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6화 (16/197)

< 멘하우 요새 공방전 (3) >

브렌도르프 남부,

멘하우 요새_

“대장님, 영주님이 보낸 지원은 아직입니까?”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말하는 부하들의 눈빛이 간절하다.

하지만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Dirk Kehrer)는 부하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곧 도착할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젠장! 벌써 사흘째 건더기 없는 멀건 죽만 먹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이제 하루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판국이라구요!”

얼굴 이곳저곳에 피딱지가 말라붙은 백인대장 하나가 버럭 성질을 내며 말했다.

평상시라면 그 태도의 불손함을 물어 크게 나무랐을 테지만, 케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악전고투를 거듭 중인 부하들의 울분을 받아내는 것 또한 지휘관의 의무였으니까.

“다들 힘들다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지원은 반드시 올 거다.”

“... 알겠습니다.”

낙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부하들.

잠시 후,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은 케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빌어먹을!”

얼굴을 감싸 쥔 그의 두 손 사이로 나지막한 욕설이 새어 나온다.

제대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시작된 전쟁이었다.

기병으로 유명한 벨가르트답게 놈들은 개전 초기 기동력의 우위를 살려 영지 경계선 부근의 마을 이곳저곳을 동시에 타격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긴 브렌도르프는 적이 강요한 전장으로 끌려다니며 패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2백여 명의 상비 전력이 있었던 멘하우 요새.

그러나 사방에서 빗발치는 구원 요청에 응하느라 그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 요새를 빠져나갔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벨가르트의 본대가 총 5백의 병력으로 멘하우 요새를 들이쳤다.

그렇게 시작된 1백 대 5백의 싸움.

성벽의 단단함에 기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어찌어찌 극복해나가고 있다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요새 안에 비축되어 있던 물자가 바닥을 보이면서 수비군의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던 것.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외부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전달된 척후조의 보고는 케러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한 가닥 희망까지 무너뜨리고 말았다.

[벨가르트 군이 브레스덴에서 멘하우로 향하는 가도를 점거 중. 현재로선 브레스덴으로부터의 이른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다른 방향으로의 활로 모색이 필요]

브렌도르프의 주도(主都) 브레스덴과 이어지는 가도를 적이 점거하고 있어 지원이 어려울 것이라는 척후조의 보고.

요새를 포위한 적의 병력은 다섯 배, 식량은 다 떨어진 데다 지원은 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이대로는 무리다. 하루나 버틸 수 있을지...”

슬며시 머릿속에 ‘항복’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쿠당탕!

“대, 대장님!!!”

부서질 듯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의 부름에, 케러는 얼굴을 감싸 쥐었던 손을 떼었다.

“... 무슨 일이냐.”

“전령이 왔습니다! 보급 물자가 요새 근처에 당도했다는 소식입니다!”

“보급 물자? 그게 무슨... 브레스덴에서 오는 보급로는 죄다 막혔을 텐데?”

병사가 전한 보고를 들은 케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병사의 말엔 케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텔마르크입니다! 텔마르크 영지에서 우리에게 보급 물자를 보냈습니다!”

***

전령 도착 몇 시간 전,

멘하우 요새 근방의 숲_

“... 벨가르트 놈들이 이미 요새를 포위 중이라고?”

우리는 정찰 임무를 마치고 본대로 복귀한 메이슨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예. 요새로 이어지는 주요한 도로는 모두 틀어막혔고,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경계조가 수시로 요새 근방 정찰을 돌고 있습니다.”

“젠장, 일이 골 때리게 돌아가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생각에 빠진 겔베르트.

오랜 고민 끝에, 일단 우리의 존재를 요새 안의 브렌도르프 군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가 벨가르트 군의 시선을 피해 요새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근데, 누가 침투합니까?”

“...”

이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누구도 선뜻 손을 들며 나서질 않았다.

적의 감시를 피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뛰어난 은신 능력과 혹시 모를 전투 상황에서 적을 단시간에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무력, 요새 내부로 들어간 후 브렌도르프 군에게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언변 능력까지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능력자들이 많은 우리 용병대였지만, 이 모든 능력 두루 갖춘 인물은 흔치 않았다.

“... 내가 직접 간다.”

하여, 대장인 겔베르트가 직접 이 임무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후우...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쇼.”

“지금 바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대장, 검 이리 주십쇼. 제가 검댕 칠해 놓겠습니다. 아주 꼼꼼하게.”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등 떠밀어 내보내려는 부하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겔베르트였다.

“... 뭐야, 안 말려? 대장이 직접 험한 일 하러 불구덩이로 들어가겠다는데 말려야지 이 새끼들아!”

“...엥? 왜 그래야 합니까?”

“말리긴 뭘 말립니까? 그나마 제일 가능성 있는 사람이 대장님인데.”

“그건 맞지... 그리고 애초에 대장님이 내놓은 작전이잖습니까? 그럼 본인이 해결하셔야죠!”

“근데, 대장 침투하다가 벨가르트 놈들한테 걸려서 죽으면 메이슨 부대장이 바로 대장 되는 건가?”

“오호, 그럼 엔리케 조장님은 부대장으로 승진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순번상 그렇게 되겠지? 으헤헤헤!”

“...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들.”

늘 그렇듯 훈훈한(?) 대화가 오간 끝에 겔베르트의 (자가)투입이 결정되는 듯 했지만...

“대장, 제가 가겠습니다.”

“?!”

“...!”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나선 나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잇... 야! 막내! 안 돼 인마!”

“그래, 이건 너무 위험해.”

“이 자식이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구분을 못하고... 손 안 내릴래?”

“아직 성년도 안 지난 놈이 벌써부터 뒈질 자리를 찾아가네? 정신 차려 인마!”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거들며 나의 임무 지원을 만류하는 선배들.

이미 실력 면에서 용병대 내 1, 2위를 다투는 나였지만, 선배들의 눈에는 여전히 챙겨주고 싶은 막내일 뿐이었다.

“너무 어려운 임무다. 아직 너에겐 무리야.”

심지어 부대장 메이슨까지도 굳은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 대장 겔베르트만은 말없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 막내, 자신 있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모두가 펄쩍 뛰며 난리를 피웠다.

“예?!”

“대장!”

“아이씨, 미쳤어요? 막내를 어떻게 보냅니까!”

“대장, 아무리 막내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건 무립니다.”

하지만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겔베르트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신 있습니다.”

“... 좋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겔베르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전령 임무엔 데미언을 투입한다. 해가 떨어지면 바로 움직이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인원은 언제든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이상!”

잠시 후,

야간 은폐를 위해 얼굴 가득 검댕을 바른 나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

“후우우...”

해가 떨어진 봄날의 숲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내 몸 이곳저곳에선 식은땀이 연신 흐르고 있었다.

늘 곁을 지켜주던 든든한 동료들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경험한 적 없는 긴장 속으로 내몰았던 탓이다.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숲의 경계선에 닿은 나는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요새로 향하는 길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숲속의 무성한 수풀들이 나의 모습을 가려주었으나, 이제부터는 너른 평원을 가로질러 요새로 접근해야 하는 상황.

적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나는 주변 정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단 보이는 놈은 없는 것 같고.”

정말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달빛이 어두워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 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적들도 나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초생달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가는 구름의 모습.

저 구름이 달을 가리는 순간, 그 어둠에 기대어 몸을 움직일 것이다.

“... 어디 보자.”

구름이 움직이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잠시 상태창을 소환했다.

팟-!

『 데미언 / Lv. 19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잘 만들어진 단검(고급 등급)

- 단단한 가죽 갑옷(일반 등급) 』

“흐음...”

나로서도 상당히 오랜만에 열어보는 상태창이었다.

“이제 레벨 19...”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수치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 세상에 떨어진 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깡말랐던 고아 소년이 불과 2년 남짓한 시간에 은패 용병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같은 기간에 레벨 21이었던 엔리케가 겨우 두 단계 오른 레벨 23이 된 것을 생각하면, 내 발전 속도가 얼마나 규격 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그래, 아직 멀었다.

내 몸속에 잠들어 있는 드높은 검성의 경지를 생각하면, 고작 레벨 19 정도로는 성이 차질 않는다.

“더 열심히 하자, 그 녀석 만나게 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내가 기억하는 역사의 흐름대로 흘러간다면, 나는 앞으로 반년 안에 이 거대한 세계관의 ‘주인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첫 만남의 순간, 주인공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더 나아가 나란 사람의 가치를 키우기 위해선 시간이 있을 때 한 뼘이라도 더 성장해야 했다.

“... 슬슬 시작해볼까?”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

“하아,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 데 경계는 뭔 놈의 경계야... 시발.”

일행의 중간 즈음 선 사내가 불만스럽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그는 현재 멘하우 요새를 공격 중인 벨가르트 군의 십인장(百人長)으로, 직속 상관인 백인대장에게 요새 근방의 야간 경계 임무를 지시받았다.

그를 포함해 총 여덟 명의 경계조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둘은 활을 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조장님, 이제 슬슬 돌아가시죠? 조장님 말마따나 어두워서 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어차피 이쪽으로 오는 도로들 외곽에서 다 틀어막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장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야간 수색에 지친 부하들이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하들의 말을 들은 경계조장이 버럭 성질을 냈다.

“이런 시발 새끼들이... 지금 돌아가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 백인대장 그 씹새끼가 왜 이렇게 일찍 기어들어 왔냐고 지랄할 게 뻔한데 지금 들어가자는 말이 나오냐?”

“헙... 죄송함다.”

“시정 하겠습니다.”

“하여간 시발... 위에 있는 새끼들이나 아래 있는 새끼들이나 대가리에 똥만 차서 아무 생각이 없지. 어휴, 내가 왜 이딴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그냥 아버지 말 듣고 고향에서 농사나 지을걸!”

끓어오르는 짜증을 애먼 부하들에게 풀던 경계조장이 발길을 돌려 근처에 보이는 강가로 다가간다.

“어어, 조장님 어디 가십니까?”

“목 좀 축이려고 그런다! 니들 지껄이는 소리 듣고 있으니 시발 목이 절로 타들어 가네. 아오!”

“제 수통에 물 남았는데 좀 드립니까?”

부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경계조장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옆에 뻔히 맑은 물이 있는데, 그 구질구질한 수통에 담겨 있는 걸 먹고 싶겠냐?”

“... 알겠슴다.”

보통 군에서 지급되는 수통은 돼지나 소, 염소, 양 같은 가축의 위장에 가죽을 덧대어 만들었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지급 받는 수통의 품질에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기사나 백인대장 정도의 고위 군인들이 쓰는 수통은 깨끗한 위장에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말단 병사들이나 조장급 인원이 사용하는 수통은 제대로 손질도 안 된 위장에 싸구려 가죽을 대충 엮어 만든 것이라 심한 악취가 났다.

경계조장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리가 없는 부하는 고개를 떨구며 몰래 입 모양 만으로 욕을 할 뿐이었다.

찰박-

“으, 차갑다.”

강물에 손을 담근 경계조장이 뼛속까지 밀려오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떨었다.

땀에 찌든 얼굴을 대충 물로 씻어내고, 엎드린 자세로 물을 퍼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 꿀꺽-

냄새나는 수통에 담긴 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원하고 청량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야간 수색에 잔뜩 짜증 난 기분마저 좋아지게 만드는 물맛이었다.

“크으, 좋다! 브렌도르프에 숲이 많아 그런가, 물맛도 좋...”

홀로 감탄하던 경계조장이 별안간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하던 말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누, 누구...?!”

턱!

강가 수풀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순식간에 엎드려 있던 경계조장의 뒷머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슁- 푸욱!

“컥! 끄흑...!”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던 경계조장의 목에 시퍼런 단검이 꽂힌다.

날카로운 칼날이 목울대 부근을 완전히 베고 지나갔기에, 경계조장은 부글부글 피거품만을 토해낼 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끄륵, 끄르르르...”

철퍽-!

물을 마시려 엎드려 있던 그 자세 그대로, 강물에 머리를 처박은 경계조장.

그의 잘려나간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맑았던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구름에 가린 달빛은 아무 말이 없었다.

< 멘하우 요새 공방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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