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히든 피스 (3) >
뎅그렁... 뎅그렁...
정오를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대성당 종탑 안에서 힘차게 울려 퍼졌다.
대륙에 단 네 곳밖에 없는 대성당의 칭호를 받은 종교 건축물답게, 종소리마저도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이고... 여름이 왔긴 왔나 보다. 해가 뜨거운 걸 보니.”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정원의 나무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머리 위로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진다.
눈부심을 참아내며 슬쩍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세워진 지 수백 년이 흐른 탓에 때가 타고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견실해 보이는 성당의 벽면이 보인다.
둥근 모양의 창문이 여럿 나 있는 그 두꺼운 벽 위로 돔 형태의 커다란 지붕이 얹혀 있고, 다시 그 지붕 위로 길쭉한 기둥이 솟아올라 종탑을 이룬다.
그 종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건,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십자가.
실로, 없던 신앙심이 절로 솟아나는 광경...
‘... 까지는 아니고.’
대단히 멋있긴 한데, 대대로 무교 집안에서 자라 과학 문명의 세계에서 살다 온 나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까진 아니다.
솔직히, 내 눈엔 대학생 때 친구들과 배낭여행으로 갔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좀 더 멋있는 것 같다.
“하긴 뭐, 건설 기술력이 비교가 안 되니까...”
대성당의 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셀바흐 대성당 정원에 자리한 자그마한 연못.
이곳은 에셀바흐 대성당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여 년간 그 어떤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드러낸 적 없는 신비한 전설로 유명한 연못이었다.
“그래서, ‘영원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뭐, 샘물 마신다고 수명이 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읏차!”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에 보이는 연못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가, 뜨끈했다.
“어휴... 무슨 엉따라도 틀어놓은 것 같네.”
햇살을 받아 뜨뜻하게 달아오른 바위의 열기가 엉덩이로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봄 정도만 되었어도 따뜻하고 좋았을 텐데, 날이 덥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설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그대로 앉은 채 천천히 연못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조용하구만.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영원의 샘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나름 유명한 곳이었지만, 구원의 성배가 워낙 압도적인 이름값을 가진 탓인지 다 그쪽으로 몰려가고 여길 구경하러 온 사람은 없었다.
대신 성당에서 키우는 녀석인지, 아니면 동네에서 떠도는 놈인지 모를 멍멍이 한 마리만 연못가 근처 그늘에 배를 까고 누워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끼이잉... 쩝쩝...”
“저놈이... 뭔 맛있는 거 먹는 꿈이라도 꾸나?”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휴식을 마친 나는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서였다.
“흐음... 보기보다 수심이 더 깊네...? 안 빠지게 조심해야겠다.”
연못은 꽤 깊었다. 하지만 워낙 물이 맑은 탓에 바닥을 노니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않는다던데, 그 얘기가 꼭 맞는 건 아닌가 보다.
“쩝, 물고기 보니 갑자기 회 먹고 싶네...”
이 세계에선 생선을 날로 먹지 않으니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이참에 회 뜨는 거나 연습해볼까?
“보자, 대충 기억 속 풍경이랑 여기서 보는 각도가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연못이 작다고는 해도 내가 지금 머무는 여관방 서너 개 정도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기에,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저기다.”
세심한 관찰 끝에 내 눈에 들어온 연못의 한 지점.
붉고 노란 꽃들이 주변에 피어있고, 마치 웅크린 늑대 같은 모습을 한 바윗돌 옆에 개구리밥이 잔뜩 떠 있는 곳.
“허, 진짜 똑같네. 게임 속이랑.”
사무실 내 책상 위에 놓인 32인치 모니터로 수십, 수백 번을 지켜봤던 바로 그 풍경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제발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웅크린 늑대의 모습을 꼭 빼닮은 바위 곁,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위 아래 연못물 속으로 손을 뻗었다.
첨벙!
내 왼팔 전체를 집어삼킨 연못물의 차가움이 찌르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으, 차가워...”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놀란 물고기들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 물고기 친구들아. 그렇게 도망가지만 말고 나 좀 도와줄래?
잠시 머릿속을 스친 실없는 생각을 금세 털어버리고 다시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본다.
“끄흥... 이건 그냥 돌이고... 이건 진흙 덩어리 뭉친 거고... 하씨, 어딨지?”
이렇게 연못 바닥을 뒤지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함이 커진다.
바로 그때.
‘...!’
턱, 손가락 끝에 잡힌 무언가.
미끄덩거리는 물이끼의 느낌이 소름을 돋게 한다.
하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
바닥을 계속 뒤적거린 탓에 흙탕물이 올라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그 형태를 파악해본다.
‘... 이거다!’
확신이 든 나는 침착하게 연못 바닥을 긁어내었고, 흙 속에 반쯤 묻혀 있던 물건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촤아악!
마침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물건의 정체.
그것은 오래되어 녹슨 청동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깔이 가득한 작은 물잔이었다.
“후우... 겨우 찾았네. 하하하!”
물잔을 바라보는 내 얼굴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내 손에 들린 이것이 바로, ‘진본(眞本)’ 구원의 성배였으니까.
***
“어, 막내. 이제 들어오냐?”
일 없는 한량처럼(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관 앞에 죽치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엔리케가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거참, 남는 시간에 운동 좀 하시라니까... 조장 지난번에 뛰는 거 보니까 숨차서 엄청 헉헉거리더만.”
“야, 솔직히 내가 뛸 일이 뭐가 있다고... 별로 날쌔지도 않은 다리 놀려서 뛸 바엔 화살 하나 더 날리는 게 낫지. 안 그러냐?”
“아이고, 그러다가 언제 한번 크게 실수한다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태평합니까?”
내 입에서 쏟아지는 잔소리에 엔리케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다.
“어허! 이 자식이 하늘 같은 선배한테 어디 건방지게!”
“걱정되어서 그러죠, 걱정!”
“야, 잔소리는 그쯤 해라. 네가 뭔 우리 아빠냐?”
“아빠면 이미 엉덩이 걷어차서 운동 시켰지. 어휴...”
“됐고, 그 얘기나 좀 해봐.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평소 곁눈질로도 안보던 성당을 간 건데? 응? 꿀단지라도 숨겨 놨냐?”
“왜요, 내가 뭐 못 갈 곳이라도 갔어요? 저도 전능하신 주 아르닌의 어린 자식입니다!”
“허...”
내 입에서 나온 ‘전능하신 주 아르닌의 어린 자식’이란 표현에 말문이 막힌 엔리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마랑 친구 먹자고 해도 그러려니 할 놈의 입에서 나이 먹은 사제나 할 법한 말이 나오다니?
“허, 시발. 살다 보니 내가 별소릴 다 듣네. 뭐? 전능하신 아르닌? 너 뭐 잘못 먹었냐?”
“휴우, 저도 내년이면 성년 아닙니까? 어른 소리 들을 나이 되니 마음이 약해져서 믿음에 기대고 싶어지나 봅니다.”
“아니 미친... 야 인마! 너 어디 아프냐? 어? 자꾸 이상한 소릴 해? 야!”
어이없어하는 엔리케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여관으로 들어온 나는 다른 선배들과 어울려 이른 저녁을 먹었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피곤해 먼저 쉬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향했다.
딸깍-
“후우...”
방문을 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품에 들어 있는 물건 때문에 심장이 쿵쿵 뛰고 긴장이 가시질 않은 지난 몇 시간이었다.
생각 같아선 바로 내 방으로 들어와 물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직행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일부러 동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들어왔다.
“... 뭔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주인 없는 물건 하나 주워서 가져온 건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냐... 읏차!”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내 손에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청동 물잔, 구원의 성배가 들려 나온다.
처음 건져냈을 땐 진흙과 이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더럽기 그지없었지만, 연못물에 깨끗이 닦아내어 가져왔기에 지금은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색깔은 예쁘네. 푸르스름한 게...”
처음 만들었을 땐 구릿빛이었을 이 자그마한 물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청동이 산화되어 지금의 청록색(靑綠色)이 된 것이다.
“후우... 그럼 시작해볼까?”
첫 번째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지닌 힘을 흡수할 땐 검을 들어 직접 내 심장을 찔러야 했다.
직접 만들었던 괴이한 설정에 내가 내 발등을 찍는, 아니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일이 없지.”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의 힘을 흡수하는 방법은 아주 평범했다.
물이 되었건 술이 되었건, 마실 수 있는 무언가를 성배에 따른 후 그걸 마시면 끝이다.
나와 달리 변태적 성향(?)이 없었던 후배 개발자가 만든 설정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후배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 내가 다음 생애에서라도 만나면 꼭 은혜 갚으마. 고맙다, 윤석아.”
이제 얼굴도 가물거리는 지난 생의 인연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미리 준비해둔 가죽 물통 속의 물을 바닥에 내려둔 구원의 성배에 따랐다.
쪼르르륵...
성배의 크기가 작아서 기껏해야 두세 모금 마실 정도의 물밖에 채울 수가 없었지만, 어차피 목이 말라서 하는 일이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오? 뭐야?”
물을 따르자마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투명했던 물 색깔이 점점 금빛으로 물들었던 것!
처음엔 지난 생에 종종 보았던 금가루 넣은 비싼 술 같은 건가 생각했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예 달랐다.
“... 물 자체가 빛을 뿜어내는데?”
말 그대로였다.
외부의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구원의 성배에 담긴 물 자체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분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양초를 켜지 않아 어두웠던 방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어우씨, 이러다가 이단심문관한테 잡혀가겠네!”
밖은 점차 어둑해져 가는 이 시간에, 갑자기 방안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온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광경에 괜한 일에 휘말릴까 싶어 나는 황급히 창문의 커텐을 치고, 짐가방을 가져다 출입문 틈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몸을 이용해 성배의 빛을 가렸다.
이 정도면 밖으로 빛이 흘러나가진 않으리라.
“아니지...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그냥 마셔버리면 되잖아!
눈부시게 터져 나오는 이 빛을 잠재울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나는 재빨리 성배를 손에 쥐었다.
그사이 성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욱 강해져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우, 눈부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꿀꺽, 꿀꺽!
나는 성배에 담겨 있던 물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
그 순간, 목구멍부터 시작되어 온몸에서 느껴지는 믿을 수 없는 청량감!
목 막히는 음식을 먹다 사이다를 마신 듯한 기분?
오랜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농구 한 게임을 뛴 뒤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그런 것 ‘따위’와 지금의 이 기분을 비교하는 건 너무 큰 실례다.
기분이 너무 좋아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입과 코가 뻥 뚫리며, 머릿속에 끊임없이 폭죽이 터지는 듯한 이 기분은 마치...
‘... 이게, 섹스지!’
너무 좋아 눈깔(?)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두 번째 히든 피스 (3) > 끝