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히든 피스 (1) >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인 우리는 멘하우 요새에서 북동쪽으로 한참을 이동해 나온 어느 평원에서 야영 준비를 서둘렀다.
“야야! 말뚝 더 깊이 박아! 애들 소꿉놀이하냐 지금? 이걸로 될 거 같아?”
“오늘 불침번 순번 정한다. 일단 너랑 너, 둘이 초번을 서고...”
“어? 저기 사슴 몇 마리 보이는데? 저거 잡아다 오늘 저녁 먹을까?”
야영지 마련을 위한 각자의 임무 수행을 위해 움직이는 대원들.
막내인 나 역시 식사 준비를 위해 근처 시냇가를 찾아 물을 길어오고, 땔감을 모으는 등 열심이었다.
밤새도록 불을 피워도 너끈히 버틸 만큼 넉넉히 땔감을 마련한 후에야 나는 휴식을 취했다.
“후우...”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어낸 지난 며칠이었다.
레벨도 두 단계나 올렸고, 그 과정에서 얻어낸 경험도 많았다.
왕국 남부에서 정예로 이름 높은 벨가르트의 기병대와 싸웠고, 평소 용병 의뢰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막강한 적들을 상대했다.
야습 때 상대했던 벨가르트 영지군 백인대장은 길바닥에서 여행객들 주머니나 노리는 도적놈들 열 놈을 상대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주었다.
백인대장이 그 정도였으니, 그보다 훨씬 윗급의 괴수(?)인 기사를 잡고 얻은 경험치의 대단함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새로 산 물건 성능 확인도 확실히 했고...”
내 허리에 매여있는 기다란 롱소드 한 자루.
일전에 한 번 언급했듯, 이번 의뢰 시작을 앞두고 그동안 모았던 돈을 탈탈 털어 장만한 고급 등급의 무기였다.
무려 80실버 짜리 검이었는데, 내가 처음 용병 일을 시작할 때 썼던 일반 등급의 숏소드가 6실버였다는 걸 생각하면 열 배 이상의 가격을 가진 무기였다.
“근데... 확실히 비싼 게 더 좋긴 하네.”
한 마디로 ‘돈값’을 하는 무기였다.
똑같은 힘으로 똑같은 검술을 펼치는 데 체력이 남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검의 무게 중심 배분이 좋고, 검날의 날카로움과 강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고급 등급이 이 정도인데... 그 윗등급은 얼마나 좋을지 감도 안 잡히네.”
<로스트 킹덤> 세계관의 무기는 총 여섯 단계로 나뉜다.
일반(Normal), 고급(Advanced), 희귀(Rare), 유일(Unique), 전설(Legendary) 그리고 신화(Mythic) 등급까지.
이중 일반적인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건 희귀 등급까지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유일 등급의 무기들은 이름 높은 장인들이 왕이나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전설 등급은 말 그대로 오래된 옛 역사에나 등장하는 무기였으며, 신화 등급은 애초부터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수준이었으니까.
“... 뭐,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하나 쓸만한 거 얻을 날이 오겠지. 무기가 대수냐, 쓰는 사람이 중요하지.”
본래,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리는 법이다.
***
“아니 그래서, 그 수비대장 양반이 자기 방으로 대장 불러서 보여준 게 뭐였는데요? 예?”
“보채지 좀 마라, 이 새끼야. 안 그래도 애들 다 모이면 말하려고 했어. 야, 물 끓어 넘치잖아! 빨리 육포나 집어넣어!”
야영지 한가운데, 큼지막한 솥을 걸고 저녁을 준비하는 엔리케와 그 옆에서 뭐라 잔소리를 하는 대장 겔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멘하우 요새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근처 가도를 봉쇄 중이던 벨가르트 군에게 붙잡히는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험악했던 분위기와 달리 우리가 주어진 의뢰를 마치고 빠져나가는 중립 세력임을 확인하자 별다른 제지 없이 우리를 놓아 보내주었다.
브렌도르프 군 측의 참전 의뢰를 받았지만, 가망 없는 전황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빠져나왔다는 겔베르트의 설명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가르트의 입장에선 적의 전력을 힘들이지 않고 덜어내는 상황이니, 구태여 우리를 공격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더니, 수비대장이 나한테 뭔 종이 쪼가리 하나를 보여줬다. 그 내용이 뭐였냐면...”
내가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겔베르트는 아침에 있었던 수비대장과의 대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브렌도르프 군이 멘하우 요새로 향하는 가도를 점거하던 벨가르트 군을 격파했다’는 보고였다.”
“...!”
“?!”
“이제 브렌도르프 군은 수복한 가도를 따라 멘하우 요새를 구원하러 달려올 것이고, 벨가르트 놈들은 요새에 웅크린 수비군과 곧 몰려올 등 뒤의 지원군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겠지.”
“그, 그럼... 이제 브렌도르프 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된 거 아닙니까?”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대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래. 수비대장도 나한테 똑같은 얘길 했다. 이제 전황은 브렌도르프 쪽에 유리해졌으니, 부담 갖지 말고 도와달라고. 영지전이 마무리되면 영주에게 말해서 넉넉하게 보상금을 챙겨주겠다고 했지.”
“아니, 너무 좋은 기회 아닌가? 대체 왜 거절하신 겁니까?”
“지, 지금이라도 브렌도르프 쪽에 붙어서 싸우는 게... 처음에야 적의 봉쇄가 언제 풀릴지도 모를 어려운 상황이니 참전 제안을 거절했다지만, 이제는 아니잖습니까?”
“맞슴돠! 적당히 분위기 타서 들어가면 손쉽게 한몫 건질 수 있을 분위기인데... 아오, 아까워!”
얼핏 듣기엔 타당한 주장.
하지만, 겔베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되지.”
“예?”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뭔...”
“아이씨, 알아듣게 좀 말해요!”
자신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겔베르트의 말에 속이 탄 대원들이 볼멘소리를 퍼붓는다.
하지만 동시에 겔베르트의 얼굴에도 답답함이란 감정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대체 이 자식들은 싸움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뭐, 이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절로 흘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겔베르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실낱같은 기대를 담은 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특유의 녹안(綠眼)을 반짝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리멍덩한 다른 대원들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 내 눈빛을 확인한 것일까?
겔베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 데미언.”
“예, 대장.”
“네가 한번 말해봐라. 내가 왜 수비대장의 제안을 거절한 것 같으냐?”
“음...”
그의 질문에 담긴 의도가 느껴졌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자신과 대등한 실력을 지닐 정도의 강자로 떠오른 무서운 막내.
심지어 나이는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열일곱이었다.
용병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그 비교의 범위를 업계 밖으로 넓힌다 해도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재능.
하지만, 지금 겔베르트가 묻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검(劍)을 들지 않은 너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느냐?
이 대답을 잘 해낸다면, 푸른 방패 내에서 나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 그리고, 그 높아진 영향력은 앞으로의 내 계획에 도움이 되겠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비대장의 첫 번째 참전 제안을 거절하신 것,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다들 궁금하신 건 대장이 두 번째 참전 제안을 왜 거절했냐는 거잖아요?”
“그래, 네가 좀 말해봐라. 대장이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발로 걷어찬 거냐? 노망이지? 이거 노망 난 거 맞잖아?”
끝까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엔리케를 용케 무시하며 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수비대장은 브렌도르프 군이 가도를 점거하던 벨가르트 군을 격파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대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불리했던 전황이 이제 브렌도르프 군에게 유리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대장에게 알려준 것이죠. 일단 이 부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이제 전황이 유리해졌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들의 편에 합류하라는 의도에서 말해준 거라고 수비대장이 직접 얘기했잖아?”
앞서 들었던 겔베르트와 수비대장의 대화 내용을 기억해낸 대원의 대답.
하지만 데미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말 그대로 수비대장의 ‘의도’일 뿐입니다.”
“엥? 그게 뭔 소리야?”
“브렌도르프 영지 전체의 상황은 좋아진 게 맞지만, 범위를 멘하우 요새로만 좁혀 생각하면 전황은 더욱 안 좋아진 거거든요.”
“아니 왜...?”
“다들 생각해보세요. 하루 이틀 안으로 브렌도르프의 지원군이 도착할 상황입니다. 벨가르트 입장에선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요새를 함락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
데미언의 대답을 들은 대원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허, 그런...”
“그래... 빨리 요새를 점령한 다음에 성벽에 기대서 몰려올 지원군을 상대하는 게 맞지.”
“가뜩이나 벨가르트의 병력이 훨씬 많았다고 했으니, 피 보는 거 감수하고 미친 듯이 몰아치면 멘하우는 하루 만에 떨어질 거야.”
“그래서, 안 봐도 뻔할 그 개판 상황에 돈 주고 산 우리부터 밀어 넣겠다? 이 시발...”
“썅! 브렌도르프 이 개새끼들이!”
이제야 수비대장의 참전 제안이 뭘 뜻하는지 깨달은 대원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
“대장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브렌도르프 군의 ‘고기 방패’로 쓰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참전 제안을 거부한 거겠죠. 제 해석이 맞습니까?”
데미언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푸흐흐... 진짜, 데미언 너는 뭘 하든 늘 내 예상을 넘어서는구나. 정확하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야.”
“그럼, 굳이 텔마르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오신 것도 제가 생각한 이유 때문일까요?”
이번엔 질문자와 답변자가 바뀌었다.
내가 물었고, 겔베르트가 그에 답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는지, 겔베르트가 만면에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 근처에서 계속 머물면서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의 전쟁 상황을 살필 생각이다. 이 전쟁, 아무리 생각해도 금세 끝날 것 같지가 않아.”
“금세 끝날 것 같지 않다... 그건, 돈 벌 기회가 남아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시죠?”
확신이 담긴 데미언의 눈빛에, 겔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막내 이 새끼... 진짜 귀신이네? 맞아. 타이밍 보다가 우리 몸값 제일 비싸게 부를 수 있을 때쯤 도박판에 뛰어들 생각이다. 집에서 멀리 나왔는데, 돈 많이 벌어가야지?”
“오오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성을 올렸다.
‘역시, 우리 대장은 똑똑해!’, ‘젠장, 믿고 있었다고!’ 따위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지.
“아니, 근데 대장? 아무리 우리가 중립 세력이라도 해도 이 근처에서 알짱거리면 브렌도르프건 벨가르트건 우리를 곱게 안 볼 것 같은데요?”
“그치. 자기네들은 한창 피 터지게 싸우는 중인데, 옆에서 용병대가 양쪽 간 보면서 기웃거리면 확 죽여버리고 싶을걸?”
부하들의 합당한 지적이 이어졌지만, 이미 그에 대한 계획도 세워놓은 겔베르트였다.
“그러니까 어디 안 보이는데 잘 숨어 있어야지. 멘하우 요새랑 거리는 가까운데, 전쟁의 불길엔 전혀 휩싸일 걱정이 없는 그런 곳에.”
“아니, 대체 그런 데가 어디... 아!”
이번에는, 엔리케도 아는 답이었다.
“성지(聖地) 에셀바흐! 맞죠, 대장?”
실로 오랜만에 나온 엔리케의 똑똑한 모습에, 겔베르트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리는 지금 에셀바흐로 간다.”
< 두 번째 히든 피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