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4화 (14/197)

< 멘하우 요새 공방전 (1) >

총 스물세 명으로 이루어진 푸른 방패 용병대의 모든 인원이 모인 자리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부하들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대장 겔베르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번 의뢰는 지명 의뢰다. 근데, ‘거절할 수가 없는’ 의뢰야.”

쓰읍, 그 말을 하면서 쓴 입맛을 다시는 겔베르트.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이 의뢰를 제안한 상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왕국 내에 서른 남짓한 금패 용병이자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푸른 방패의 리더인 그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상대라면...?

“그, 대장님 표정이 왜... 누가 의뢰를 넣었길래 그러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엔리케가 모두를 대신해 질문을 던지자, 미리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겔베르트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의뢰인은 ‘카림 다보르’다. 너네처럼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없는 멍청이들도 그 이름 정도는 알겠지.”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대원들이 눈에 띄게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카림... 다보르?”

“어? 나 들어본 적 있어!”

“아씨, 누구더라? 왜 익숙하지?”

“그... 뭐야, 우리 영지에서... 엄청 높은 사람 아닙니까? 예?”

“어, 맞아! 맨날 영주 움직일 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잖아?”

“이 등신들아! 그냥 높은 사람 아니고, 텔마르크 영지 재무관이잖아!”

누군가가 꺼내놓은 답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영지 재무관이라면, 그야말로 영지 내의 돈줄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요직 중의 요직.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요직(要職)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영지 내에선 ‘절대자’라 부를 수 있는 영주의 신뢰를 받는 자리라는 뜻이다.

“아니, 재무관이 직접 우리한테 의뢰를 줬다고요? 어디 전쟁이라도 한답니까?”

늘 능글맞던 엔리케가 평상시의 장난기를 싹 지워내며 물었다.

그의 말처럼 영지 재무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나서서 특정 용병대를 지명해 의뢰를 맡기는 데 단순한 심부름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전쟁까진 아니다만... 뭐, 비슷하지. 의뢰받은 내용은 호위 임무다. 일주일 후 크라벤을 출발하는 짐 마차를 호위해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엥? 짐 마차 호위요?”

“뭐, 그 정도면 평범한 임무 아닙니까?”

“그러게. 난 또 뭐 엄청난 게 있는 줄 알았네...”

“뭐야, 대장! 왜 괜히 무게를 잡고 그래요! 놀랬잖아요!”

생각보다 별 것 없는 의뢰의 내용에 분위기가 흐트러지려던 그 순간,

“참고로 마차의 목적지는... 브렌도르프 영지 남부에 있는 멘하우(Menhau) 요새다.”

“...!”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의뢰 목적지를 들은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다.

멘하우 요새가 있는 브렌도르프 영지는 현재 이웃한 벨가르트 영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두 영지의 경계에서 발견된 구리 광산의 소유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전황은 재빠르게 선제공격을 감행한 벨가르트 측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텔마르크의 영주 라이만 남작과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 둘 다 그뢰네마이어 백작의 봉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 그래서 텔마르크가 브렌도르프를 지원하기로 한 겁니까?”

“그래. 우리가 호위할 마차엔 멘하우 요새의 병사들이 먹을 식량과 무기들이 실려있다.”

“군수 물자 수송이라... 젠장, 벨가르트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우릴 잡아 죽이려 하겠군요.”

이번 임무에서 겪게 될 어려움의 이유를 정확하게 꼬집는 엔리케의 말에 겔베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텔마르크 영지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브렌도르프로 들어가는 순간 놈들의 표적이 될 거다.”

“하...”

진하게 풍겨오는 위험의 냄새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린다.

이렇게 특정 목표를 호위해가며 싸우는 것이 대놓고 전투 목적으로 투입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임무였기 때문이다.

“출발은 일주일 후다. 그 기간 내에 각자 필요한 거 빠짐없이 준비하고. 특히 방어구는 확실하게 손봐라.”

“옙, 알겠습니다!”

“좋아, 전달 사항 끝. 해산!”

***

짧았던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술 먹자고 꼬시는(참고로, 나는 아직 미성년자다) 조장 엔리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올라온 여관 2층의 내 방.

어두운 방을 밝히는 양초 하나를 피운 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브렌도르프라...”

텔마르크의 북쪽에 위치한 남작령 브렌도르프(Brendorf).

영지 전체에 숲이 무성해 좋은 목재를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브렌도르프는 다른 쪽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브렌도르프... 성지가 있는 곳이지.”

성지(聖地) 에셀바흐(Esselbach).

에셀바흐는 대륙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의 절반이 믿고 따른다는 아르닌 교의 여러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백여 년 전, 아르닌 교의 창시자인 ‘선지자(先知者)’ 하인델(Heindel)이 그의 생애 처음으로 기적을 행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곳엔...

“이번 기회 아니면 그 근처 갈 일이 없을텐데... 무조건 가야지, 무조건!”

지금의 나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 줄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聖杯)’가 있었다.

***

일주일 후,

브렌도르프 남부의 한 평원_

사방이 막혀 있던 숲을 벗어나 탁 트인 평원으로 나오자 멀리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저기 슬슬 보이는 거 같습니다, 대장.”

반가움이 묻어나는 엔리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한참 더 걸어가야 닿을 거리였지만, 일단 목적지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피로했던 다리에 힘이 붙는 기분이었다.

“흐음... 반나절 정도 더 걸어가면 도착하겠네.”

눈으로 보이는 거리를 대충 가늠한 겔베르트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금패 용병인 그의 말이니,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다들 상태 어떠냐? 어디 불편한 곳 없지?”

“옙, 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몸 상태를 묻는 겔베르트의 질문에 모두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텔마르크 영지의 주도(主都) 크라벤을 출발해 브렌도르프의 멘하우 요새로 향하는 길.

출발한 지 닷새째가 되는 날이었지만, 지금까지는 텔마르크 영지 내에서만 이동했기에 별달리 문제 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영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숲을 넘어 브렌도르프 땅으로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전원 정지, 여기서 잠시 정비 시간을 갖는다.”

“전원 정지이이이이!”

선두에 서 있던 겔베르트의 말을 옆에 있던 부하가 큰 목소리로 복창했고, 그 순간 용병대와 짐 마차를 끄는 수행원을 포함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 메이슨.”

“예, 대장.”

“저 앞에 정찰 나가 있는 애들 이제 들어오라고 해. 그런 다음에 네가 직접 애들 둘 데리고 나서 주변 돌아봐.”

“알겠습니다.”

“정찰 범위는 두 배로 늘린다. 더 멀리, 더 넓게 돌아보면서 멘하우 요새로 가는 길에 위험 요소는 없는지 살펴봐”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겔베르트의 지시를 받은 메이슨이 서둘러 무리를 빠져나간다.

용병대 서열 2위인 메이슨을 직접 정찰에 투입하는 모습에서, 모두가 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흐음... 엔리케.”

“예, 대장.”

메이슨을 정찰 임무에 투입한 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일까?

겔베르트가 이번엔 엔리케를 호출한다.

“저기, 오른쪽에 있는 언덕 보이냐?”

“... 예, 보입니다.”

“저리로 올라가서 동쪽에 있는 숲 감시해. 혹시라도 숲에서 벨가르트 놈들 튀어나오면 바로 신호 보내고. 효시(嚆矢, 화살촉을 피리 구조로 만든 화살.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쓴다) 챙겨 왔지?”

“옙, 챙겼습니다.”

“그래. 언덕 위에서 계속 감시하다가, 적당할 때 뒤에 따라붙어. 혹시 모르니 짝으로 막내 데려가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막내, 가자!”

“예!”

***

꽤 경사가 있었지만, 나와 엔리케는 숨 한번 거칠어지지 않고 단숨에 언덕을 뛰어올랐다.

“후! 위치 좋다, 잘 보이네.”

언덕 위 큼지막한 바위 곁에 바짝 엎드린 엔리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숲을 관찰한다.

용병대 최고의 활잡이답게, 엔리케는 눈이 정말 좋았다.

과장을 조금 섞어 날아다니는 매나 독수리와도 겨뤄 볼 만하다는 농담을 우리끼리 할 정도였으니...

“조장, 뭐 좀 보여요?”

나의 물음에, 심각한 표정이 된 엔리케가 숲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직은 뭐가 안 보이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숲을 감시하던 엔리케.

별안간 그가 엎드려 있던 자세를 바꿔 벌떡 일어서더니, 등에 매여 있던 효시 한 발을 꺼내 들었다.

“막내야, 벨가르트 놈들 떴다!”

“?!”

엔리케의 말을 듣고 바로 숲을 바라보았지만, 아직 내 눈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두두두두두두!

“헉!”

무성한 수풀을 해치며 모습을 드러낸 한 떼의 기병들!

거리가 멀어 놈들의 소속을 정확한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우리 용병대가 이끄는 짐 마차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들이 어떤 깃발 아래서 싸우는 이들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거 쏘면 바로 뛰어 내려가자! 철수 준비해!”

“옙!”

투웅-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익-!

엔리케의 손끝에서 풀려난 효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른다.

동시에 우리는 땅을 박차며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장, 저 새끼들 우리 본 것 같은데요?”

“어, 나도 봤어!”

하늘을 뒤덮은 효시의 울림은 적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무섭게 달려나가던 적의 무리 중 몇 놈이 우리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하나, 둘, 셋.

총 3기의 적 기병이 본대를 이탈해 우리에게 달려온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놈들과 우리의 거리만큼 가슴 속의 긴장감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촤앙! 촤앙! 촤앙-!!!

검을 뽑아 들며 본격적인 공격 태세에 들어가는 녀석들.

다행인 것은, 놈들 역시 정찰대였는지 무장 상태가 가벼웠다는 것.

묵직한 사슬 갑옷이나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중기병과 달리 가벼운 천 갑옷을 입은 경기병이었다.

그 얘기인즉, 방어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투우웅-!!!

쐐애액-! 퍼억!

“쿠엑-!!!”

엔리케가 쏘아낸 화살에 적중당한 적 기병 하나가 목을 움켜잡으며 말 아래로 떨어진다.

우지직, 목뼈가 부러지는 음산한 소리는 지척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이로써 2 대 3의 대결은 순식간에 2 대 2의 구도로 바뀐다.

“활 든 놈을 조심해! 산개!”

엔리케가 보여준 귀신 같은 활 솜씨에 한순간에 동료를 잃은 적들이 깜짝 놀라며 대형을 널찍하게 바꾼다.

하지만 이미 예열이 끝난 엔리케의 활은 자비 없이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니...

퉁-! 퉁-!

거의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가는 두 대의 화살.

퍽-! 퍽-!

한 대의 화살은 정확하게 말의 머리통을 맞췄고, 뒤이어 날아온 화살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끼후우우우우!!!”

“끄아악-!”

머리통에 화살을 얻어맞은 말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몸을 뒤집으며 쓰러지고, 가슴팍에 화살을 꽂은 기수는 말 등에서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에서 머리부터 떨어졌으니 그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절명(絶命).

우세했던 적의 전력이 순식간에 열세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야, 막내야! 내가 두 놈 치웠다아!”

“예, 남은 놈을 저한테 맡기세요!”

엔리케의 말에 대답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스릉, 촤아아앙-!

완벽의 경지에 다다른 발검(拔劍).

검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감탄을 금치 못할 그 광경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상대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 테지만, 이미 늦었다.

“흐아아아앗!!!”

힘찬 함성과 함께, 나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 멘하우 요새 공방전 (1)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