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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8화 (18/197)

< 멘하우 요새 공방전 (5) >

“처음 뵙겠습니다, 케러 경. 저는 용병대 푸른 방패를 이끄는 겔베르트라고 합니다.”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 앞에 선 겔베르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너무 비굴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건방져 보이지도 않는 딱 적당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겔베르트를 보는 케러의 눈은 이미 상대에 대한 고마움과 호감의 감정으로 가득했으니...

“정말 반갑네, 겔베르트. 자네와 자네의 대원들이 우리를 살렸어!”

턱-

한달음에 겔베르트의 앞으로 다가온 케러가 그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감사를 표한다.

지난 열흘간 진행되었던 벨가르트 군의 포위 공격.

식량은 사흘 전에 이미 다 떨어졌고, 기다리던 지원은 오지 않았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고 있던 그때, 이웃 영지인 텔마르크에서 보낸 구원의 손길이 도착한 것이다.

“저희가 수송해온 물자는 총 마차 네 대 분량입니다. 마차 한 대엔 무기가, 나머지 세 대의 마차엔 식량이 실려 있습니다.”

“음, 식량 구성은 어떻게 되나?”

“두 대의 마차엔 호밀가루가, 남은 한 대에는 바짝 말린 육포와 옥수수, 소금이 실려 있습니다.”

겔베르트의 설명을 듣던 주변 브렌도르프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식량이 다 떨어져 먹을 게 없으니 군마라도 잡아서 나눠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가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자네들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후우...”

너무나 힘들었던 지난 며칠의 기억을 떠올리며 케러가 한숨을 내쉰다.

“... 굶주려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하고, 당장이라도 요새가 적의 손에 떨어질 상황이었어. 결과적으로 푸른 방패가 이 멘하우 요새를 구해낸 것이나 다름없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받은 의뢰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케러의 감사 인사를 들은 겔베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겸손한 태도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케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어제 전령으로 미리 보내온 친구 말이야. 그 녹색 눈동자를 지닌...”

“데미언 말씀이시군요.”

“아, 그래! 데미언! 그 친구가 그럼 푸른 방패 내에서 자네 다음 서열인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럴 것이란 믿음이 느껴지는 케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돌아온 겔베르트의 대답은 그런 케러를 비롯해 주변 멘하우 요새의 주요 인물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데미언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 이쪽 일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된 저희 용병대 막내입니다만...?”

“?!”

“!!!”

***

멘하우 요새에서 보내게 된 첫날 밤이었다.

본래 이백 명에 달하는 병력이 상시 주둔하는 멘하우 요새였으나, 현재는 그 절반 가까운 인원이 비어 있는 상태였기에, 우리 용병대가 머물 공간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이쪽부터 저쪽 복도 끝까지, 양옆에 있는 방들 모두 쓰셔도 됩니다. 방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지만, 우리 병사들이 얼마 전까지 쓰던 곳인 만큼 주무시는데 불편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숙소를 안내해준 브렌도르프의 병사가 돌아간 뒤,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아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참고로, 막내인 나는 선배들이 다 고르고 남는 곳을 골랐기에 화장실에서 제일 가까운(그래서 냄새가 조금 나는) 방에 묵어야 했다.

“후우... 그래도,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아무리 화장실 근처의 냄새 나는 방이라고 한들 야전에서 모포 한 장 깔고 자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밤이슬을 막아줄 지붕이 있고, 딱딱한 나무 재질이긴 하나 바닥의 한기를 막아줄 침대도 있었다.

이 정도면 5성급 호텔도 부러울 것이 없...

“... 는 건 좀 오버인가? 그래도 여관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뭐, 아무튼 좋다는 얘기였다.

그나저나 아까 레벨 올랐다는 알림이 한 번 더 떴던 거 같은데...

“... 확인해봐야겠다.”

팟-!

『 데미언 / Lv. 21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단단한 가죽 갑옷(일반 등급) 』

놀랍게도, 레벨 수치가 21이 되어 있었다.

“하룻밤 만에 레벨이 2나 올랐네? 이게 말이 되나?”

어떤 요인 때문에 이렇게 레벨이 오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지난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오늘 얻은 전투 경험치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보급 마차와 용병대 동료들이 숨어 있던 숲속을 출발해 멘하우 요새에 도착하기까지 홀로 잡아낸 적병의 수가 무려 열세 명.

그 중엔 평범한 병사가 아닌 십인장 급 실력을 지닌 적도 여럿 있었다.

숲에서 출발할 때 레벨 19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내가 멘하우 요새의 문턱을 넘을 때 레벨 20이 된 이유가 있었던 것.

뿐인가, 요새에 도착한 후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를 설득해 벨가르트 군을 상대로 야습(夜襲)을 감행했다.

보급 마차를 끌고 움직이는 동료들을 위해 이른바 ‘어그로’를 끌었던 거다.

“그럼 야습하는 과정에서 레벨이 하나 올랐다는 건데... 거참, 운이 좋았던 건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야습 과정에서 내가 베어 넘긴 적 중에 꽤 이름 높은 벨가르트의 기사가 있었다.

양측 다 제대로 준비를 한 상태에서 정면승부를 벌였다면 대단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밤중 자다가 깬 상태로 허겁지겁 튀어나와 말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로 싸우다 보니 내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십인장, 백인대장 등 전투 경험치를 듬뿍 안겨줄 상대를 여럿 잡아낸 덕분에 레벨이 상승했던 거다.

“확실히 자잘한 산적 놈들이나 들개 몇 마리 때려잡는 거랑은 효율이 비교가 안 되네...”

이래서 용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건가?

앞으로 이런 경험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하면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레벨을 몇 차례 더 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피곤하네, 슬슬 자야겠다. 내일도 경험치 빨아먹으려면 흐흐!”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되고 치열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복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푸른 방패 용병대의 리더 겔베르트의 방.

고된 하루에 지친 부하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었지만, 아직 그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쪼르르륵...

“오늘 진짜 고생 많았다.”

크라벤에서 출발하기 전 보급 마차에 미리 실어두었던 독한 브랜디가 자그마한 술잔에 채워진다.

겔베르트가 따르는 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 사내.

그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나이,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이다.

보통 작전 수행 중엔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그였는데, 지금 겔베르트가 따라주는 술을 흔쾌히 받는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들어와서야 안 거지만 확실히 브렌도르프 애들 상태가 많이 안 좋더군요. 병사들 사기가 말이 아닌 듯 보였습니다.”

“그럴만하지. 다른 건 둘째치고 밥을 제대로 못 먹었으니 칼 휘두를 힘이 있겠나.”

“예, 맞습니다.”

“대신 그만큼 식량을 얻어냈을 때 사기가 오르는 효과도 크겠지. 아까 우리가 끌고 온 마차에 호밀가루랑 옥수수 실려 있다는 말 듣고 애들 표정 변하는 거 봤냐?”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는 사람 없으면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더군요.”

“푸흐흐... 그렇지. 아무리 맛대가리 없는 호밀빵이라도 해도 굶는 거랑 비할 수야 있나.”

그렇게 낄낄대던 겔베르트가 문득 표정을 굳히며 본론을 꺼내놓는다.

“아까 수비대장이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더라.”

“으음... 예.”

아직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메이슨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길래,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우리가 텔마르크로부터 받은 의뢰 내용은 ‘보급 마차를 멘하우 요새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것’까지라고 말했지. 그 이상은 계약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도 했고.”

“역시... 대장님 말씀 듣고 수비대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크흠, 뭐.... 뻔한 소리지.”

의뢰 수행을 위해 크라벤을 떠난 이후 면도를 하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으로 쓸어낸 겔베르트가 재차 입을 연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과 함께 싸워달란 제안을 하더라. 값은 넉넉하게 쳐주겠다고 했는데...”

“거절... 하셨습니까?”

메이슨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지금 이 상황에서 두 영지 간의 싸움에 잘못 끼어들면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 나는 거야.”

“맞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근데... 수비 대장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게까지 옹졸한 사람은 아니더라. 안 도와줄 거면 당장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하룻밤 자고 내일 가라고 하더군.”

“그건 다행이군요.”

“그래. 사정이 안타깝긴 하지만 가망 없는 싸움에 우리 목까지 걸 필요는 없는 거니까...”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하들과 함께 요새를 떠날 준비를 하던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수비대장이 보낸 병사가 찾아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신의 방에서 잠시 보자는 얘기였다.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는다)에 겔베르트는 현장 지휘를 부대장 메이슨에게 맡기고 병사의 뒤를 따랐다.

“오! 왔나? 어떻게 잠은 잘 잤고?”

겔베르트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가 밝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요새가 포위되었던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당최 즐거울 일이 없었는데, 눈앞의 있는 사내과 그의 부하들이 모처럼 웃을 일을 만들어 주었다.

전쟁 상황만 아니었다면 술과 고기가 가득 차려진 연회를 열어 제대로 대접했을 것이다.

“경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병사들이 쓰던 숙소라 상태가 썩 좋지 못했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네. 자, 일단 앉게나.”

“예.”

군 지휘관인 요새 수비대장의 집무실답게, 방 안의 풍경은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칙칙한 색감의 벽돌과 무채색의 커튼, 미적인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투박한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까지.

그야말로 실용적인 면만을 고려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던 것.

하지만 손님인 겔베르트 역시 평생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인물이었기에, 이처럼 삭막한 방안의 풍경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크흠, 날 불러다 뭔 말을 하려고...’

그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바짝 긴장의 날을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예. 저희가 오래 있어봤자 요새 분위기만 어수선하게 만들 것 같아 일찍 떠나려 합니다.”

어차피 푸른 방패 용병대는 더는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

요새에 죽치고 있어봤자 병사들에겐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밥만 축내는 놈들도 보일 뿐이었다.

“그래, 뭐... 이제 떠난다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떼써서 될 문제는 아니지.”

“...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내가 자네 입장이어도 밑에 부하들 생각해서 거절했을 거야. 지금 우리 요새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으니 말이야. 뻔히 보이는 불구덩이에 부하들을 밀어 넣을 순 없겠지. 이해하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얘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인지.

수비대장의 앞에선 겔베르트는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요새를 떠나는 것 자체는 더 언급하지 않겠네. 하지만...”

“...?”

“이걸, 한 번만 봐줄 수 있겠나? 그 후에 좀 더 얘기를 나눠보세.”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로 수비대장이 내어놓은 서류 한 장.

“...!”

그 내용을 확인한 겔베르트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 멘하우 요새 공방전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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