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방패 용병대 (1) >
나지막한 말 한마디로 미쳐 날뛰던 빌로트를 얌전하게 만든 사나이.
구경꾼 틈에 서 있던 그가 걸어 나온다.
저벅, 저벅...
천천히 내딛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사방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끄으으...”
나는 여전히 빌로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쓰러져 있었기에,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움직여 점점 가까워지는 그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 이 아저씨는 또 누구야?’
빌로트의 반응을 봤을 땐 서로 아는 사이 같았는데, 놈이 손을 덜덜 떠는 걸 보니 그렇게 얼굴 봐서 기분 좋을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이 빌로트와 두어 발자국 떨어진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사내.
빌로트도 작은 덩치는 아니었는데, 그 사내는 그 빌로트를 작아 보이게 할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저벅, 저벅, 턱-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그가 나직한 저음으로 점잖게 훈계하듯 말했다.
“빌로트, 오베린의 빌로트... 이름 없는 얼치기 용병도 아니고 짬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어린 애 상대로 이래서야 쓰나. 안 그래?”
하지만 빌로트는 사내의 그 점잖은 말이 어마어마한 협박처럼 들린 모양인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 음... 이, 이거 봐, 내가 사정이 좀 있었어. 그니까 그게...”
“흠, 사정이라... 뭔 대단한 사정이길래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걸까?”
“드, 들어봐! 진짜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나랑 우리 애들이 이 여관 단골손님이거든. 지금부터 네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말이 내가 듣고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는데?”
“그, 그게 말이지... 컥!”
콰악!!!
빌로트의 변명은 순식간에 그의 목을 틀어쥔 사내의 행동으로 더 이어지지 못했다.
“끄윽... 커흐읍!”
“음?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놔... 놔주... 크읍!”
놀랍게도, 사내는 한 손으로만 빌로트의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나를 상대로 무지막지한 강검을 휘두르던 빌로트가 쪽도 못 쓰고 매달려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라니!
‘뭐야?! 이 아저씨 힘이 얼마나 센 거야?!’
깜짝 놀란 나의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빌로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반갑다, 싸움 잘 하는 꼬맹이. 오랜만에 보네?”
“저... 저를 아십니까?”
“글쎄,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씨익, 내게 미소지은 사내가 다시 빌로트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일단, 이 새끼부터 처리하고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
“... 그래서, 내가 너무 열이 받아서! 그러면 안 되는데 흥분을 한 거지! 그, 어... 정말 미안하게 됐어.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
좀 전의 광기는 잊은 듯 더할 나위 없이 착해진 빌로트가 쩔쩔매는 표정으로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놀랍도록 극적인 변화.
거듭 고개를 숙이는 빌로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놈을 이토록 예의 바르게(?) 만든 사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대체 정체가 뭐지?’
그가 빌로트에게 한 건 처음 다가와 목을 움켜쥐고 그 상태로 몇 마디 나눈 게 다였다.
‘뭐, 그것도 엄청난 장면이긴 했지.’
하지만 그러기 전, 사내가 구경꾼들 틈에서 등장한 순간부터 빌로트는 고양이 앞의 쥐, 아니...
‘... 호랑이 앞의 쥐 같았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표현을 할 정도로 빌로트는 사내의 존재감에 꼼짝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리고 앞으로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게! 그러니까... 어, 음... 이만 나는 가봐도 될까?”
사내의 눈치를 보며 비 쫄딱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묻는 빌로트.
하지만 사내는 까슬하게 자라난 자신의 턱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 뭔가 되게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지 않아?”
“응...? 어, 어떤?”
“여기, 이 녀석한테 사과를 안 했잖아. 정작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쪽이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사내의 시선이 아래위 할 것 없이 골고루 얻어터져 엉망이 된 나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 나를 바라보는 빌로트.
일그러진 놈의 표정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얻어터진 건 난데...’
나 역시 독기 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그를 마주 쏘아보았고, 거기에 가시 돋친 한 마디를 얻었다.
“거, 말 나온 김에 얼른 사과하시죠? 제가 ‘누구와는 달리’ 넓은 마음으로 받아 줄 테니까.”
“...!”
짧은 말 한마디로 속을 뒤집는 나의 행동에 이를 악물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빌로트.
어지간히 열이 받는지,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살기가 들끓었다.
‘나중에 만나면 바로 죽여버린다, 이 좆만 한 새끼야!’
‘뭐, 네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털 없는 오크 대가리 주제에.’
짧은 순간, 대충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 우리 사이에 오갔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눈앞에 선 사내의 존재가 어지간히 두려웠던 건지, 빌로트는 잠깐의 머뭇거림 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후우우... 내가 미안하다, 꼬맹아. 아까 함부로 손을 쓴 거, 죽인다 어쩐다, 마지막에 귀 자른다고 협박한 거, 다 잘못했다. 진짜 미안하다!”
“... 뭐, 저도 어른한테 건방지게 굴었던 거, 사과드립니다.”
빌로트의 사과를 들으며 나도 점잖게 몇 마디를 답해주었다.
생각 같아선 ‘진짜로 미안하면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 봐라, 이 개 호로 새끼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뻗대다간 나도 눈앞의 사내에게 혼이 날 것 같아서 이쯤 하기로 했다.
“하하, 서로 이렇게 화해하니 보기 좋네! 음?”
짝-
나와 빌로트가 서로 사과 아닌 사과를 나누는 모습을 본 사내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자, 그럼 빌로트?”
“어, 음... 예?”
사내의 부름에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로 대답하는 빌로트.
그런 녀석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사내가 별안간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말한다.
“이제 꺼져, 이 새끼야.”
“...!”
“그리고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마라. 아! 참고로 우리 애들도 너랑 썩 얼굴 맞대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기왕 꺼지는 김에 아예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걸 추천한다. 우리 애들, 일하다 몇 번 만나봐서 성질 더러운 거 알지?”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킨 방향엔 부러진 앞니를 보이며 음산하게 웃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와 무뚝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장발의 흑인 사내가 있었다.
‘응? 그러고 보니 저 머리 긴 흑형?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내가 팔짱 낀 흑형(?)을 어디서 봤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빌로트는 사내와 그 부하들의 눈을 피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나와 식당 손님들 앞에선 그토록 안하무인으로 굴던 녀석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데, 데미언! 괜찮으니? 응? 어이고, 이 피 나는 것 좀 봐!”
빌로트가 도망치자마자 내게 달려온 후고 아저씨가 내 몸에 난 상처를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이구, 자기도 얻어맞아서 코며 입술이며 다 터졌으면서 내 걱정부터 하다니... 이거야 원.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아저씨 몸부터 챙기세요. 아까 맞은 데는 괜찮으세요?”
“아, 이거? 아휴, 괜찮아! 멀쩡해! 장사하면서 저런 미친놈들 만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 줄 아니?”
내가 걱정할까 봐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후고 아저씨였다.
바로 그때, 빌로트를 쫓아버린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후고 아저씨에게 물었다.
“주인장, 저놈한테 맞았습니까?”
“응? 아이고, 우리 용병대장님이셨구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꽤 친분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여관 단골손님이라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건네 들은 사내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돌려 부하를 호출했다.
“엔리케.”
“예, 대장.”
“너, 지금 바로 저 새끼 따라가서...”
“죽일까요?”
빌로트를 따라가라는 사내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살벌한 말을 늘어놓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 엔리케였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에이, 뭐야! 좋다 말았네.”
하지만, 대장 사내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깔끔하게, 오른팔만 하나 잘라.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서 함부로 우리 주인장 얼굴에 손을 대?”
“... 헙!”
“헐!”
대장 사내의 명령을 듣고 놀란 후고 아저씨와 나의 입에서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닙니다, 주인장. 저런 새끼는 한번 조질 때 제대로 조져야 버릇을 고쳐요. 저대로 놔두면 나중에 저희 없을 때 와서 어떻게든 행패를 부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걱정스러운 얼굴의 후고 아저씨를 다독이며, 대장 사내가 재차 명령을 내린다.
“뭐해? 빨리 갔다 와.”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야, 너랑 너. 따라와.”
엔리케가 밑의 부하 두 명을 지목해 함께 자리를 떠난 후, 다시 웃는 낯으로 변한 대장 사내가 후고 아저씨를 보며 말을 걸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목소리였다.
“자자, 이제 장사하셔야죠? 저희 배고파 죽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눈 떠서 종일 걷기만 했더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라...”
“예, 어서 들어가시죠. 제가 오늘은 특별히 음식값 안 받겠습니다.”
“그래요? 어허, 그럼 오늘 이 집 기둥뿌리 뽑힐지도 모르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저희 여관 기둥이 튼튼해서요.”
후고 아저씨와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나누던 대장 사내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아, 그리고... 용감한 꼬맹이?”
“예?”
바짝 긴장한 내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지? 같이 먹자. 들어가서 그 상처도 좀 봐줄게.”
***
“빌로트 그 새끼, 영지 북쪽에 있는 오베린(Oberin) 출신이거든. 들어봤지?”
“예.”
여관으로 들어와 간단한 상처 치료를 마친 뒤, 사내는 나를 자신의 맞은편에 앉혀놓고 빌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오베린의 빌로트라고 부르지. 기사 놈들이 자기 이름 말할 때 출신 지역 붙이듯이... 어, 이거 되게 맛있네?”
테이블 위, 후고 아저씨가 정성껏 만든 닭요리를 맛보던 대장 사내가 작게 감탄했다.
“자, 이건 네가 먹어라. 너도 알지? 닭다리는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거.”
“아, 예. 잘 먹겠습니다.”
“그, 아까 네가 그랬지? 경비대 얘기를 꺼냈더니 빌로트 그 새끼가 갑자기 눈깔 뒤집혀서 칼을 뽑았다고.”
“음... 예! 그랬습니다.”
우물우물, 나는 사내가 내 접시에 놓아준 큼지막한 닭다리를 열심히 씹어먹으며 대답했다.
“그 자식, 원래 오베린 도시 경비대에서 일하던 새끼였거든. 근데 뭐 맨날 도박하고 술 처먹고 사고 엔간히 치다가 경비대에서 잘린 모양이야.”
“아...”
“경비대에서 일할 때 공금 슬쩍했던 것도 걸려서 상관한테 뒤지게 처맞고 옷까지 홀랑 벗겨져서 쫓겨났다지 아마? 그래서 경비대 얘기하면 발작하는 거야.”
“음... 그냥 쓰레기였네요.”
“뭐? 푸하하하!”
나의 깔끔한 정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가 먹던 음식마저 내려놓은 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너 이 자식!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싸움도 잘하는데 입심도 만만치 않구나.”
“흐음, 제 생각도 그래요.”
자신을 상대로 전혀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이 이어나가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대장 사내는 식사하던 것도 잊은 채 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정식으로 통성명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눈 끝에,
“데미언,”
“예?”
“너 내 밑에서 용병 일 배워볼 생각 없냐? 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이 바닥에서 좀 하는 사람이거든. 너한테도 손해 보는 제안 아닐 거야. 어때?”
‘대장 사내’ 겔베르트의 입에서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 좋아요. 하겠습니다.”
당연히, 승낙이었다.
왜냐고?
‘크, 여기서 이 양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상태창을 통해 파악한 상대의 정체.
푸른 방패 용병대의 대장 겔베르트.
그는 게임의 원작 소설인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의 초반부에 등장해 이웃 영지와의 전쟁에 휘말린 주인공을 지키다 부하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 인물이었다.
즉, 겔베르트의 용병대에 합류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거대한 세계관의 중심인 ‘주인공’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좋아! 이 자식, 입담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하구나! 환영한다!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막내야!”
“옙,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얼굴 가득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손을 내미는 겔베르트.
콰악!
거친 굳은살로 가득한 그 손을 힘껏 마주 잡으며,
나는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푸른 방패’의 막내 대원이 되었다.
< 푸른 방패 용병대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