먼저 부러지겠네!’

무겁다.

진짜 더럽게 무거운 공격이었다.

빌로트의 공격 하나하나에 지금의 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레벨 5, 6 수준의 허접한 얼치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

의자 다리를 쥐고 있는 양손과 손목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지만, 놈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면 손목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머리통이 날아갈 지경이었기에 나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으으으! 으아아아아아!!! 이것도 막아? 이것도? 씨발, 씨바아아알! 뒈져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자신의 공격을 빠짐없이 막아내는 내 모습에 어지간히 열이 뻗쳤는지, 뒤집힌 눈으로 괴성을 토하며 달려드는 빌로트.

있는 힘껏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던 그가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우우웅!

‘못 막으면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동시에 온몸의 힘을 쥐어짜 손에 쥔 의자 다리를 휘둘렀다.

제발, 버텨줘!!!

태에에에에엥!!!

“?!”

“막았다! 막았어!!!”

“우와아아아아! 막았다아아!”

“데미언! 시발, 개 멋있다, 이 자식아!”

“저걸 또 막아? 진짜 미쳤다!!!”

해냈다.

빌로트가 전력을 기울여 펼쳐낸 회심의 일격을, 보잘것없는 의자 다리로 막아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우욱... 큽! 쿠에웩!”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빌로트의 공격을 받아내고 뒤로 대여섯 발자국이나 밀려난 나는 몸을 꺾으며 피를 토했다.

의자 다리 너머로 전해진 충격에 속이 진탕된 탓이다.

뿐인가, 누적된 충격으로 찢어진 손바닥에서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 앞서 검에 베인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섞여들며 바닥으로 떨어지니, 이미 내 주변은 시뻘건 피바다였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이런 젠장, 이 이상은 무리야...’

하긴,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와 가물거리는 의식.

한계에 다다른 체력과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이 나의 정신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으직, 털썩!

직전의 일격으로 완전히 부러져 바닥에 떨어져 버린 의자 다리.

검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교묘하게 검의 옆면을 때리는 방식으로 버텨왔으나, 누적된 충격을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흐흐, 하하하! 이제 어쩌냐? 용케 잘 버텼다만, 이제 그것도 끝이구나. 이 쥐새끼야! 으하하하하!”

의자 다리가 부러지는 걸 본 빌로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다.

“자아, 이제 심판의 시간이다. 건방진 애송아. 흐흐흐!”

잔혹한 미소를 지은 빌로트가 무기를 잃고 망연자실한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퍽!

“크헉!”

나는 빌로트가 냅다 내지른 발차기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몸 상태가 엉망인 탓에 감히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아, 내 인정하마. 너 이 시발 새끼,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어지간한 용병 새끼들보다 훨씬 나아!”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 칭찬을 늘어놓던 빌로트가 바닥에 쓰러진 내 가슴팍에 발을 올렸다.

콰직!

“끄으으으...”

“근데,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계산은 제대로 해야겠지? 이 좆만 한 개새끼야, 재미 좋았냐? 응?”

하지만 몰려드는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도 나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끄흡... 조... 까, 오크... 대가리... 새끼야...!”

“허, 이 새끼가 끝까지... 그래 뭐, 네 근성도 인정해주마. 대단한 거 알았으니까 이제 끝을 내자. 흐흐흐!”

휘웅-!

섬뜩한 파공성을 내며 내 얼굴 옆으로 달라붙은 빌로트의 검.

차가운 금속이 내뿜는 특유의 한기가 내 뺨으로 느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귀 한쪽이랑 손목, 발목 한쪽씩 잘라줄게. 하! 시발, 이 정도면 진짜 많이 봐준 거야 이 새끼야. 지금까지 나한테 개겼던 새끼 치고 살아있는 놈이 없거든. 크하하하하!”

“으으으... 이 미친... 새끼가...!”

“워워, 움직이지 마. 너무 움직이면 귀가 아니라 눈깔까지 파 버리는 수가 있다. 응? 칼에는 눈이 없어요. 크흐흐!”

콱, 비어 있는 왼손으로 내 머리채를 움켜쥔 빌로트가 오른손에 든 검을 천천히 귀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자아, 이 꽉 물어라. 좀 아플 거야. 흐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리던 빌로트가 검을 든 오른손에 힘을 막 주려던 그때.

“... 거기까지. 그 이상 움직이면, 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여관 건물 앞, 구름처럼 모여든 구경꾼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함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이런 시발! 어떤 개새끼가 함부로 이 몸의 이름을 부르고 지랄...!”

내 머리채를 단단히 휘어잡은 채 거슬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던 빌로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긴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나는 느꼈다.

‘...!’

내 머리채를 잡은 빌로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타났길래?

***

처음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겔베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웬 꼬맹이를 상대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근육질 사내의 모습이었다.

참고로, 겔베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근육질 사내의 이름과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빌로트? 저 개 또라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내의 이름은 겔베르트의 뒤를 잽싸게 따라온 엔리케의 입에서 나왔다.

더불어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번에 ‘개 또라이 새끼’라는 표현이 나왔다.

평소 그들이 빌로트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였다.

“... 대장.”

“음? 왜?”

뒤이어 여관 앞에 도착한 메이슨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겔베르트는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 부름에 답했다.

“빌로트랑 상대하고 있는 저 녀석... 그놈입니다.”

“그놈? 그놈이 누구... 어?”

순간적으로 메이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겔베르트.

그러나 반짝이는 금발 머리와 깡마른 팔다리를 한 소년의 모습에서 낯익은 누군가를 금세 떠올렸다.

“아! 저거 길드에서 접수보는 꼬맹이? 아니,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냐?’ 따위의 말을 하려던 겔베르트였으나, 지금 그딴 이유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저 말라깽이 소년이 빌로트를 상대로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빌로트 저 새끼... 인성이 개막장이라 그렇지, 원래 좀 하는 새끼 아니냐?”

겔베르트의 물음에, 그의 옆에서 넋을 놓고 소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엔리케가 대답했다.

“예에, 맞슴돠! 빌로트 저 새끼 저거, 조만간 은패 딸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 데요?”

엔리케의 입에서 나온 표현, 은패(銀牌).

‘은(銀)으로 만들어진 용병패’라는 뜻으로, 용병의 수준을 알려주는 가장 직관적인 증거물이었다.

<로스트 킹덤> 세계관 속 용병의 등급은 총 여섯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용병패를 받지 못하는 무(無) 등급이었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갈 때마다 각각 철, 동, 은, 금, 백금으로 만들어진 용병패를 받았다.

무(無) 등급 의뢰를 총 오십 번 수행하여 실적을 인정받으면 다음 단계인 철패를 받게 되고, 다시 철패 등급 의뢰 오십 번을 수행하면 은패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식이었다.

용병패에는 그것을 제작해 발급해준 길드의 이름과 일련번호가 찍혀 있었는데, 해당 길드에선 용병패의 발급과 동시에 관련 문서 기록을 남겨두어 위조를 방지했다.

참고로, 용병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 열 중 아홉은 철패조차 만져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철패를 따낸 용병 열 명 중 아홉이 다시 동패를 따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 구경을 하게 된다.

다음 등급인 은패, 금패, 백금패 역시 거의 비슷한 생존율을 보였다.

즉, 지금 겔베르트 일행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빌로트는 살아남아 따낼 확률이 ‘천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은패 등급 용병에 근접한 실력자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는 것은...

“... 그럼, 지금 저 금발 머리 꼬맹이가 은패를 따네마네 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말이냐?”

“어, 으어어.. 그게 또 그렇게 되네요? 미친 거 아닙니까, 진짜?”

겔베르트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는 엔리케였다.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심지어 또래 소년들보다 체구도 작고 비쩍 마른 몸을 지닌 녀석이 은패 등급을 노리는 베테랑 용병과 비슷한 수준의 기량을 지닐 수 있다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세계의 상식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에 겔베르트의 얼굴이 절로 심각해지는데, 등 뒤에서 메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제가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린 녀석이 대단한 수준의 고급 검술을 쓴다고...”

“그래, 그랬지.”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군에 있던 시절에도 저 정도 상승의 검술을 쓰는 이는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당연하고, 심지어 기사 중에서도 말입니다.”

석 달 전, 처음 저 녀석의 모습을 목격하고 했었던 얘기를 다시 한번 들려주는 메이슨의 모습에 겔베르트의 눈빛이 더욱 깊어진다.

그때는 한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라 반신반의했었는데,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니 더더욱 충격적인 소년의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재능.

똑같이 무(武)의 길을 걷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부러웠고, 미치도록 탐나는 재능이었다.

“저 녀석, 고아라고 했었지?”

“예,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뒤 봐주는 사람은 따로 없고?”

“처음 길드에 왔을 땐 후원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없답니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 내가 데려다가 함 키워봐?’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겔베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일단, 밥이라도 한 끼 사주면서 친해져 봐야겠다. 한창 먹는 거 좋아할 녀석이 몸이 저게 뭐냐.”

“예, 알겠습니다.”

그리 하려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바로 그때, 겔베르트의 눈에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가는 빌로트의 모습이 보였다.

“하, 저 미친놈이 진짜...”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 주변 구경꾼들의 어깨를 양손으로 지그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선 겔베르트가 말했다.

“... 거기까지. 그 이상 움직이면, 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이 드넓은 왕국 내에 단 삼십여 명뿐이라는 ‘금패 등급’의 용병이자,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로 불리는 ‘푸른 방패’의 리더 겔베르트의 차가운 목소리가 폭주하던 빌로트의 광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 크라벤의 천재 검사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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