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히든 피스 (2) >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겔베르트와 나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리가 멘하우 요새를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두 영지 간 전쟁의 승패는 안개 속에 있었다.
벨가르트 군에게 함락되었던 멘하우 요새를 다시 브렌도르프 군이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멘하우 요새의 성벽엔 다시 벨가르트 군의 깃발이 휘날렸다.
이틀 걸러 요새의 주인이 바뀌고 있는 상황.
푸른 방패의 모두가 저 지옥 같은 전장에 자신들이 껴 있지 않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대장, 그거 들으셨습니까?”
성지(聖地) 에셀바흐에 위치한 여관 ‘구원의 노새’.
성지라는 지역적 특성답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감도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내가 있었다.
“뭐, 인마. 뜬구름 잡지 말고 그냥 본론을 말해.”
“참나, 뜬구름 잡는 건 대장 전문이고요.”
“어, 난 그래도 돼. 대장이니까. 억울하면 너도 대장 하든가.”
“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 엔리케였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음? 어, 그 뭐냐, 아침에 밥 먹다가 옆 테이블 상단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각 영지에서 출발한 지원 병력이 멘하우 요새 근방의 평원으로 집결 중이랍니다. 한판 크게 붙을 것 같던데요?”
“흐음, 지원 병력이라면... 영지군은 애초부터 박박 긁어다 투입했으니 돈으로 산 용병들이겠네.”
“맞습니다. 지금 브렌도르프랑 벨가르트 양쪽에서 용병들 몸값이 막 치솟고 있다네요. 으흐흐흐!”
그 말을 전하는 엔리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서 우리도 가자고?”
“예? 아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재미도 없는 동네에서 일주일이나 짱박혀 있던 거잖아요. 용병들 몸값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어허, 이 새끼가... 어디서 불경스럽게 성지(聖地)를 두고 ‘재미없는 동네’라고 지껄여? 너 이단심문관한테 끌려가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 봐야 정신 차리지?”
“헙!”
겔베르트의 살벌한 말에 기겁한 엔리케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 아르닌의 전능함을 믿지 않는 간교하고 사악한 자’들을 찾아내 교화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이단심문관.
하지만 그 ‘교화(敎化)’라는 것이 대개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굉장히 거친’ 방법으로 이루어지곤 했기에,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이단심문관을 만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크흠, 대장은 뭘 또 농담한 걸 가지고 그렇게...”
“내 앞에서나 농담이지, 이 동네에선 잘못 걸리면 ‘이단의 간교한 혓바닥’ 취급받는 거야. 여기 어딘지 몰라?”
“아, 알죠... 너무 잘 알죠.”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엔리케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성지(聖地) 에셀바흐.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 대부분이 신실한 아르닌의 종을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신(神)을 상대로 입 한번 잘못 놀리면 그 즉시 패가망신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재미없는 동네’니 뭐니 불경한 말을 지껄였으니, 겔베르트가 경고를 할 만도 했다.
“어째 너는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드냐... 막내 하는 거 보고 좀 배워라 인마.”
“쩝, 데미언 그 자식은 뱃속에 노인네가 서너 명은 들어앉은 놈이잖습니까. 저랑 비교하면 안 되죠.”
“하긴, 가끔은 나도 그 자식이랑 얘기하다가 놀란다. 나보다도 윗사람 같은... 아니? 그러고 보니 막내는 어디 갔냐? 여기 와서도 맨날 개인 훈련한다고 푸닥거리던 놈이 오늘은 통 안 보이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데미언의 모습을 찾는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엔리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데미언 그 자식 기도한다고 아침 일찍부터 성당 갔습니다.”
“성당? 그 자식이 성당을 갔다고? 눈앞에 신이 있어도 콧방귀 뀌면서 훈련이나 할 놈이?”
엔리케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아는 데미언은 ‘신실함’과는 꽤 거리가 먼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함 가득한 겔베르트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성당 건물로 향한다.
“... 대체 이 자식은 무슨 꿍꿍이야?”
***
그것은 근 8백여 년 전에 해당하는 머나먼 옛날의 일이었다.
어느 깊은 숲속, 오랜 굶주림에 지친 한 남자가 들짐승에게 물려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우연히 그 숲을 지나다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 한 사람.
그는 다름 아닌 먼 훗날 아르닌 교의 창시자요, ‘선지자(先知者)’로 불릴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하인델(Heindel)이었다.
그는 늘 가지고 다니던 행낭 속 황금(黃金) 물잔에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흘러나온 피를 담았다.
그리곤 쓰러진 남자의 입에 그 피를 흘려 넣어 주었는데, 그러자 남자의 온몸에 가득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꺼져가던 눈빛이 살아났다.
평생토록 선지자 하인델이 행하게 될 아흔아홉 가지 기적(奇蹟) 중 첫 번째로 기록된 일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하인델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영원한 종복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가 바로 하인델을 따른 최초의 사도(師徒)이자 훗날 아르닌 교의 초대 교황 안테로 1세가 되는 루트 숄(Ruth Scholl)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교황이 된 그는 자신이 하인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던 그 장소에 기적의 증명으로서 작은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그 성당에 하인델의 성혈(聖血)을 담아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황금 물잔, 이른바 ‘구원의 성배’를 보관토록 지시했으니...
***
“... 여기가 바로 초대 교황의 목숨을 구원한 성배(聖杯)를 보관하고 있는 그곳, 에셀바흐 대성당이라네. 허허허!”
곁에 선 노인의 흐뭇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앞의 웅장한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에셀바흐 대성당(Basilica Esselbach).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도시보다도 더욱 오래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축물.
더불어,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단 네 곳에만 허용된 ‘대성당(大聖堂)’의 이름을 지닌 종교 건축물이기도 했다.
“자네, 여기 와본 게 처음이라고 했지?”
“예, 어르신. 이번에 다른 일로 에셀바흐에 들렀다가 이렇게 성당에 발걸음을 하게 됐습니다.”
“흘흘, 그렇구만.”
나는 노인의 물음에 미소 띤 얼굴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에셀바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었는데, 가는 방향이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지게 되었다.
“어르신은 에셀바흐에 사시는 분인가요?”
“나? 허허, 아닐세. 우리 집은 저 멀리 영지 북쪽에 있다네. 프라바크 마을이라고... 멋진 숲과 맑은 호수를 끼고 있는 작고 예쁜 산골 마을이지.”
“영지 북쪽이라... 그럼 여기서 꽤 거리가 될 텐데, 어르신 혼자 어떻게 오셨어요?”
“나 혼자? 허허, 길바닥에서 객사할 일 있나? 그러진 못하지.”
“그럼 어떻게... 같이 오신 일행도 없으신 것 같은데?”
“그, 우리 마을에 달마다 들르는 상단이 있거든. 그 친구들 따라서 브레스덴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성지 순례객들이랑 합류해서 같이 움직이는 거야.”
“아...”
“그런 식으로 매해 성지 순례를 온다네. 벌써 스물일곱 해가 됐지.”
“어휴, 정말 대단하시네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이도 적지 않으신 양반이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온다니?
‘그것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년 말이지...’
참,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뭔지.
그런 건 개뿔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어 이곳을 찾아온 내가 봤을 땐 경이롭기까지 한 노인의 신앙심이었다.
‘... 하긴, 이 세계에서 아르닌 교가 지닌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가?’
<로스트 킹덤> 세계관 속 아르닌 교의 위상은 중세 유럽의 로마 가톨릭 이상 가는 수준이었다.
그 점을 고려하면 노인이 보여주는 신앙심이 그리 특별한 게 아니긴 했다.
“보자... 자네도 구원의 성배를 보러 온 게지?”
“예, 뭐... 그렇죠.”
“참 부럽구만, 부러워. 자네처럼 젊은 나이에 구원의 성배를 눈에 담을 수 있다니...”
말을 마친 노인의 눈빛이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해진다.
그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 본인의 입으로 언급한 아르닌 교의 성스러운 보물, 구원의 성배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어이구, 무슨 뽕 맞은 표정을 다 지으시고... 하긴, 그게 무진장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
주 아르닌을 믿는 신실한 교인들 사이엔 구원의 성배가 내뿜는 찬란한 황금빛을 두 눈에 담기만 해도 아픈 곳이 씻은 듯 나으며, 아이를 갖지 못하던 이들은 임신의 축복을 얻고, 남은 생의 액운을 쫓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
혹자는 그게 다 아르닌 교에서 퍼트린 미신일 뿐이라며, 어리석은 기대를 품는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했지만...
‘... 구원의 성배가 가진 권능으로 모든 상태 이상과 질병의 회복, 거기에 신체 강화까지 이뤄낼 수 있지. 임신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구원의 성배에 부여된 역사적 설정을 직접 만들었고, 히든 피스 아이템으로서의 권능을 부여했으며, 게임 내 필드에 배치까지 한 나에겐 비과학적 미신이 아니라 확실한 가치를 지닌 진짜 보물이었다.
“허허허, 그럼 같이 들어가세나. 서두르지 않으면 순례객들이 몰려서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할...”
“아, 저는 괜찮습니다. 에셀바흐 대성당에 처음 와 봐서, 주변 구경부터 천천히 하고 성배는 이따가 보려고요.”
“으흠? 그런가? 하긴... 대성당을 처음 본다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처음 여길 왔을 땐 성당 건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었다네. 어찌나 아름답고, 또 웅장하던지...”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허헛, 이 늙은 노인네가 바쁜 젊은이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구만. 미안하이, 우리 손주 생각이 나서...”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랑 대화하는 것 같았어요.”
그 고향이 다른 차원이라는 건 함정이었지만, 노인과 보낸 짧은 시간이 꽤 푸근한 감정을 일깨워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잘 가게. 우리 모두 아르닌의 품 안에서 사는 아이들이니,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겠지. 허허허!”
“저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어르신!”
서로 가는 방향이 달랐던 나와 노인은 에셀바흐 대성당 입구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노인은 대성당 안에 전시된 ‘구원의 성배’를 보기 위해 입구 쪽으로 향했고, 나는 대성당 건물 옆으로 조성된 자그마한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대성당 주변 구경을 하기 위해서?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어디 보자, 대성당 건물 옆에 정원이 있고 거기에 연못이... 그렇지, 저기 있네.”
마침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그마한 연못.
바로 이곳에 내가 노리는 <로스트 킹덤>의 두 번째 히든 피스,
‘진짜’ 구원의 성배가 잠들어 있다.
< 두 번째 히든 피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